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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비가일의 그 사랑 영원히 빛나리 (삼상 25: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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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일의 그 사랑 영원히 빛나리 (삼상 25:1~42)

우리 주위에는 잘못된 것도 그것에 익숙해지면 정상인 것처럼 불편한 것마저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문장구조에서 주어(主語)가 없어도 의미전달에 지장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부터 문장에 주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어는 문장에서 주체를 표시하고 서술어는 그 주체의 행위, 상태, 성질등을 서술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주어와 서술어는 문장의 두 기둥과도 같습니다.
문장에서 주어가 생략되면 그 문장 자체가 모호해질 때가 많습니다. 모든 문장에서 주어와 서술어는 서로 긴밀하게 협조되고 일치되어야 바른 문장이 될 수 있습니다. 서술어는 주어의 동작이나 상태를 말해주고 판단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문장이 불완전하고 의미도 모호해집니다.

본문에 나타난 아비가일은 나발의 아내였습니다. 이를테면 남편은 주어와도 같고 아내는 서술어와 같은 것입니다. 남편이 온전치 못한 나발의 가문은 주어가 없거나 생략된 문장과도 같습니다. 아내 아비가일이 남편의 일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치 서술어만으로 의미가 통하고 문장이 되는듯하나 결국 주어가 없는 문장이 불완전하듯이 남편이 불량하면 그 가정은 폐가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는 환란과 함께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사울왕의 말년의 생활은 다윗에게 치명적이었습니다. 악신에 걸린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는 이스라엘의 등불인 사무엘이 이미 죽었습니다. 다윗이 광야에 나가 있는 사이에 미갈을 다른 남자에게 결혼시킨 일이 있었는가 하면 다윗이 600여명의 부하들과 살아가기가 힘들어서 구걸하다시피 한 때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제사장 아비멜렉에게 가서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주소서'라고 하면서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얻어먹은 일이 있었습니다(삼상 21:1-6). 다른 한번은 나발이란 사람의 양을 지켜준 일로 양털 깎는 날에 부하 10명을 보내어 양식을 구한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후자의 사건을 중심하여 엮어져 가고 있습니다. 나발이라고 하는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그가 양털 깎는 날에 다윗은 바란광야에서 자기의 소년 10명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서 나발에게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당신의 이 양털 깎는 좋은 날에 나의 소년들이 당신에게 은혜입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그들이 상하지 아니했었고 그들이 갈멜에 있을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 하였나이다. 그러나 당신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합니다』라고 소년들은 다윗의 이름으로 이 모든 말을 나발에게 전했습니다(삼상 25:7-9).

여기에 네 아들이라고 한 것은 겸손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부자 나발은 원래 완고하고 행사가 악했습니다. 그가 다윗의 소년들에게 하는 말이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고 하면서 요즘에 각기 주인에게나 억지로 떠나는 종들이 많다고 했습니다(삼상25:10).
그리고 나발은 다윗의 소년들에게 말하기를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25:11).

다윗의 소년들은 힘없이 돌아와서 다윗에게 나발이 한 일을 보고할 때 다윗이 분하게 생각했습니다(25:12). 다윗은 400명의 종들과 무장을 하고 200명은 소유물 곁에 남겨둔 채 나발을 향하여 진격하고 있었습니다(25:13).
이때 나발의 소년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지금까지 된 일을 말했습니다(25:14). 다윗의 소년들이 광야에서 매우 선대해 주었고 우리가 양을 치는 동안에 그들이 와서 함께 있어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어 주었는데도 다윗의 소년들을 욕보였다고 했습니다(25:14-16). 이제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했다고 했습니다(25:19).
이 소리를 들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급히 떡 이백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송이와 무화과뭉치 이백을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나귀들에게 싣고 소년들을 앞세우고 자기 남편에게는 말하지 아니한 채 급히 떠났습니다(25:18-19).

마침내 산 유벽한 곳에서 다윗과 아비가일 일행이 마주쳤습니다. 다윗이 말하기를 내가 이 자와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도록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선을 갚는도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 한 남자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고 다윗이 결의에 찬 보복을 선포했습니다(15:21-22). 이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이 어려운 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한 현명한 여자였습니다.

Ⅰ. 그녀는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본문 25장 3절에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아비가일( lyIg"ybia} ) 은 기쁘게 하는 자 혹은 기쁨을 주는 자 라는 뜻입니다. 총명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토바트 세켈(Atb'/f lk,ce), 이라고 하는 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역대상 22장 12절에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너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고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를 더욱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용모가 아름답다는 말은 내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겸하여 갖춘 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아가서 4장 10절에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勝)하구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총명함과 내면에 흐르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겉으로 인격화될 때 모든 자들에게 아름답게 보여지고 매력을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1) 그의 총명은 복음을 듣는데 있었습니다.
본문 25장 14절에 『소년중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사자들을 보내었거늘 주인이 그들을 수욕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문안 내용은 평강입니다. 이것은 곧 복음입니다. 다윗은 평강을 3번이나 반복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의 정통적인 인사법으로 메시야 대망 사상에서 나온 말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평화가 나발의 가정에 완전히 정착되기를 빌었습니다. 다윗이 이러한 평강을 빌 수 있는 근거가 여기 있습니다.

