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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로운 생활 (잠 15: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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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생활 (잠 15:1-4,18)

(잠15:1-4,18)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2)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4) 온량한 혀는 곧 생명 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1.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자라는 아들이 선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결혼을 성사시키고 싶어서 “여자를 만나거든 좋은 인상을 심어주어야 해. 좋은 인상을 심으려면 가장 먼저 사랑 이야기, 다음으로 가족 이야기, 그리고 철학 이야기로 마쳐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결혼 상대자를 만나러 갔습니다. 여자를 만난 아들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 말씀을 생각하며 물었습니다. “당신은 국수를 사랑하나요?”하고 물었습니다. 여자가 “내가 국수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라고 대답하자 “오빠가 있나요?”라며 가족 관계를 물었습니다. “오빠는 없어요.”라고 대답하자 다음은 철학 이야기임을 생각하고 “만일 당신에게 오빠가 있다면 국수를 얼마나 사랑하였을까요?”라고 철학적으로 물었습니다. 여자는 너무도 엉뚱한 질문에 실망하고 가버렸다고 합니다. 사람은 배운 지식으로 살지 말고 그때그때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야 함을 가르쳐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가장 지혜로운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말’이 지혜로워야만 합니다. 본문1절을 보겠습니다. “유순한 대답(A gentle answer)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지혜로운 말은, 첫째, “유순해야 합니다.” 어떤 분이 눈이 퍼렇게 멍이 들어서 목사에게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상담을 합니다. 남편이 그랬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 얘기가 나오다가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때리기 전에 어떤 말을 했지요?” “그래 잘났어. 그래도 사내라고. 당신이 해 준 게 뭐가 있어. 때려 봐! 때려! 아예 죽여!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그러니까 목사님이 그 여자 분에게 한마디 바른 말을 했습니다. “그래도 남편이 훌륭한 데가 있네요. 죽이라고 하는데 때리기만 했으니까...” 성경 말씀대로 됩니다.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매도 벌어서 맞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3,160년전 경 기드온 사사 시대입니다. 미디안 대군의 거듭되는 공격과 약탈, 그리고 압제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한 상태였습니다. 미디안의 만행을 물리치기 위해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사사로 세워 싸우도록 했습니다. 미디안 대군과의 전쟁에 32,000명이 지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단 300명만을 선발하도록 했습니다. 훗날 자신들의 힘으로 미디안 대군을 물리치고 승리했다고 교만해질까봐 취한 조치였습니다.(삿7:2)

과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단 300명 용사들만으로, 그것도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미디안 연합대군을 간단히 궤멸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300명 용사들이 일제히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자, 하나님께서 미디안 연합대군이 서로 칼로 쳐 죽이게 하셔서 자멸하게 만드셨습니다. 도망간 미디안의 두 장군 오렙과 스엡을 추격하여 오렙은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포도주 틀에 죽여서 그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개선했습니다. 개선해서 돌아오는 이 때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몹시 분노하여 “당신이 처음 미디안 사람과 싸우러 갈 때 어째서 우리를 부르지 않았습니까?” 하고 강하게 따졌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한 일이 당신들이 한 일에 비교나 되겠소? 에브라임의 제일 못한 포도가 아비에셀의 제일 좋은 포도보다 낫지 않소? 하나님이 미디안의 두 장군 오렙과 스엡을 당신들의 손에 넘겨주셨는데 내가 한 일이 당신들이 한 일에 어디 비교나 되겠소?”(삿8:1-3)

