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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문난 교회 (살전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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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교회 (살전1:1-10)


신약성경에 소개되는 교회들을 분류하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1)칭찬 들었던 교회 - 예루살렘교회, 안디옥교회, 빌립보교회, 서머나교회, 빌라델비아교회
2)책망을 받았던 교회 - 고린도교회, 에베소교회(첫사랑 상실), 버가모교회(세속화), 두아디라교회(이단을 용납함), 사데교회(경건의 능력을 상실), 라오디게아교회(미지근한 교회).

이상의 알려진 교회 외에도 성경에는 많은 교회들이 소개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지나쳐 간 곳에는 교회들이 생겨났다. 그에 의해 세워진 많은 교회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본받고 싶은 교회가 하나 있다. 그 교회가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데살로니가교회이다.

2년 전 새벽에 데살로니가전서를 묵상하면서 이런 교회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데살로니가는 빌립보 서쪽 160km 에 위치한 마게도냐 지역의 중심도시,
알렉산더대왕의 이복 동생의 이름을 따서 불려지게 되었다. 인구 약 20만 정도의 대도시
구성 : 헬라인이 다수, 로마인과 동방인, 그리고 유대인들로 구성.
정치, 경제, 상업 중심의 도시이고 가까이 항구가 있는 무역항이며 로마와 동방을 잇는 도로(에그나티아)가 시 중심을 통과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데살로니가교회의 설립
사도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빌립보교회에 이어 마게도냐 지역에 두 번째로 개척된 교회이다. 사도 바울은 그곳의 회당에서 사역을 시작했고, 소수의 유대인과 헬라인, 그리고 귀부인들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사도 바울이 그곳에서 사역한 기간은 3주에 불과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교회는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이 반듯하고 견고하게 성장해서 주변에 좋은 소문을 나게 한 훌륭한 교회가 되었다.

(살전 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목사로서 개인적인 간절한 소망은 교회다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은 소문난 교회를 세우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목사 개인의 의지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함께 섬길 때 가능하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 되는 교회가 세워질 것이다.

여러분! 우리 함께 이런 교회를 세워보지 않겠는가? 공감하면 아멘합시다!

그렇다면 먼저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였으며 그들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가?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 설명할 수 있다.
1) 사도의 감사(2-4)
2)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신앙자세(5-10)


1.사도 바울의 감사(2-4)
1:2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를 생각할 때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하게 된 3가지 요인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교회의 특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1)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였다.
윌리암 헨드릭슨은 “믿음의 역사”라는 구절을 “믿음으로 비롯된 역사”라고 번역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보여준 믿음의 역사는 무엇인가? 오늘 읽은 본문 중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이 보여준 믿음의 행동을 찾아 볼 수 있는데 9절에 잘 나타나 있다.

(살전 1: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들의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은 “우상을 버린 것”이었다.
데살로니가인들이 이전에는 이교도들이었다. 우상숭배자들이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우상을 버렸다. 그리고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이다.

조상 대대로 섬겨오던 그들의 신을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당했다. 유교적 관습 아래서 제사를 포기한다는 것은 가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 들인 사람들은 제사가 우상숭배인 것을 알고 과감히 버렸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다.

오늘날 이 땅에는 수 많은 교회가 있고 교인들도 있다. 그것은 선교 초기에 조상숭배를 버리고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려다 박해를 당한 선진들의 피의 결과다. 그러나 오늘날은 달라졌다. 믿음의 역사를 보여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이유는 버릴 것들을 과감히 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신앙 - 양다리 걸친 신앙.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계 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라오디게아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우상숭배를 과감히 떨쳐 버렸다. 그리고 돌이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다. 믿음의 모습이 아닌 것은 과감히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집중하는 것을 믿음의 역사라 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이런 모습에 감동하였고 감사할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2)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였다
역시 윌리암 헨드릭슨은 이 구절을 “사랑에 의해 촉진된 수고”라고 번역했다. 쉽게 표현하자면 사랑은 수고를 동반한다는 뜻이다. 사랑이 있으면 수고가 귀찮지 않고, 희생도 아깝지 않다는 것이다. 1:4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부르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이렇게 부른 이유는 그들 모습 속에서 사랑의 수고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받으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반드시 사랑에 대한 반응이 나오게 된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사랑의 수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사랑의 수고를 감당했는가?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가뭄으로 인해 궁핍한 상황에 놓인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을 돕기 위해 기꺼이 헌금에 동참한 것이다.

(고후 8:1-3)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그들 자신의 환경을 생각하면 위로를 받고,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이었으나 도리어 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지체들을 위하여 기꺼이 구제하는 일에 동참한 것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바보같은 행동이다. 그러나 그들이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주머니를 털어 구제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강권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찬송가 4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사랑을 받았고, 은혜를 입었기에 사랑의 수고를 감당할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이 사도 바울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넘친 교회였다.

