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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고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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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고전 2:1~5)

아덴에서의 바울의 설교는 철학적 설교였다.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다 동원한 설교였다.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로서는 지금까지 배운 학문과 인간의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하였다. 아레오바고 언던에 서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써 있는 그 신을 소개하겠다고 말하는 바울은 그 알지 못하는 신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설교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다고 외쳤다. 그는 철학의 도시에서 전도할 때 지혜의 설교를 하였다. 온맘으로 정성들인 지성적 설교를 하였다. 그러나 그 열매는 많지 않았다. 몇 사람만이 그를 친하여 믿었다. (행17:34) 그리고 그는 낙담하고 실망하여 고린도로 갔다. 고린도에 갔을 때 복음을 전하는 그의 결심은 아주 달라져 있었다. 그 결심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의 본문이다.

첫째, 내 능력으로 증거하지 않겠다. (고전2:1)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여기서 기록된 이 표현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주님 안에서 무용하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바로 사람을 변화시키고 전도할 때 그 전도 방법으로 자기 재능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사실 바울은 일종의 유혹을 받은 것이다. ‘너희들이 철학자냐? 나도 철학자다. 너희들이 지혜자냐? 나도 지혜자다. 너희들이 공부했느냐? 나도 공부한 사람이다.’ 지난 날 세상 지식은 다 버린 것인데 헬라 사람들 속을 다니면서 바울은 버린 도구를 다시 찾아서 지식의 격을 갖추어 설득하려고 하였다. 진정한 의사 소통과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논리와 철학, 수사법을 사용하였다. 허나 실패와 낙담으로 돌아온 결과 앞에서 철저히 다짐하였다.

“전도하는 일을 위해선 내 말을 의지하지 않겠노라.”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의 외침은 나의 실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용하는 내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오히려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하였다.

그렇다. 전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안된다.

둘째, 오직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만 알기로 하다. (고전2:2)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의 작심은 단순하다. 단 한분에게만 집중된다.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 그의 생애에 일어난 십자가 사건만 알기로 작정한다. 그것이 가장 고상하기에, 그것이 가장 으뜸가는 지식이기에, 그것이 가장 이 세상을 사는 능력이기에 바울은 하나만 쳐다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웨슬리는 한 책의 사람만 되기로 원했다. 이는 다른 책을 보지 않고 다른 책이 필요치 않다는 말이 아니다. 웨슬리는 서민들을 위한 의학 책도 집필할 만큼 다른 지식도 가진 자이지만 한 책의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에 집중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전도에 있어서 예수만 알고 그의 십자가만 알기로 하는 것은 집중력을 말한다. 대속의 은혜에만 집중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에만 집중한다는 선언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가치에 집중해야 한다. 특히 전도자는 복음에만 집중해야 한다. 집중할 때 전문가가 되고 집중할 때 프로가 된다. 예수를 준다는 것은 최고의 가치, 최고의 생명, 최고의 진리를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중해야 한다. 프로가 되지 못하면 진리는 싸구려가 아닌데 싸구려인줄로 알게 된다.

화이트 헤드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교회에 나왔다. 담임목사는 너무도 놀라서 철학책을 찾아 설교를 준비하였다. 세 번이나 참석한 화이트 헤드를 보며 목사님은 기뻐했다. ‘이제 내 실력에 감탄해서 똑똑하고 공부 많이 한 목사인줄 알고 교회에 등록하겠지?’라며 꿈을 꾸고 있었다. 그 다음 날 목사님 면회하기를 청한 이 철학자는 이렇게 말을 열었다.

“목사님, 나는 예수를 알기 원합니다. 길거리에서 만난 어느 할머니가 얼굴에 홍조를 띠고 ‘예수를 왜 모르십니까? 나는 죽으면 천국 가고 살면 주님의 일을 하며 사니 기쁘고 즐겁습니다.’라는 그 말에 내가 예수를 알려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내가 기쁨을 갖지 못했는데 그 할머니의 가슴에 기쁨을 만들어 주는 예수를 배우러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철학 얘기만 하면 어떡합니까? 내게 예수를 알려 주셔야죠.”

그렇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예수와 그의 십자가 복음에만 집중해야 한다. 내가 예수의 복음에 프로가 되어 있어도 하나님의 비밀을 증거하기 어려운데 철학, 경제, 스포츠, 문화 등을 아무리 잘 안다고 해도 아마추어일 뿐이다. 나와 여러분은 전도할 때 예수님만 알고 십자가만 전하자. 그래서 복음에 대해서 프로가 되고 복음 학교를 연다면 얼마든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되자.