이같은 대답에 그제서야 그들의 화가 풀렸습니다. 사실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12지파 중 가장 불평불만이 많았습니다. 가나안 땅 정복 당시 다른 지파에 비해 크나큰 공적을 세웠었습니다. 그에 비해 분배받은 땅이 작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미디안과의 전쟁에 처음부터 자신들을 부르지 않은 것은 자신들을 전적으로 무시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미디안 대군과의 전쟁에 빠진 지파는 비단 에브라임 지파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지파에 비해 전쟁 말기에서나마 에브라임 지파는 참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대군이 도망갈 때, 그들의 퇴로를 차단시켜 미디안의 두 장군 오렙과 스엡을 에브라임 지파로 하여금 죽이도록 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에브라임 지파의 전과(戰果)를 높이 평가한다 해도 기드온과 그의 300명 용사에 비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드온은 “내가 한 일이 당신들이 한 일에 비교나 되겠소? 에브라임의 제일 못한 포도가 아비에셀의 제일 좋은 포도보다 낫지 않소? 하나님이 미디안의 두 장군 오렙과 스엡을 당신들의 손에 넘겨주셨는데 내가 한 일이 당신들이 한 일에 어디 비교나 되겠소?” 라고, 그야말로 유순하게 대답한 것은 기드온의 겸손한 신앙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와 같이 불평불만이 많은 자들이 계속해서 공동체 내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 공동체의 단결력을 약화시키고 나아가서는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자신의 명예나 영광을 염두에 두지 않고 불평불만으로 발생할지도 모르는 내부의 분열을 막기 위해 지혜롭게 대답한 것입니다. “에브라임의 제일 못한 포도가 아비에셀의 제일 좋은 포도보다 낫지 않소?”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운 전쟁 공로보다 전쟁 막바지에 참여한 에브라임 지파의 공로가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강한 불만에서 터져 나오는 과격한 분노를 기드온의 이같은 “유순한 대답”으로 잠재운 것입니다.

기드온의 “에브라임의 제일 못한 포도가 아비에셀의 제일 좋은 포도보다 낫지 않소?”는 말은 에브라임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분노는 대개 자신들의 존재 가치가 무시당하거나 평가 절하된다고 느낄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강경하게 시시비비를 따지고 공과를 따지는 등의 변론을 피해야 합니다. 자신이 아무리 정당하다 할지라도 교만한 대답은 상대방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할 뿐입니다. 기드온은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히 에브라임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고 손을 높이 들어줌으로 그들의 과격한 분노를 쉬게 하여 분열의 위기를 화평으로 이끌었습니다. 그 누구라도 나보다 나은 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남보다 못한 약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서로의 존재와 그 가치를 인정하고 “유순한 대답”으로 생활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지혜로운 생활을 위한 두 번째 말은 “온량한 혀”입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온량한 혀는 곧 생명 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온량한 혀”(The tongue that brings healing)는 “상대의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며 다시금 건강한 마음의 생기를 얻게 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패려한 혀”(a deceitful tongue crushes the spirit)는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그 몸과 마음, 영혼까지도 파멸시키는 말”을 뜻합니다.

고려대 박사과정 재학 중 2~3분 만에 자동으로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는 ‘원클릭 홈페이지 제작기법’을 개발한 ‘나와넷’ 대표 박봉래(35)씨는 세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양팔로 목발을 짚어야 하는 현실과 장애를 극복하고 장래가 유망한 벤처기업 사장이 된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그는 공공건물 출입구에 들어가면 휴대폰이 저절로 ‘진동’으로 바뀌는 기술로 정보통신부에서 주최한 ‘창업아이템 경진대회’ 대상을 안았습니다.

그는 소아마비 때문에 열네 살 때까지 학교에 못 가고 혼자 공상을 하며 놀았다고 합니다. 탄광 광부로 일했던 아버지로부터 한글을 배우다가 열네 살 때 겨우 초등학교 5학년에 편입했습니다. 교육방송 라디오를 들었다곤 하지만, 내내 집에만 있다 생전 처음 교실에 앉은 소년은 전 과목 꼴찌를 거듭했습니다.

어느 날 체육시간에 운동장을 지나던 교장선생님이 혼자 땅바닥에 낙서를 하는 박 봉래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그놈 참 똑똑하게 생겼다”고 했습니다. 이 말 한 마디가 소아마비 어린이 박봉래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날부터 성적이 쑥쑥 올라갔습니다. 산수와 과학에 재미를 붙여서 친구들과 함께 로켓도 만들고, 인과 황을 섞어 폭탄(?)도 만들었습니다. 그 날부터 과학 분야에 다재다능한 아이디어를 개발하게 되었고, 그 분야에 뛰어난 두각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2000.7.12일자조선일보) 이처럼 온량한 말 한마디는 생명나무인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거칠고 포악한 말은 한 인생을 망치게도 합니다.

