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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으신 그리스도의 공로로 얻게 된 복 (갈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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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제목 :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으신 그리스도의 공로로 얻게 된 복
+ 설교본문 : 갈라디아서 3장 13-14

동남아시아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한 선교사님의 고귀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분이 선교하던 지역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이름 모를 전염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에 세균을 넣고 미국의 존스 홉킨스 대학에 가서 면역체를 개발하도록 자신의 피를 제공했습니다. 선교사님 덕분에 병원에서는 그 전염병을 이길 수 있는 항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은 항체를 만들기 전에 몸에서 고열이 나고 심한 통증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그 병원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선교사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선교지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선교사님의 희생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사람들은 죄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어떤 사람도 사망을 이길 수 없습니다. 여기서 사망은 단지 죽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며,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하여 파생된 모든 문제들이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인간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벧전 3:18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죄 없으신 주님은 십자가를 거절할 충분한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묵묵히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를 통한 주님의 공로를 믿고 주님의 품 안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의와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독신 목사님이 살고 있던 큰 농장에서 어느 날 큰 어미닭 한 마리가 죽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족제비한테 목이 물렸는지 피를 다 쏟고 죽어 있더랍니다. 농장 주인이 그 암탉을 툭 치니까 죽은 채 쓰러지는데 신기한 것은 그 품에 있던 병아리 여러 마리가 삐약삐약 하고 살아서 뛰어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아마 그 어미닭은 도망가면 얼마든지 살 수가 있었지만 자기 새끼들을 살리기 위해 그대로 앉아서 피 흘리고 죽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많은 무리들이 “네가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할 수 없느냐” 하고 조롱했는데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뛰어내려 살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고통을 참고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가 기본입니다. 내 공로, 나의 행위, 나의 선행, 나의 노력이 아닌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주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과 하나 되면 나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 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과 연합하면 신비한 변화가 일어나 과거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물질세계에서도 보면 전혀 다른 두 물질이 결합하여 완전히 다른 새로운 물질로 탈바꿈합니다. 예를 들어 소금을 생각해봅시다. 소금은 두 가 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소듐이고 다른 하나는 클오라이드라고 하는 염소 나트륨이 합해서 소금이 된 것입니다. 나트륨과 염소는 따로 두면 독극물입니다. 먹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합해 놓으면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독이 전혀 없어지고 오히려 맛을 주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신기하죠. 그것만 아닙니다. 물도 그렇습니다. 물이 무엇입니까? H2O, 수소와 산소입니다. 수소는 H2, 산소는 O입니다. 이 두 가지는 원래 태우는 불을 붙이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합하면 오히려 불을 끄는 역할을 하는 물이 됩니다. 생명을 줍니다. 불은 생명을 없애 버리는데 물은 생명을 주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의 공로를 받아드리면 우리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변화, 엄청난 변화, 복된 변화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믿는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받았습니다(1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라는 말은 본래 노예로 있는 사람의 몸값을 대신 지불해주고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율법의 저주는 영적인 죽음과 육체의 질병 그리고 환경적인 어려움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인 죽음과 육체의 질병 그리고 환경적인 모든 저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성경은 신약은 실제요 구약은 그림자로 보아야합니다(골 2:7; 히 8:5, 9:24, 10:1).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 보여주는 실제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역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구약 성경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눅 24:25, 26을 보면 이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십자가)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구약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저는 구약의 대표적인 그림자 두 가지를 가지고 실제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조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살펴보고자 하는 구약의 그림자는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에 10가지 재앙이 내렸습니다. 그 가운데 10번째 재앙은 장자의 죽음의 저주입니다. 죽음의 천사가 애굽 전역을 칠 때에 왕의 집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가정의 장자들이 죽음을 당하는 저주가 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자의 죽음의 저주에서 보호 받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린양을 잡고 그 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르면 죽음의 천사가 내리는 저주로부터 그 집은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어린양을 잡아 피는 바르고 고기는 먹었습니다. 그 결과 애굽 사람들의 집에는 장자의 죽음의 저주가 임하여 온 나라의 장자들이 죽음을 당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자의 죽음의 저주로부터 보호를 받았습니다. 고전 5:7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유월절 양’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고전 5:7의 말씀으로 그림자가 아닌 실제를 보게 됩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자의 죽음의 저주로부터 보호를 받은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우리들도 율법의 모든 저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살펴보고자 하는 구약의 그림자는 장대에 달린 놋뱀입니다. 민 21장에 보면 광야를 횡단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 결과 불뱀들이 백성 중에 나타나서 백성을 물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원망하고 불평하는 일을 가볍게 생각하는데 원망과 불평은 뱀 즉 사단에게 물리게 되는 치명적인 죄입니다. 불뱀에 물린 백성들 중에 죽은 자들이 나오고 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사단에게 물린 자들은 크게는 영적인 사망에 이르게 되고 작게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백성들이 모세를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모세는 하나님께 백성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은 살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놋으로 불뱀을 만들고 장대 위에 달게 됩니다. 그리고 뱀에게 물린 자들이 놋뱀을 쳐다보니 살게 되었습니다.

