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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낮아짐의 지혜 (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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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낮아짐의 지혜     
본 문: 빌립보서 2:5-11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과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것과 다시 재림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축복을 받아 누리기 위함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만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 사람의 모델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갈 때 이 세상에서 빛이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복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엇을 닮아야 하겠습니까?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낮아진 삶을 본받으라고 하셨습니다.“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5-8)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낮추어야 하겠습니까?

一. 자신의 감정을 낮춰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죄인 취급을 받아 억울한 재판을 비롯하여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침을 뱉고, 뺨을 치며, 옷을 벗기는 수모를 겪으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모습은 떨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 양과 같았다고 했습니다(이사야 53:7). 격한 감정을 잘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밝히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대항할 만한 능력이 없어서 그러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마태복음 26:52~54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라고 하셨습니다. 그 억울한 순간에 그들을 당장 멸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감정을 억제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감정대로 살아가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오래전 어느 부대 사단장이 연대를 순시하면서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흥분된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연대장의 정강이를 차고 지휘봉으로 어깨를 내리쳤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서 나갔습니다. 이때 연대장이 사단장 등판을 향해 총을 쏴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 연대장도 훌륭한 대령이어서 아무리 진정서를 제출해도 하극상의 큰 죄를 범했기 때문에 사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 다 흥분된 감정을 이기지 못해 빚어진 비극입니다.

공중전화를 걸기 위해 기다리면서 앞에 있는 사람의 통화가 길어지자 그만  그 사람을 죽인 경우가 있었습니다. 순간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한 것이 평생 동안 지울 수 없는 후회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의 성격이 급하다고 합니다. 도로정지선에서 신호가 바뀌었을 때 조금만 늦으면 여지없이 ‘빵빵’하고 경적을 울립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시키자마자 빨리 빨리를 외칩니다. 원인은 고추를 먹기 때문에 그렇다고도 하고, 라면이 나온 후부터 성격이 급해졌다고도 합니다. 옛 우리의 조상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여유가 있었습니다.

잠언 12:16에 말씀하시기를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사람은 수욕을 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잠언 16:32에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낮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감정을 다스려 낮추면 후환이 없습니다. 평화롭습니다. 후회를 남기지 않습니다. 끌어 오르는 격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다짐으로 되겠습니까? 노력으로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닳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내 안에 계셔야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영 즉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갈라디아서 5:20)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되 내 육신의 필요한 것만 구할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내안에 임재 해 계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내 마음을 주관하셔야 합니다. 그리하면 순한 양처럼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5:18에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라고 하셨습니다. 


二. 자신을 위치를 낮추어야 합니다.

몇 년 전 어느 가을에 목회계획을 세우고자 자주 가는 수양관에서 며칠간 기도하며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뒷산에 있는 등산로를 따라 산길을 가다보니까 태풍에 스러진 큰 나무 한 그루가 등산로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만 나무 밑으로 지나 갈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스러진 나무에 종이에 글씨를 써서 코팅한 것을  매달아 놓았습니다. 거기에 “겸손 연습, 머리를 숙이면 부딪치지 않습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세를 조금만 낮추면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의 낮아지신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빌립보서 2:6-8)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만큼 낮아지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을 우리가 섬기고 있습니다. 스스로 높은 줄로 여기면 후회할일이 생깁니다.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청평댐에서 견지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 근처에서 목회하는 목사님과 함께 낚시를 갔는데 그곳의 목사님이 말하기를 “여기 낚시 하러 온 사람들 중에는 돈 많은 부자도 오고, 장군 같은 계급 높은 사람도 오고, 큰 회사 사장이나 회장들도 오기 때문에 허름한 옷차림에 벙거지 같은 모자를 쓴 사람이라고 해서 우습게보면 안 됩니다. 돈이 있어도 있는 체 말고. 계급이 높아도 높은 제 말고, 공부 많이 하고 학위가 있어도 아는 체하면 안 됩니다.” 라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어느 장군이 벙거지를 뒤집어쓰고 낚시를 하는데 그 옆에 별 두 개 단 장군이 벙거지를 쓰고 그 옆에 배를 바짝 갖다 댔습니다. 더 높은 분이 점잖게 좀 떼어 대라고 부탁을 해도 들은 척도 않고 계속했습니다. 계속 떼라고 하니까 그 장군이 ‘야, 이 새끼야. 네가 뭔데 남보고 떼라 말라 해.’ 하니까  장군이 꾹 참고 있다가 낚시를 마치고 나와서 그 2성 장군의 뺨을 치면서 ‘차렷! 쉬어!’ 하면서 기압을 주는데 알고 봤더니 그 사단장 보다 훨씬 계급이 4성 장군이었다고 합니다. 높아도 낮은 자같이 처신하고, 있어도 없는 자같이 처신하면 큰 실수를 안 할 텐데 스스로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면 이런 부끄러운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9~31에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촉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있어도 없는 자같이 하라.” 또한 “높아도 낮은 자같이 하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소망을 가진 자들인데 잠깐 있다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이 세상에서 좀 높으면 어떻고 낮으면 어떻습니까? 재물이 좀 많으면 어떻고 좀 가난하면 어떻습니까? 있어도 없는 것같이 높아도 낮은 자같이 낮추어 처신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과 동등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자기의 본래의 영광을 버리시고 높고 높은 하늘나라에서 이 추한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대속 제물로 죽으러 오셨습니다. 한없이 낮아지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본문인 빌립보서 2:6~8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 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때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에는 잔칫집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상좌에 앉지 말라. 만일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오면 말석으로 내려앉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무슨 망신이냐. 발석에 앉았다가 강권해서 올라앉으면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11절에 말씀하시기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낮추는 것은 곧 주님의 교훈입니다.