셋째,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일하려 한다. (고전2:4)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고 전도하려 할 때 사용하는 방법은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일하려 한다. 성령의 나타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초자연적인 힘을 의지하고 일하는 자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착각을 하고 있다. 성령의 나타남을 통해 일하려 하지 않고 계속 말과 아름다운 지혜로만 전도하고 설교하려 한다. 그래서 겉옷에도 박사 표시를 앞세운다. 교회도 담임자를 청빙할 때 영적 권위를 성령 받았는지에 두지 않고 ‘영어를 할 줄 아는가? 학교를 어디까지 나왔는가?’에 두고 있다. 다 중요하다. 공부하고 박사가 되고 영어 잘 하는 사람이 중요하다. 하지만 본질이 외면되어서는 안된다. 정말 성령을 인정하고 성령을 의지하는 사람인지를 보라. 성령의 하시는 일을 환영하고 성령으로 일하려는지를 보라.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반영하는 성도가 되려하지 말고 성령의 나타남을 환영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전도의 방법이고 전도의 열매가 된다. 성령의 나타남이란 성령의 은사들을 말한다.

고전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나타남이란 바로 은사들이다. 고전12:8~11에 나타난 9가지 은사들이다. 성령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선물들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각 사람에게 나타나게 함으로서 복음을 전한 것이다. 이 은사가 바로 능력이다. 바울은 능력 전도를 한 것이다.

왜, 우리는 성령의 나타남을 외면하고 인간의 방법으로만 전하고 있는가?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말과 아름다운 지혜에 말을 참으로 잘한다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 참 교양이 넘친다 하고 찬사는 하지만 영이 살아나지 못한다. 변화는 없다. 설득을 당하고 ‘그래 맞는 말이다. 좋은 말이다.’라고 하지만 영이 소생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점집도 있다. 최면술로 사람을 퇴화시키는 비법도 있다. 교회를 찾지 않아도 더 놀랍고 신비로운 미혹의 세계가 있다. 마귀에게 눌린 그들의 인생을 건져 내려면 심리학으로 안된다. 철학으로도 안된다. 각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하라. 성령이 주시는 각양 은사와 함께 표적과 기적이 있을 때 사람은 변화된다. 권세 있는 가르침이 있을 때 변화된다. 왜 그런가? 듣는 자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에서 주어진다. 우리는 이제부터 복음 전하기 위해서 영적 은사를 갈망해야 한다. 영적 은사가 필요없다고 말하지 말라. 예언의 은사의 유익을 보자.

스티브 탐슨은 모닝스타교회의 부목사이며 모닝스타 해외 예언 사역 지도자이다. 그는「You may All prophesy」 “당신도 예언할 수 있다.”라는 책에서 한 가정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스티브 탐슨 박사가 기도해주는 부부 가정이 있는데 마태가 그 가정을 위해 예언의 말씀을 받았다. 그는 그 가정에게 말씀을 전했다. 마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이 가정에 대해 말하길, “부인, 당신에게는 세 자녀가 있는데 당신의 첫째 자녀인 아들은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당신의 아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거함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부인은 울기 시작했고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렸다. 처음에는 이 광경을 멍하닌 보고 있던 남편도 울기 시작했다. 왜, 울기 시작했을까? 사실 이 부부에게는 세 자녀가 있었다. 실제로 첫째 아이는 아들이었는데 일 년전 해변에서 수영하다가 익사하였다. 마음 아픈 것은 그가 죽기 몇 해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아들이 죽은 후에도 마음이 아픈 것은 그 아들이 하나님을 떠난 채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슬픔이었다. 그런데 마태가 전한 예언의 소식을 듣고 첫 아들이 하나님 품에 안겨 있음을 듣게 되고 위로와 치유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 예언의 은사다.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전해지는 복음 전도의 방법이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믿음을 주는 것이 아니다.

죤 윔버 목사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부흥회를 기점으로 서령의 나타나심을 장려하지도 않았는데 성령 체험을 하고 쓰러지거나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으로 인해 기도와 말씀 읽기, 이웃을 돌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더하여졌다. 1979년 5월에 시작된 부흥이 9월쯤 700명 정도의 새 결신자에게 세계를 주게 되었고 3개월 반만에 1,700명의 새 결신자가 생겼다. 이것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되는 전도인 것이다.

그렇다. 전도에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일하심이 필요하다. 이제부터 여러분과 나는 성령의 나타나심을 사모하자. 나의 방법을 내려놓고 오직 단순한 복음에만 집중하고 성령의 능력을 갈망하자. 지금까지의 내 방법, 내 지식을 묻어 버리고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자.

고전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였고 고전14: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하였다. 이 뜻은 시기하는 마음을 탐하라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성령의 나타남이 더 구체적으로, 더 분명하게 성도 각 사람에게 주어지도록 열정적으로 영적 은사를 환영하라는 것이다. 전도의 방법이 여기에 있다. 전도의 지름길과 노하우가 여기에 있다.

지금 갈망하라. 한 번 더 시기 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을 갈망하라. 당신이 달라지고 전도가 달라지고 사람이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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