고전 3:14,15절을 보면 장대에 달린 놋뱀이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해서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뱀의 독의 저주로부터 보호를 받아 살게 된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은 예수 안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예수 믿고 해방되었습니다. 율법의 모든 저주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망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사단으로부터 자유합니다. 사단이 가져다주는 모든 저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단의 속임수에 속아서 율법의 저주 아래 놓여있을 때처럼 살아갑니다.

1983년 영국 이스트본에서 열세 살 소년이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토머스 크레이븐입니다. 소년은 모범생이었으며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소년이 왜 자살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 가정은 악마의 저주를 받아 가족들이 일찍 죽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죽음이 두렵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어머니 곁에서 죽는 편이 낫다” 소년을 죽인 범인은 ‘악의에 찬 헛소문’이었습니다. 이 소년은 소년의 가정에 적개심을 가진 한 노인이 퍼뜨린 유언비어를 믿었습니다. 사실 이 소문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었습니다만 소년은 그 소문을 믿었고 그의 잘못된 믿음이 자신을 그 저주 아래 놓이게 한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십자가의 진리에 대한 이해 부족과 믿음부족으로 우리가 여전히 저주 아래 있다고 속이는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성경은 진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더 이상 저주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미래도 예수님이 책임지시고 예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안전할 것입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 사람이 쏟아 부은 저주, 마귀가 가져다주는 저주, 율법에 기록된 모든 저주로부터 완전히 풀려났습니다. 믿으시고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믿는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습니다.(14)

어떤 어린아이가 남의 집 지하방에서 굉장히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하루 세끼니 먹는 것이 다행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가진 장난감도 가질 수 없었고, 게임기나 컴퓨터는 꿈도 꿀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방도 생겼습니다. 텔레비전, 냉장고, 책상도 새것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아이가 너무나 좋아서 친구들 오라고 해서 같이 놀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그렇게 기뻐하는데 엄마는 늘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아이는 왜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엄마가 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조금 철이 든 다음에 엄마가 우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빠가 지방에 있는 공사장에서 일을 했는데 어느 날 공사현장에서 대형사고가 터져서 아빠가 죽고만 것입니다. 아이가 사는 환경이 좋아진 이유는 아빠의 죽음에 대한 보상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참 슬픈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만 그 아이의 이야기처럼 슬프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와 저주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아빠의 죽음을 통해서 아이의 환경이 변한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들이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대단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받은 복은 엄청납니다. 짧은 시간에 그가 받은 복을 다 언급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오늘은 몇 가지로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의롭다함을 받은 복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복이 의롭다함을 받은 복입니다. 그의 행위가 옳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칭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고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하셨습니다(창 15:6).
우리도 동일한 의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롬 5:1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받은 의 때문입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것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받은 의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시간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입니다.

둘째, 건강의 복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낳을 만큼 건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또 다른 자식들을 낳을 정도로 건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건강의 복을 받았음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건강의 복도 믿는 만큼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신 이유는 우리를 모든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벧전 2;24에 보면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신 이유는 우리를 대신해서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신 것이고 그 사실을 믿는 우리에게는 건강의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마 8:17). 내 어께에 있는 무거운 짐을 누군가가 대신 짊어져준다면 나는 그 짐으로부터 자유한 것처럼 주님이 우리 대신 채찍에 맞으셔서 고통당하셨으므로 우리는 질병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 모든 죄를 사하시고 내 모든 병을 고치신’ 주님을 송축했던 것입니다.

셋째, 자손의 복입니다. 사람의 일은 모르는 것입니다.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다고 하시더니 아브라함의 자손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그는 80이 넘도록 자식이 없던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83세에 이스마엘을 낳게 되었고, 100세에 이삭을 낳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자식들이 큰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후손 가운데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그분을 통해서 인류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확실하게 자손의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자손의 복도 받았음을 믿으십시오. 지금 자손들을 보면 속상하시는 분들 많을 겁니다. 내 마음처럼 신앙생활도 하지 않고, 내 마음에 꽉 차도록 축복을 받지도 못한 것 같고 인간적으로 보면 ‘저 자식들이 하나님의 복을 어떻게 받을까’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고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사십시오. 십계명에서는 천대까지 복을 받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시 37:5에 보면 시인은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 하였도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넷째, 물질적인 복입니다. 아브라함은 빈손으로 시작했는데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아서 물질도 풍부했습니다. 양떼가 너무 많아서 자기 조카 롯과 한 동네에서 풀을 먹일 수 없을 만큼 부유했고 집에서 훈련시킨 군사가 318명이나 될 정도로 부유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물질적인 복을 주신 것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는 나라마다 번영의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고후 8:9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믿는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았습니다(14).

