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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과 소금된 성도의 사명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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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된 성도의 사명 (마 5:13~16)

오늘 설교는 퀴즈 문제로 시작을 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붙여주신 이름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 이름이 혹시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붙여주신 이름. 우린 성경에서 성도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라는 이름 외에 또 다른 이름도 붙여주고 계십니다. 힌트를 드린다면 오늘 성경에 나옵니다. 우리에게 붙여주신 이름. 뭡니까? 소금과 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 빛과 소금이 우리에게 붙여주신 이름입니다. 여러분 내가 소금이라니, 실감이 좀 나십니다. 내가 빛이라니.
한번 따라해 보겠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놀랍지 않습니까? 내가 빛이 될 수 있을까? 여러분! 빛이라면 어떤 겁니까? 어두움을 몰아내는 것이 빛인데, 내가 가는 곳에 어둠이 물러나고 광명이 오고, 행복이 오고, 영광이 오는, 내가 그런 빛인가? 의문스럽습니다.

내가 소금이다. 소금이야 물속에 들어가면 안 보이니까 그건 좀 그런 것 같은데, 왠지 빛이라고 그러니까 이게 잘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대한 이름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다. 그런데 이름에는 엄청난 책임이 따라옵니다. 성경 한번 읽어보시죠.
13절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하셨는데,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어떡합니까? 비참해집니다. 밖에 버려져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는 가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소금은 아주 예전, 지금보다 백 년 전만 해도 소금처럼 귀한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소금이 그렇게 비싸지 않고 흔하니까, 중요하지만 흔하니까 가치 있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백 년 전만 해도 소금은 참 귀한 것이었습니다. 소금은 생명과 직결되는 겁입니다. 그런데 맛을 잃은 소금이 있다면 그 소금은 밖에 버려지게 되고,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는 가치 없는 것이 되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예전 고구려 시대, 고조선 시대에는 소금바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소금이라는 것은 바다에서만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느 산에 가면 그 산 전체가 소금덩어리였어요. 그것을 파다가 소금으로 정제해서 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져오는 도중에 비가 오면 그 소금이 다 녹아버리고 나중에 돌무더기만 남기 때문에 그것은 가치 없는 것이 되 버립니다. 언젠가 한번 인터넷을 봤더니 티베트 어느 지역에 깊이 들어가면 아주 신기한 우물이 있는데 그 우물은 소금 우물이랍니다. 그 우물의 물이 소금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우물에서 물을 길러서 햍볕을 쐬이면 그것이 붉은 소금이 된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주 오래전에 지각변동이 있을 때, 바다하고 산하고 뒤바뀌면서 바다가 결국 지반 밑에 들어와 버린 겁니다. 그 물이 남아 있다가 소금물이 우물이 되어서 끌어올려 진거예요. 참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 맛을 잃은 소금은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물어봅시다. 혹시 우리가 맛 잃은 소금은 아닌가? 혹시 우리가 꺼진 등불은 아닌가? 역시 등불은 불이 켜져 있을 때 빛을 발하지, 기름이 다 소모되어서 이제 불이 서서히 꺼져 간다면 그건 아무 가치도 없는 겁니다. 오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소금의 역할,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데, 우리가 정말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옆에 분들에게 물어보세요. “혹시 맛 잃은 소금은 아니십니까?”
혹시 내가 정말 맛을 내는 소금인가? 아니면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아닌가? 혹시 내는 빛을 내는 등잔인가? 아니면 꺼진 등잔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소금은 우리 생활에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주부들은 소금의 필요성에 대해서 부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겁니다. 여러분 단맛은 설탕이 없으면, 당분으로 대체하고 코코넛으로 대체를 하기도 합니다. 감초로도 대체가 됩니다. 그런데 소금은 대체가 안됩니다. 여러분 소금을 대신할 것 있습니까? 소금이 없으면 음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참 중요합니다. 소금은 그래서 가치가 있습니다. 소금의 역할,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소금은 첫째, 음식에 들어가서 뭐를 냅니까? 맛을 냅니다. 소금이 없으면 맛을 못 냅니다. 소금을 넣으면 짠 맛이 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소금이라는 건 들어가서 자기는 없어지고 그 음식의 맛을 균형 있게 합니다. 예를 들면, 설렁탕을 먹을 때 소금을 넣지 않고 설렁탕 드셔보셨습니까? 이게 맛이 밋밋한 게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소금을 반 숟갈 넣을 때 소금 맛이 아니라 설렁탕 진가를 맛보게 됩니다. 참 중요합니다. 소금은 맛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세상에서 맛을 내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가는 곳마다 맛이 나야 합니다. 재미있고, 즐겁고, 행복하게 되야 합니다. 그게 바로 맛을 내는 역할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면 우중충한 직장이 밝아지고 즐거워지고 재밌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있는 가정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바로 맛을 내는 소금의 역할입니다.