캐빗 로버츠라는 분은 “지구상에서 매일 밤 배고픈 채로 잠드는 사람이 30억이다. 그러나 40억의 인구가 칭찬과 인정과 부드러운 말을 갈망하며 잠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자식이 밤에 밥 안 먹고 자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를 못 듣고 자는 아이가 더 많음을 걱정해야 합니다. 이런 외로움과 단절이 점차 쌓여 가면서 이것이 내재적 분노로 마음속에 쌓이는 것입니다. 이 쌓인 분노가 언젠가 동기가 주어지면 폭발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육학자 벤자민 블룸은 사람들의 환경을 크게 둘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물질 환경, 다른 하나는 언어 환경입니다. 그는 “물질 환경이란 그가 어떤 집에서 무얼 먹고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이고 언어 환경이란 그가 어떠한 말을 듣고 어떠한 말을 말하며 살아가느냐이다. 이 두 환경 중에서 훨씬 중요한 것은 언어 환경이다. 이것은 아이들의 지능에도 절대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물 좋고 공기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이 훌륭한 환경이 아닙니다. 제일 좋은 환경이란 언어 환경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언제든지 약한 자를 들어 강하게, 미련한 자를 들어 지혜롭게, 가난한 자를 부유한 자로, 천한 자를 존귀한 자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과 “온량한 혀”, 온유하고 선량한 말, 남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 용기를 북돋아 주고 소망을 불어넣어 주는 말 등으로 “생명 나무”가 되는 지혜로운 성도, 지혜로운 언어 환경의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율법에 이러한 여자는 돌로 치라 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고 하자 돌을 들고 여자를 죽이고자 모였던 무리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다 떠나고 여자와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여자를 보시고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여자가 아무도 없다고 하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1)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정죄하지 아니하는 말, 비판하지 아니하는 말, 용서하는 말이 “생명나무”가 되는 “온량한 말”입니다. “온량한 말”로 가정과 이웃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생명나무”,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지혜로운 생활을 위해 세 번째는 “노하기를 더디 해야 합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예수께서는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21-22을 보겠습니다.

(마5:21-22)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 말씀에서 보면, 살인죄와 형제에게 노하는 죄를 똑같이 취급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노하는 것을 마음의 살인으로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노한다.”(Angry)의 헬라어는 “오르게”(orgay)입니다. 화를 한 번 내면 쉽게 꺼지지 않고 꽁하게 마음에 담아둔 상태, 담아둘 뿐만 아니라 그 화를 키워가는 것을 뜻합니다. 분노나 미움이나 상한 감정을 마음에 두고 두고 잊지 않습니다. 나아가 그 감정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동생 아벨을 죽여 버리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은 가인처럼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말씀,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라가”(raca)는 “머리가 텅 비었다, 골이 비었다.”고 하는 비난, 욕설입니다. 매우 멸시하는 말입니다. 또 있습니다.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미련하다(moros, you fool!)”는 “라가”와 비슷합니다. “라가”가 정신적인 면에 대한 모독이라면, “미련하다”라는 말은 전 인격에 대한 모독입니다. “형제”는 자신의 혈육만이 아니라 넓게는 우리의 모든 이웃을 말합니다. 형제나 이웃을 향해 마음속에 분노나 미움을 쌓고, 분해하며 미워하는 감정을 지니고 살거나 내밷는 행위는 지극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형제와 이웃을 멸시하고 그 인격과 삶을 모독하는 악한 행위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미련한 행위입니다.

