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희망으로 든든히 서가는 공동체 (사 43:18-21)

  • 잡초 잡초
  • 575
  • 0

첨부 1


희망으로 든든히 서가는 공동체 사43:18-21.

이년 전인가요, 향상 교회를 담임하시는 정주채 목사님께서 이 강단에서 외치신 말씀 가운데 잊을 수 없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는 꿈꾸고 하나님은 일하신다." 참, 은혜로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2008년도 1월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면 누구나 꿈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드러내 놓고 자기 꿈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한 생을 살면서 어떤 꿈을 가지고 살까, 금년에는 어떤 꿈을 이루어볼까 하는 생각들을 합니다. 꿈을 먹고산다는 것, 꿈을 위해서 뛴다는 것, 꿈을 달성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우리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 우리의 희망찬 삶을 살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꿈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결정해 줍니다. 꿈이 큽니까? 그 사람은 대인입니다. 꿈이 작습니까? 그 사람은 소인입니다. 꿈이 고상하면 그 사람도 고상하고 꿈이 천박하면 그 사람도 천박해집니다.

새해 아침! 꿈을 안고 이 자리에 나와 있지만, 우리 모두 무언가 마음에 염려와 두려움이 있는 것 사실이 아닙니까? 모두 다 어렵습니다. 어렵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힘든 상황 속에서도 꿈을 가진 사람은 희망의 길을 찾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서도 어두움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두움밖에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눈에 보이는 절망적인 환경과 자신의 연약함을 뛰어넘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매이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장애물들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지난 과거에 안주하거나 과거에 붙잡혀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경험하셨겠지만, 과거라는 틀에 갇혀 있으면 그 세계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심리학자 사무엘 죤스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를 조사했습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지나간 과거를 가장 많이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어두웠던 과거, 실수했던 과거, 창피했던 과거와 같이 불필요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40%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능성이 없는 허무한 생각이나 공중에 흩어져 버릴 불필요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30%나 됐습니다. 또한 남의 말 때문에 상처가 된 일, 답답한 일, 분노하고 흥분된 일들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12%, 건강에 대한 지나친 염려를 하며 사는 사람이 10%나 된다고 조사결과는 말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밝고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겨우 8%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함께 보는 이사야 43장은 유대 백성들이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웠던 시절에 선포되었던 말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유다 왕국은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대부분의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 만리 타국 바벨론으로 끌려왔습니다. 그렇게 끌려온 지 70여 년이 가까워 오건만, 조국 광복의 희망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70년은 실로 너무 긴 세월이었습니다. 잡혀 왔던 이민 1세대들은 거의 다 세상을 떠났고, 고국에 대한 기억도 전혀 없는 2, 3세대만이 살아 남아 있는 지금, 나라의 회복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포기한 사람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다가 지쳐 버린 사람들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패배의식에 젖어 있었고 그들에게 있어서 현실은 광야를 방황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마치 사막에 던져진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 무슨 미래가 있고, 무슨 거기에 꿈이 있겠습니까? 초라하고 비참하기 짝이 없는 현실 앞에 낙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서 무엇을 어떻게 일어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 19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여기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여기에서 '새 일'이란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일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엄청난 승리의 메시지를 주시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좀더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I am doing a new thing!" "내가 새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과거에 애굽을 탈출할 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홍해를 가르셨던 하나님, 광야에서 메추라기와 만나로 배불리 먹이셨던 하나님, 광야의 망망한 길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가야갈 곳을 인도하셨던 하나님, 광야에서 목말라할 때 바위에서 샘물이 터지게 하신 하나님이 이제 우리에게다가 오셔서 다시는 일어설 것 같지 않은 인생에게 희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 새 일을 행하시는 분이 누구에게 그 일을 역사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1절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여기 왜 하필이면 구약의 수많은 이름들이 있는데 하필 야곱의 이름을 부르며 그 새 일을 맡기시겠다는 말입니까?