소금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방부제의 역할을 합니다. 썩지 않게 합니다. 동해바다에서 생선이나 고등어를 잡아가지고 어떻게 합니까? 끌고 오다 보면 죽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플라스틱 통에 넣고 흰 소금을 뿌려가지고 고기를 착착 얹어서 팝니다. 그럼 그것을 가지고 와서 저녁에 집에 와서 찌개를 해 먹습니다. 상하지 않습니다. 한여름에도 상하지 않습니다. 소금을 넣으면. 소금은 방부제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죄의 오염을 막고, 죄를 거부하는 방부제의 역할을 감당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가면 직장의 불의와 부정이 있다가도 사라져야 합니다.

이전에는 그런 자리에 있었답니다. 그 자리는 집이 한 채씩 생기는 자리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어떤 크리스찬이 들어가서 그것을 거부하고 참으로 정직하게 행할 때 주위 사람들이 불안해지는 거였습니다. 그들은 일 년에 집을 한 채씩 만들고 있는데 이 사람은 정직해서 부정을 하지 않으니까 불안해지는 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역사를 막고 죄의 번식을 막는 역할, 그것이 바로 소금의 역할, 성도의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 여러분! 그런가하면 빛의 역할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빛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뭡니까? 어둠을 밝히는 겁니다. 이 방이 불을 켜지 전에는 깜깜했지만 누군가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어둠은 다 사라져버리고 밝은 광명으로 바꿔지는 겁니다. 빛은 밝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크리스찬은 바로 세상을 밝히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역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빛은 또한 인도자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가 한밤중에 길을 잃었을 때, 등대의 빛을 보고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겁니다. 방향을 분간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빛의 역할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의 길로, 참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바로 교회는 이 민족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인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어둠을 밝히는 것입니다.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리고 길을 인도하는 인도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고 계실까요?

한 세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도덕적인 삶의 수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요즘 티비를 바꾸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방을 가보면 아주 넓은 화면의 TV를 많이 봅니다. 대게 보면 디지털TV입니다. 예전의 TV는 아날로그TV였는데, 요즘은 디지털TV라고 해서 대게 화면이 넓고 아주 선명한 것이 특징입니다. 왜 이렇게 TV가 밝으냐? 예전에 TV에 대해서 물어보니까 이유가 간단합니다. 거기에는 아주 예리한 주사선이 있는데, 그 주사선이 전보다 훨씬 많아서, 그것이 아주 깨끗하고 선명하게 밝게 화면을 보증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지털TV는 멀리서 보던, 가까이서 보던 화면의 떨림이 없고 아주 선명하고 원색 그대로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랍니다. 어찌 보면 크리스찬의 삶은 고화질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고품격의 삶, 그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이 땅에서 빛 된 크리스찬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밝히는 삶, 그리고 세상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불신자와는 뭔가 달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불신자보다는 적어도 도덕지수가 높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이런 저런 죄악에 물들어간다면, 적어도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고 끊을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다? 미국의 한 교회에서 크리스찬 100명을 모아놓고 설문조사를 했답니다. 여러분들! 여러분들 혹시 가정에서 포르노라고 하는 음란한 영화를 보신 일이 있습니까? 그것을 혹시 종종 보십니까? 라고 설문을 했더니 100명 중에 30명이 정직하게 대답을 했는데 예! 저는 종종 그 포르노 영화를 볼 때가 있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더랍니다. 그다음에 불신자 100명을 모아놓고 또 질문을 했습니다. 정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혹시 가끔 포르노 영화를 보시는 분 있습니까? 그랬더니 불신자 가운데 40명이 종종 볼 때가 있다고 대답하더랍니다. 자!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기는 있지만 아주 미묘한 차이입니다. 아니 그건 차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불신자나 신자나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수준은 불신자보다는 높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는 그들에게 삶의 모델이 될 수가 없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차이가 나질 않아요.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수준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종종 기독교와 관련된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TV나 신문에서 크게 그것을 보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느끼기에는 불교 같은데서 뭐 좀 문제가 생기면 별로 보도도 안 하는데 왜 교회나 무슨 목회자에 관해서는 크게 보도를 할까? 하고 불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꿔 생각하면 그것이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불신자들, 세상사람들은 불교에 대해서 별로 기대하지 않습니다. 불교가 세상을 변화시킨다거나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뭔가 기독교인들은 뭔가 이 세상의 소망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비록 타락한 삶을 살지라도 기독교만은 좀 뭔가 우리의 소망을 줘야 되지 않느냐?’ ‘당신들은 뭔가 희망을 제시해야 되지 않느냐?’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기대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할 때 그들은 우리에게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도덕적인 삶의 수준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에베소 5장 8절에 보니까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빛의 자녀들은 의로운 삶을 살아야 됩니다. 진실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 정직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주 쓰는 속담 중에 ‘저 사람은 소금 같은 사람이다.’ 그런 말이 있답니다. 소금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소금처럼 변질되지 않는 사람, 언제 보아도 진실된 사람, 충성스러운 사람, 인격이 훌륭한 사람, 이 사람을 소금 같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들이 소금 같은 사람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소금이라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빛이 빛을 비추지 못한다면, 소금이 부패를 방지하지 못한다면, 밖에 버리워서 사람들에게 밟히는 가치없는 무익한 존재가 되버리고 말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본문은 뭘 요구할까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는 그런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할까요?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따라해 보세요.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자. 우리 성경 16절 말씀을 읽어보십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의 불신자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러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이, 우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을까요? 아니면 반대로 우리의 잘못된 행실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있지을까요? 우리는 심각하게 되물어 봐야 될 것입니다.