三. 자신의 욕심을 낮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늘나라를 버리시고 이 추하고 더러운 세상에 오신 것은 자신의 욕심을 다 버리신 증거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명예욕도, 권세욕도. 물욕도. 너무나 큽니다. 절제하기 어렵습니다.

천사장 루시퍼가 예수님 다음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뭇별 위에 자기 보좌를 높이고 하나님의 보좌까지 찬탈하려하다가 저주를 받고 쫓겨나서 사탄이 되었습니다. 사탄의 본성은 탐욕과 교만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다 욕심이 있습니다. 이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면 안 됩니다.

누가복음 12장에는 두 형제가 재산 분배 문제로 다투다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처리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누가복음 12:11)라고 책망하듯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해결 방법을 말씀하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 12: 15) 하셨습니다. 소유를 늘리려 하지 말고 욕심을 줄이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이 많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더 행복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누가복음 12:16~21) 고 하셨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나눠 줘야할 때 나눠주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바쳐야할 때 바치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베풀어야 할 때 베푸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것은 영원히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누가복음 16:9) 하셨습니다. 잠언 28장 16절에는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북한에서 같이 의학을 공부한 두 분이 남한으로 내려와서 한분은 목사가 되었고, 한분은 의사로 서울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집사의 직분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집사인 친구 의사가 바쁘니까 교회를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친구 목사가 교회에 열심히 나오기를 권면했습니다. 친구 의사는 말하기를 “나 박사 학위 받고 열심히 나갈게” 라고 했습니다. 학위를 받은 뒤에도 역시 교회에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 잘하기를 친구 목사가 다시 권면했습니다. 친구 의사가 이번에는 “병원 빌딩 하나 사고 나갈게” 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에 만나니까 얼굴이 핼쑥해졌기에 “왜 얼굴이 안 좋으냐?”라고 물었더니 “소화가 좀 안 돼서 그래. 괜찮아.”라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얼마 후 “간암 말기가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장례식 때 가서 보니까 관위에 의사면허증, 박사학위증과 무슨 표창장들이 즐비하게 올려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게 부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탐심을 줄이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 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고 하셨습니다. 


四. 타인에 대한 비판을 줄여야 합니다.

비판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누가복음 6:37)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7:1~5말씀에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하셨습니다. 

나와 너의 차이는 너무 큽니다. 이러한 말을 다 아실 것입니다.“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처럼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하지만 남에 대해서는 아주 냉정합니다. 자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자식이 집안에서 뛰놀면 씩씩하게 보이고, 남의 자식이 뛰놀면 버릇없어 보입니다. 자기가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필요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고, 남이 말을 많이 하면 수다스럽다고 합니다. 자기가 값비싼 물건을 사면 필요해서라고 하고, 남이 고급 물건을 사면 사치스럽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후하지만 남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속에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면 안 됩니다. 마귀는“참소자”라고 했습니다.  잘못하면 마귀의 영에 씌우기 쉽습니다. 잠언 25장 9절에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을 누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혹시 싸울 때가 있어도 남의 깊은 비밀이나. 치명적인 약점은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거짓말로 터무니없는 비판을 합니다. 그러다가 마귀의 도구가 됩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할 말을 줄이고 입술을 지켜야 합니다. 다 쏟아 놓으면 그 당시에는 통쾌할지 모르나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생깁니다. 야고보서 1:26말씀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입조심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모든 신앙생활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입조심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모든 신앙생활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이 입술은 분명 내 것인데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도무지 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내 입술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은 다짐하기를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시편 39:1)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스스로 낮아진다고 해서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높아짐의 방법입니다. 고차원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낮아지셔서 망했습니까? 빌립보서 2:9~11에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낮아지면 부딪힐 일이 없습니다.
낮아지면 언제나 어디서나 평안합니다.
낮아지면 존경을 받습니다.

전에 미국 존슨 대통령이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갈 때에 전용 비행기를 마지막으로 타고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기차를 타고 간다면 비서를 시켜서 표를 사올 수도 있을 텐데 자신이 직접 나가서 긴 줄을 서서 기다리며 표를 사는 모습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어제까지 미국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고향에 가는데 기차표를 사려고 줄 서서 기다리느냐 말입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낮아짐이 더욱 귀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낮아진 자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5:5에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낮아진 삶으로 이 세상에 빛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낮아진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바랍니다.
낮아진 삶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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