여러분도 아시지만,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까지 노력해서 안 되는 것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다 이루었기에 불가능을 몰랐습니다. 출생서열까지 바꾸면서 축복을 가로챘고 원하는 여인을 얻고자 14년이나 봉사하며 기다린 입전형적 인물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도 한 연약한 인생임에 틀림없습니다. 창32장에 보면 얍복강 나루터에서 자신을 발견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성공이라고 생각한 모든 것이 아무런 자신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던 그 날 밤 환도뼈가 부러질 때 자기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노력하고 애써서 얻은 성공도 어느 한계에 부딪히면 사라지고 결국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 흙으로 돌아갈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환도뼈가 부러진 야곱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앞에 불구가 된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나를 축복하십시오. 이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를 축복하십시오." 그때 하나님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왜 이름을 묻습니까? 이는 단순히 인사치례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은 야곱 자신으로 하여금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정직하게 "야곱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정말 그는 자기 이름 그대로 평생을 남의 발꿈치를 붙잡고 살아온 자신을 발견합니다. 성공하는 길이 있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붙들고 발버둥 쳐왔던 것이 야곱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붙잡음이 그의 삶에 참된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다시 한번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제대로 붙잡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연약한 한 인생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이제 야곱이라 하지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 좀더 정확하게 해석한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사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그 야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한마디 속에 하나님의 강력한 소유권 주장이 들어있습니다. 2절을 보면 "물 가운데로 지날 때 함께 하시고 침몰하지 않게 하시고 불타지 않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5절을 보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다"고 했습니다.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에게 새 일을 맡기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는 2500년 전에 메시지가 아닙니다. 바로 야곱과도 같은 인생인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오늘 시선을 땅에 두고, 세상 걱정에 온통 빼앗겨 있는 우리에게 보라!!고 외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19절을 다시 한번 더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여기 보라!는 명령을 나타내는 말일수도 있고, 주위를 환기시키는 감탄사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사야는 지금은 모든 것을 다 잃고 소망마져 무너져 가는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에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 우리는 목이 멜 정도로 감격스러운 사랑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존재들입니다.

오늘날도 세상 사람들은 믿음의 눈이 없기에 우리의 변화된 신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으로, 학식으로 콧대가 올라가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사실에 대단한 긍지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 긍지가 없다면 우리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수십 억을 푼돈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틈에서 기껏해야 우리가 무슨 재미로 얼굴을 들고 다니겠습니까? 돈으로 따진다면 우리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식으로 프라이드를 말한다면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 앞에나 당당히 설 수 있는 긍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당신의 자녀 된 우리를 향해 지금 새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여기 이리와 타조는 사막이나 황무지에 사는 핍절한 들짐승들입니다. 그 거칠은 광야에서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새 일을 행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이 말 못하는 짐승도 그리고 버림받아 절망하고 살아가는 모든 이방 나라들까지 축복 받는 자리에 이르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성취되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롬 5: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한 사람 아담의 죄로 인해 만물이 탄식하지 않습니까? 이번에 태안반도에 기름 유출로 인해 생계가 막막한 어민 한 삼이 자기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자살을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몇 사람들의 부주의로 인하여 천혜의 환경을 자랑하던 자연이 검은 기름을 뒤집어 쓴 채 신음하고 또 그로 인해 절망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비관 만해서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첫째 아담과는 달리,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한 분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죄와 악의 자리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로 인하여 영원한 의와 구원과 소망을 얻으며, 그의 나라에 맞는 올바른 삶을 소개해주시며 추구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이 머물고 그 분이 간 곳마다 광야에 물들이 흐르고 사막 한 가운데에 강줄기가 일어나는 생명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초막절을 지내시려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외치십니다. 요7:38절에 보면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물이 되어 주셔서 갈보리 산 위에서 인류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신 십자가의 제단에서 터져 나온 보혈의 생수를 말합니다. 그리고 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러니까 생수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마시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를 보면 세상의 방법으로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불황 속에서도 3가지 업종만은 불황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점 집입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점쟁이가 40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인구 100명당 1명이 점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잘되는 비즈니스 중의 하나는 '점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점쟁이를 찾아가는 이유를 물어보면, 답답해서 찾아간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의 두려움과 답답함을 해소하려고 점집을 가는 것입니다.