오늘 착한 행실의 삶이라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소극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선을 행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세상의 영향을 주고 세상 사람들에게 정말 그 착한 행실을 통해서 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소금이 국속에 들어가서 맛을 내려면, 소금의 형체가 남아있어야 됩니까? 없어져야 됩니까? 없어져야 됩니다. 소금이 녹을 때 맛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습을 고집하고 있다면 그 소금은 맛을 낼 수가 없습니다. 자기는 없어져야 됩니다. 그래야 국이 맛을 내는 겁니다.

여러분 빛이 빛을 내기 위해서는 그 기름이 소모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을 태우면서 빛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희생의 삶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진정으로 희생함으로서 세상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손해보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결코 소금과 빛 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어요.

여러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는 헌금으로 교회를 유지하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헌금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섬기지 않는 교회는 역사 속에서 쇠퇴하고 소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이 땅에 교회와 성도의 죄악된 이미지를 아십니까? 실추된 위상도 아실 겁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를 희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자기를 희생해야 됩니다. 때로는 손해 보면서 그들에게 빛 된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되요. 그럴 때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보다 더 욕심많은 사람, 더 이기적인 사람들, 자기 욕심만 챙기는 사람들, 존경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습니다. 교회가 교회 자체만을 위해 존재한다면 그건 이미 교회일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고통 받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갈 때 그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위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늘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교회가 아무리 어려워도 이웃집에, 교회옆집에 쌀 떨어진 사람이 있다면, 교회는 그들을 당연히 구제해야 되는 겁니다. 그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땅에 외국인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성도님들이 저 외국인교회, 중국동포교회에 가서 봉사하고, 음식을 대접하고, 말씀을 전하고, 찬양으로 영광을 돌릴 때 그들도 큰 기쁨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겁니다. 우리 주위의 소외된 사람들, 우린 그들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요즘 한국교회에 굉장한 희망을 봅니다. 태안기름유출사고 이후에 기독교가 적극적으로 여기에 대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한국교회봉사단이라고 진보와 보수를 다 어우르는 큰 봉사단체가 새로 출발을 했습니다. 앞으로 300만 명의 크리스찬이 태안에 가서 봉사할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젊은 중진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한국희망연대라는 조직이 결성해서 적어도 만 명의 성도들이 태안에 가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것이 바로 교회가 이 한국사회의 희망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태안에 가서 봉사하신 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물론 여러 단체에서, 회사에서, 학교에서 왔지만, 그들 중의 절반은 교회단체에서 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오늘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이제는 세상을 섬기는 일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희망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새해에는 정말 지역을 섬기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로 우뚝 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과 담을 쌓은 교회, 그건 이미 교회일 수 없습니다. 교회의 관심은 세상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 땅에 이루어질까요? 우리들이 세상에 나가서 소금과 빛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사명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가서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가서 세상을 제자삼아야 합니다. 만약 세상을 제자삼지 않는다면 세상이 교회를 제자삼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달라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선데이 크리스찬이 되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제 먼데이 크리스찬도 되시기 바랍니다. 옆에 분들과 인사합니다. “먼데이 크리스찬도 됩시다.”

우리는 교인의 역할을 주일 하루에 만족합니다. 주일날 성경 찬송 들고 와서 예배드리고, 성가대하고 안내하고, “아! 주일 오늘 훌륭한 신자의 역할을 했지”, 하지만 월요일부터는 전혀 아닙니다.