죠지 로나라는 사람은 몇 개 국어에 능통했으므로 무역회사의 통신원으로 취직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이력서를 보냈는데도 거절 회신만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회사에서 다음과 같은 회신을 보냈습니다. “당신은 우리 회사가 하는 일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단히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 같군요. 우리 회사는 통신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설령 필요하다고 해도 당신을 채용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당신은 스웨덴어에 능숙하지 못하며 당신이 보낸 편지는 오자 투성이었으니까요.” 이 편지를 읽고 조지 로나는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습니다. “뭐, 오자 투성이라구? 그러는 자기들 편지는 어떻고 이 무식한 놈들!! 이따위 편지를 보내다니!!” 그래서 조지 로나는 분풀이로 답장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내가 물론 스웨덴어를 공부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모국어만큼은 잘하지 못하겠지. 오자가 많았을 수도 있어. 만약 그렇다면 좀 더 공부해야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꺼야. 그러면 이 사람은 본의는 아니라도 내게 큰 호의를 베푼 셈이야. 단지 불쾌한 방법으로 자기 뜻을 밝혔을 뿐이지. 그러니 오히려 고맙다는 편지를 써야겠군!!” 그래서 조지 로나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통신원이 필요치 않음에도 수고스럽게 회답을 해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저의 실수를 사과드리는 바입니다. 제가 귀사에 편지를 보냈던 이유는 귀사가 그 분야에 주도적인 기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제 편지에 문법상의 오류가 있었던 데 대해 다시 한 번 사과드리며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스웨덴어를 공부해서 저의 실수를 고치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저를 발전의 길로 인도해 준 귀사에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조지 로나는 그 회사로부터 한번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조지 로나는 “노하기를 더디 하고” 오히려 “유순한 대답”으로 목적한 바를 성취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잠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19:11)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는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만일 분노의 답장을 보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약1:19-20)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항상 마음에 품으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는 생활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지혜로운 성도의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잠언15:28에, “의인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고 했습니다. 노하기 전에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가는 의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옛날에 어떤 무서운 왕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바로 감옥에 보내던지, 목을 치던지 하는 무서운 왕입니다. 그런데 그 왕에게 한 내시가 있었는데 그 내시가 그만 왕의 말을 잘못 전하여 궁중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왕이 크게 노했습니다. “그 내시를 사형에 쳐하라!” 왕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왕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내시가 자기 인생은 하나도 없고 왕을 위해서 일평생을 바쳤는데 무참하게 죽이자니 좀 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좀 자비심을 베풀기로 했습니다. 왕이 내시에게 말합니다. “너는 어차피 사형에 처한다. 그러나 그 죽는 방법만은 네가 스스로 택하라. 네가 교수형, 참수형, 화형을 당할 것이냐 아니면 독배를 마시겠느냐 아니면 네가 다른 방법을 선택하라. 아무런 방법이든 하나를 선택하면 그대로 해 주겠다. 여기 3분짜리 모래시계가 있는데 모래가 다 내려가면 결정해야 한다.” 그랬더니 이 내시가 얼굴을 막 찡그리면서 골똘히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더니 거의 모래시계가 다 끝날 때쯤에 웃는 겁니다. 그래서 왕이 묻자, “예, 결심했습니다. 왕이시여! 저는 늙어서 죽겠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깊이 생각하자 살 수 있는 지혜가 떠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살았습니다.

말에는 형제를 살리는 말이 있는가 하면 죽이는 말이 있고,(렘9:8) 이웃을 흥하게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망하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잠11:9)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불행하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잠15:2316:13) 상처를 치료하는 온량한 혀, 사람의 몸과 마음, 영혼의 상처와 병든 것, 그리고 인간관계의 상처를 치료하는 온량한 말이 있는가 하면(잠12:18,15:4) 병들게 하는 말도 있습니다.(롬3:13-14) 그리고 선한 말, 이웃을 즐겁게 하고 은혜를 끼치는 말 등이 있습니다.(잠12:25, 엡4:29) 또한 의로운 입술, 정직한 말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잠16:13)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사람의 입술에는 덕망이 있습니다.(잠22:11) 그러므로 말하기 전에 인간관계에 유익한 말인지, 함께 하는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말, 화목하게 하는 말인지, 창조적이고 건강한 말인지, 경우에 합당한 말(잠25:11), 때에 맞는 말인지(잠15:23), 서로의 관계에 좋은 약이 되는 말인지, 상처받은 마음과 관계를 치유하는 말인지를 깊이 생각하는 언어생활과 환경을 만들어가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참으로 좋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입술에 아름다운 열매가 풍성하시기 바랍니다. “(잠20:15)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언어생활로 더욱 귀한 보배같은 성도들이 되시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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