지금은 오정현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사랑의 교회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하겠습니다. 이 예화를 통해서 한국교회에 여러 가지 모범을 보여주는 사랑의 교회의 모범이 가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랑의 교회를 설립하신 옥한흠 목사님은 지난 30년간 평신도를 깨우는 제자훈련으로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영적지도자 중에 한 분입니다. 그런데 옥목사님에게는 제자훈련을 오랫동안 해오는 가운데에서 풀 수 없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의 사역자들이 자주 영적으로 갈증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환자만 늘어간다는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교회는 성장했는데 교회에 비해서 너무 무력하다는 탄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교회 바로 앞의 유흥가는 갈수록 번창하고, 사랑의 교회가 있음으로 해서 주변의 유흥가가 달라졌다고 하는 표시가 10년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옥목사님은 고민을 오랫동안 하시다가 성령운동으로 세계최대의 교회를 일군 조용기 목사님께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조 목사님! 저는 우리 평신도 사역자들이 가끔 영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면 그들의 가슴속에 은혜의 불길, 성령의 불길을 다시 지피기 위해서 마치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후후' 불어대는 농부와 같습니다. 그들이 불이 꺼지지 않도록 몸부림을 치는데, 조목사님께서는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으십니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때 조목사님은 “아, 옥목사님! 그렇습니까? 나는 정반대입니다. 우리 순복음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은 어떻게나 뜨거운지, 내가 할 일은 날마다 물통에 물을 잔뜩 담아 가지고 가서 끼얹는 것입니다. 너무 뜨거워지지 말라고요” 옥목사님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오히려 속으로 깊이 깨닫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적으로 여러 이야기를 나눈 후, 헤어지기 전에 조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목사님께서 한사코 옥목사님의 머리에 손을 얹지 않겠다고 하셔서, 서로 사무실 바닥에 무릎을 끓고 앉아 손을 잡고 기도하고 조목사님의 사무실을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옥목사님은 생각을 바꾸시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기도응답은 성령이다”라고 하며 “하나님을 귀찮게 해서라도 성령을 사모하라, 너무 점잖은 10억 명의 크리스챤들이 있다. 그 안에 한국의 장로교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성령이 이미 오셨다고 해서 성령을 구하지 않는데 집요하게 구하라. 그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 주신다”고 하면서 교회 성도들에게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기력한 신앙생활인지는 알아야 합니다. 마치 건전지 없는 시계처럼, 기름 떨어진 자동차처럼 모양은 그럴싸한데 영적으로 무기력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 서울에 처음으로 수도가 설치되었을 때,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그마한 수도꼭지 하나만 틀면 물이 끝도 없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철물점에 가서 수도꼭지 하나를 사온 다음, 집 벽에 붙여놓고 꼭지를 돌렸지만 단 한 방울의 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철물점에 가서 불량품 수도꼭지를 팔았다고 따졌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와 물이 나오지 않는 수도꼭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합니다. 그 능력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삼손 생각이 났습니다. 삼손이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자다가 머리가 잘립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신, 성령이 떠나십니다. 성령이 떠나시니 삼손은 갑자기 무능해집니다. 그리고 그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성령이 떠나기 전 삼손과 성령이 떠나신 후의 삼손은 똑같은 사람 같았으나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없는 교인과 성령을 모신 신자는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존재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성령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약속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게시며 우리 속에 거하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성령님을 인정하는 만큼 성령님도 역사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악함을 인정하고 회개하면 성령님은 우리를 가까이 하십니다.
찰스 스윈돌이라는 미국의 목사님은 점잖고 멋있고 말씀이 귀하여 온 교인들의 사랑을 받는데, 하루는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보다 법과 규례를 더 잘 지켜야 되고 특별히 교통 법규를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그날 예배 후 목사님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떤 깊은 생각을 하다가 빨간 신호등을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 양옆을 보니 교인들이 좍 깔려 있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우들이 만나기를 원합니다.”

다음 날 어느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목사님은 교통 법규를 잘 지키자고 설교를 해 놓고 바로 뒤에 자신이 법규를 어겼으니 무슨 말로 답변해야 할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났습니다. 목사님은 팻말을 목에 걸고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목사님을 기다리던 교우들은 목사님이 들어서는 순간 박수를 치며 막 웃었습니다. 목사님의 목에 걸린 팻말에 '나는 죄인이오.'라는 글이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우들이 그것을 보며 막 웃고 있는데 목사님이 뒤돌아섰습니다. 등에도 팻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있으면 돌로 치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교우들이 또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목사님이 죄인임을 인정하니 모든 교우들이 용서하고 웃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원하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여 성령께서 거하시기에 합당한 성령의 전이 되십시오.

오늘은 주님의 십자가의 값으로 얻게 된 세 가지 축복을 생각해봤습니다. 첫째는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었습니다. 둘째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습니다. 셋째는 성령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 세 가지 축복을 믿음으로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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