여러분 월요일도 신자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화요일도 신자처럼 사셔야 합니다. 주일만 신자가 되어선 안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데이처치가 되어선 안 됩니다. 월화수목금토, 교회는 계속 문을 열어야 되는 겁니다. 이 땅에는 교회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세상은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의 모델은 바로 예수님의 삶이라고 에밀 부루너라는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가신 삶의 모습, 그것이 바로 오늘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모델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나? 예수님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어떻게 찾아가셨나? 그들에게 어떻게 그들을 섬기시고 그들을 안으시고 품으셨던가? 우리는 그것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빛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 빛이 임하는 곳마다 어둠이 물러가고 죽음의 권세가 물러가고 사단의 권세가 물러가고 천국이 선포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보면 예수님이 빛의 원체십니다. 그 빛을 우리가 반사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삶이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빛입니다. 오늘 세상은 어두움에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 서울 거리를 나가보십시오. 네온사인이 어느 도시보다 휘황찬란하고 밝지만, 거기엔 반대로 영적인 어두움에 쌓여 있습니다. 영적 어두움, 죄악의 어두움, 음란의 어두움, 사치의 어두움이 있습니다. 절망의 어두움이 있습니다. 그 어두움 가운데 우리는 빛을 전해야 됩니다. 밝은 빛을 비춰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불러야 할 찬송은 “빛의 사자들이여 어서 가서 복음의 빛을 전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의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복음은 빛입니다. 말씀은 빛입니다.

예수 전도단 설립자이고 제가 다녀왔던 열방대학 총장이신 로렌 커닝햄이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연세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건강하십니다. 이분이 최근에 쓴 책의 제목이 ‘열방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입니다. 이분이 1991년 8월 피케옷이라는 아주 작은 섬을 방문한 내용을 그 책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료선교사들과 함께 그 섬을 방문했을 때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200년 전에 그 섬은 암흑의 천지였기 때문입니다. 1789년 무려 200년 전 바다를 지나가던 영국군함에서 반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배의 군인들 9명이 반란을 일으켜서 자기의 상관들을 죽이고 그 배를 탈취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옆에 있는 섬들에 정착해서 사람들을 납치해서 배에 싣고는 한 섬으로 들어갔는데 그 섬 이름이 바로 피케옷이라는 섬입니다. 그 섬은 지도에도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섬은 매우 멀었습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도 사흘간 망망대해를 항해해야만 찾을 수 있는 섬이 바로 피케옷이라는 섬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섬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찾으려는 사람들로부터 숨기위해서 배를 불태워 바다에 수장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매우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산에 식물을 채취하러 갔다가 한 나무뿌리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티라고 하는 식물뿌리였습니다. 그것을 잘 요리하니까 거기서 알콜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술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술이 만들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술을 즐겨먹게 되고, 술 취하게 되고,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박판을 벌입니다. 서로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그 섬은 지옥과 같은 섬이 되어버렸습니다. 서로 죽이고 칼부림이 일어났습니다.
몇 번의 칼부림 속에 많은 사람이 죽고 존 에담스란 사람과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이 생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타고 왔던 배에서 꺼낸 화물상자를 발견했는데, 그 안에 성경이 들어있었습니다. 너무 놀라웠습니다. 존 에담스는 성경을 홀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아! 여기에 진리가 있었구나!’ 그는 성경을 혼자만 읽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성경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아가면서 그 섬에 평화가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곳은 어느새 지상낙원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섬에 두 명의 장교가 우연히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섬을 보고 기독교의 황금기와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섬은 진작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반란이 일어난 200년 후에 로렌 커닝햄은 그 섬을 방문해서 말씀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 복음의 빛이 바로 그 섬의 어둠을 몰아내고 광명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 성경을 너무나 존귀하게 어겨서 앞에 유리가 있는 나무상자를 만들어서 그 성경을 잘 보관해 놓았습니다. “이 성경이 바로 우리를 구원해 내었습니다. 이성경이 바로 이 땅에 평화를 찾아오게 했습니다.”

오늘도 그 섬에서는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의 빛입니다. 우리는 나아가서 말씀을 전해야 될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에 우리에게 이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아프리카 어느 아주 작은 미개한 마을에 한 무명의 선교사님이 찾아갔답니다. 그는 일생동안 그들을 섬겼습니다. 미개한 그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사랑으로 섬기고 의약품을 제공해 주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일생동안 선교사님은 그 마을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태어났습니다. 그 선교사님이 노쇠해서 이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고마운 마음에 선교사님의 장례식을 잘 치러드렸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만들어드리고 마을 입구에 비석을 하나 세웠습니다. 선교사님을 기념하는 비석. 그 비석에 이런 글이 씌여져 있답니다. 선교사님 당신이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는 어두움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우리를 떠나간 지금 우리는 지금 빛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당신이 떠나간 지금 우리는 빛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 빛과 소금의 삶을 살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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