또 한국처럼 술장사가 잘 되는 나라도 없다고 합니다. 와인 가운데 최고로 쳐주는 칠레산 와인은 우리나라 사람들 때문에 동이 난다고 합니다. 프랑스산 와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어느 분이 와인 한잔을 음미하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짙고 깊은 붉은 색이 매혹적이며 풍부하고 조화로운 과일향과 함께 서서히 감도는 오크향에 가슴이 설렌다. 떨리는 기분으로 한 모금 머금었을 때 부드럽고 풍부하게 입안을 채워주며 복합적이고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톡 쏘는 쌉싸래함과 상큼함 뒤에 부드러운 타닌이 입속에 길게 여운을 남겨주는 인상적인 와인이다." 그 술을 입에 댈 때 겉으로는 대단히 우아해 보이지만, 사치스러워 보이지만, 그 속에 있는 인생의 빈잔은 술을 아무리 퍼 마셔도 사막과 같은 메마른 심령을 메꾸질 못합니다.

도박도 마찬가지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박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는 사람들이 왜 도박을 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생각해보니까 도박의 목적이 돈이 아니더랍니다. 돈이 목적인 사람은 돈을 주면 더 이상 도박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돈이 생기면 여전히 도박장으로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내린 결론은 "도박을 왜 하느냐? 그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깊은 목마름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점으로, 술로, 춤으로, 도박으로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점 집을 찾으면 찾을수록 술을 먹으면 먹을수록 도박에 빠지면 빠질수록 인생은 저 광야에서 길잃은 자처럼 방황의 자리에서 빠져 나오질 못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인생의 갈증을 느끼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수가성 우물가 여인입니다. 그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타는 목마름은 세상의 그 어떠한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요7:37절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방법으로 여러분들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서 갈증을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생수로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생수, 어떠한 갈증도 해결할 수 있는 생수, 죽은 생명도 살리는 성령의 생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동 여러분!
왜 이처럼 때로 주저 않고 싶어하고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잔을 생수로 채우시기를 원하시는 그 주님의 깊은 뜻이 무엇입니까? 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 우리가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바로 살아있다는 증거요, 동시에 하나님의 세계를 날마다 경험하는 은총의 삶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세 전에 예정해 놓으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도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이유도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궁극적이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만 닿으면 금방이라도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천국의 비파와 같습니다. 보십시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받은 믿음의 자녀들의 삶은 한 마디로 찬양 속에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그들이 고난의 한 복판에서도 세상이 그들이 환영하지 않아도 그들 속에 있는 찬양을 빼앗아 갈 수 없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하늘 보좌에 계신 어린양 예수를 보고 찬양하는 스테반을 보십시오. 사마리아에 복음이 들어갈 때 온 성이 기뻐하는 찬양소리를 들어보십시오. 한 시대 한 역사가 새롭게 소망으로 나아갈 때 여지없이 그들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지금 주님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동 여러분!
하나님께서 한번도 밟아보지 않은 이 새해 아침에 우리에게 위대한 약속을 주십니다. 이 약속은 거룩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시요, 우리의 창조자이신 하나님만이 그의 자녀들에게 하실 수 있는 약속입니다. 모든 생각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우리의 절망을 이기고 '새 일'을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명심하십시오.

런던의 한 길 모퉁이에서 구두를 닦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빚 때문에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기 위해 구두를 닦아야 했습니다. 새벽부터 나와서 밤늦게까지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두를 닦으면서도 그 소년은 얼굴에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늘 노래를 부르는데 밝은 노래만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구두 닦는 일이 뭐가 그리 좋니?" 그때마다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즐겁지요. 저는 지금 구두를 닦고 있는 게 아니라 희망을 닦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년이 바로 『올리버 트위스트』를 쓴 세계적인 작가 찰스 디킨스입니다. 아무리 먹구름이 짙어도 그 먹구름 뒤에는 빛나는 태양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련과 환경이 어렵고 힘들어도 그 모든 것을 합해서 선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습니다. 어린 찰스 디킨스가 손님들의 반짝거리는 구두 코 위에서 희망의 별빛을 보았던 것처럼,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면서 그 누구보다 나를 통해 새 일을 행하시기를 원하시는 주 앞에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사는 복된 주의 백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