3)소망의 인내를 가진 교회였다.
이 말은, 소망이 있었기에 인내를 이룰 수 있었다는 뜻이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인내한다. 그러나 소망이 없는 사람은 포기한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소망은 무엇이었는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환난 속에서 인내를 이룰 수 있게 하였는가?

(살전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재림에 대한 소망이 그들이 당하는 환난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었던 중요한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이 재림의 소망에 대하여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재림에 대하여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재림은 너무나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일에 너무 집착되어 있다. 관심은 오직 나, 자기 일, 자기 집, 자기 가족, 자기 취미, 자기 직장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결과가 무엇인가? 신앙적 이기주의, 기복주의, 세속주의가 아닌가? 그런 마음 상태에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를 기대할 수 있는가?

“반기련”이란 단체가 있다. “반기독교시민연합”의 대표가 이런 말을 했다.
“기독교가 이 땅에 존재해서 유익이 없다. 이 땅의 교회는 이기적, 배타적, 기복적, 세속화되어 더 이상 거룩함과 사랑을 찾아 볼 수 없다.”

교회에 대하여 소문이 안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너무 자기 중심적이고 현실주의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내 소망이 하늘에 있다고 노래하면서 부자되길 원하고 땅에서 성공하길 원하는 욕심쟁이 이중인격자라고 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을 소망할 때 환난과 궁핍을 이길 수 있게 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런 말을 했다.

(롬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현대인의 성경>
이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는 것은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연단된 인격은 희망을 갖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었던 교회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 감사가 있었고, 기도할 때마다 잊지 않았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2.데살로니가교인들의 신앙 자세(5-10)
1)기쁨으로 도를 받고 본받음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들이 처한 환경은 매우 좋지 않았다.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았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주님을 본받은 자가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가르치는 자들의 충분한 준비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2002년도에 중국 중부 정쩌우에 있는 한족 지하 신학교에서 한 주간 목회서신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이어지는 강의에 그들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그 젊은이들은 자기 동족을 품에 안고 사명감을 가지고 배웠다.
주님을 본 받으려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2)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됨
(살전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설전 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니까 잔소리할 것이 없었다.
그들은 이미 작은 예수, 작은 바울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신앙은 모델이 될 만큼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 들인 결과인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선생인 사도 바울과 주님을 본 받으려고 노력한 결과이다. 그들의 신앙은 각 처에 퍼졌다. 사람들이 말하길, “믿으려면 데살로니가 교인들 처럼 믿어!”

나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나의 신앙, 나의 인격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 어떠할까 생각해 보았다. 여러분의 신앙에 대하여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말할 것 같은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본 받을만 한가? 모든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3)우상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김
(살전 1: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의 원인, 불행의 원인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우상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했다.

(사 44:9)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데살로니가교인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복음을 받고 자신들이 섬겨왔던 신들이 우상인 것을 알고 과감히 버렸다. 우상의 현대적 의미는 허망한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 버릴 것을 붙잡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이다.

4)재림 신앙
(살전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인들은 주의 강림을 사모하고 있었다. 주의 강림, 곧 재림을 사모하는 신앙은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신앙자세이다. 그 신앙은 그들이 처해 있는 악조건의 환경들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초대교회 서머나교회 감독이었던 폴리갑의 순교사를 잘 알고 있다. 그는 형장에서 마지막으로 개종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 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가 있겠소” 그리고 그는 화형당하여 목숨을 잃었다.

만약 그에게 부활과 재림에 대한 소망이 없었다면 그렇게 용기 있게 순교당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죽은 자와 산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은 죽음의 현장에서 비굴하게 주님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믿음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신앙 자세를 보면서 느끼는 점이 있다. 그것은 소문난 교회는 그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1)말씀을 배우려는 열심
2)본을 보이는 성숙함 - 사랑의 수고
3)우상을 던져버리는 믿음의 결단
4)재림 신앙으로 인내하는 소망의 자세가 있었다.

마귀는 반기독교단체를 앞세워 교회를 비난하고 부정적이고 나쁜 소문을 내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가 이 땅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비난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비난의 내용들은 현재 교회 안의 고쳐야 할 점들이기 때문이다.

안일하게 적당주의로 신앙생활할 때가 아니다. 천만 기독교인들과 오만 교회들이 하나가 되어 각자 섬기는 교회를 데살로니가교회와 같은 교회를 만들 시대적 사명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려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신앙의 자세와 특징적으로 나타난 교회의 모습을 본 받아야 할 것이다.

특별히 2008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를 살전 1:3의 말씀을 근거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이루는 교회”라고 정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소문난 교회는 우리가, 내가 만드는 것이다. 성령께 의지하고,
좀 더 부지런해지자. 그리고 좀 더 열심을 내자. 데살로니가교회가 사도 바울의 자랑과 기쁨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교회를 주님의 기쁨, 주님의 자랑거리가 되는 교회 만드는 일에 한 마음되자.

“우리 동네에 평안교회가 있어서 너무 좋아!” 이런 말이 나오도록...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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