본문 25장 15-16절에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상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완고한 나발은 다윗의 소년이 가지고 온 평강의 축복을 외면한 채 다윗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다윗의 소년이 가져왔던 평강의 복음을 받지 아니하면 화가 미칠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받으면 좋고 안 받으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받으면 살고 안 받으면 죽는 것입니다.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에는 믿어야 될 의가 있고 행해야 될 의 가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2) 그의 총명은 들은 복음을 믿고 행동화 하는데 있습니다.
(1) 아비가일은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본문 25장 18절에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을 취하여 나귀들에게 싣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600명의 군사들에게 결코 많은 것은 아닙니다. 적은 예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비가일의 정성스런 예물은 다윗의 맹렬한 분노를 그치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2) 그는 불신앙과 타협하지 아니했습니다.
본문 25장 19절에 『소년들에게 이르되 내 앞서 가라 나는 너희 뒤에 가리라 하고 그 남편 나발에게는 고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예물을 실은 나기를 먼저 보내는 것은 상대방의 호위와 은혜입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입니다. 아비가일이 남편 나발에게 말하면 반드시 하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고 아비가일은 남편의 동의 없이 혼자 감행한 것입니다.
현명한 성도는 가족과 의논할 것이 있고 때로는 의논하지 아니하고 혼자 결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윗의 진노를 멈추게 하려고 하면 나발과 의논하는 것은 오히려 무익한 것입니다.

3) 그의 아름다움은 겸손한데 있습니다.
본문 25장 23절에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니라』고 했습니다.
아비가일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 앞에 엎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릴 줄 아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4) 그의 아름다움은 남편 대신 용서를 구하는 데 있었습니다.
본문 25장 28절에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용서는 철저히 자기 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용서를 구하는 자는 핑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25장에 주라는 단어가 한 장에 무려 29차례나 나타납니다. 이것은 용서를 구하는 자의 철저한 자기 부정과 상대방을 용서의 주체자로 높이는 태도입니다.
아비가일은 자기의 허물과 남편의 허물을 동일선상에서 보았습니다. 남편의 허물과 죄가 곧 자신의 허물과 죄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을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아니하고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Ⅱ. 그녀는 역사적 통찰력과 영적 혜안을 가 진 여자입니다.

본문 25장 28-30절에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라고 했습니다.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다윗에게 오랬만에 신앙의 사람 아비가일로 인하여 참으로 위로가 되었습니다. 아비가일의 이 말은 다윗의 왕권을 굳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 중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영원히 다스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실 자가 나온다고 하므로 메시야 도래의 예언적인 말을 할 수 있었던 총명한 아비가일이었습니다.

특별히 아비가일이 지도자를 "나기드( )"라고 하고 왕을 의미하는 "멜렉( )"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아니한 것은 사울이 아직까지 살아있기 때문이며 "나기드"즉 지도자는 왕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왕에 대한 은닉적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성전건축을 위하여 특별히 왕이 선택되었으니 나발을 죽여서 손에 피를 흘리는 사사로운 일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간곡히 요구하는 것은 나발을 용서해 달라는 일차적 목적 외에 다윗왕 권의 성결성을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잠시 잠간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면 나중에 후회가 크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Ⅲ. 그녀는 한 남편의 아름다운 아내였습니다.

1) 그녀는 나발의 아내였습니다.
본문 25장 25절에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라고 했습니다.
본문 25장 36-37절에 『아비가일이 나발에게로 돌아오니 … 아비가일이 밝는 아침까지는 다소간 말하지 아니하다가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가 깬 후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고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숨가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나발은 왕의 잔치 같은 잔치 상을 차려놓고 대취해 있었습니다. 그는 총명한 아내 아비가일의 말을 듣고 놀랬습니다. 그리고 10일 후에 하나님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었습니다(25:38). 아비가일은 한 남자의 아내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했습니다.
그는 나발의 가문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막았습니다. 배은망덕한 나발에 대한 다윗의 보복은 멸문지화였습니다.
본문 25장 34절에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두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했습니다.

2) 그녀는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본문 25장 42절에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사자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나발이 죽었다함을 듣고 다윗은 내심 다행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직접 나발에 대한 원수를 갚지 않아도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지혜로운 처신을 하도록 한 아비가일이 생각났습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그녀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다윗의 사환들이 갈멜에 가서 다윗의 심중을 아비가일에게 전했습니다(25:40). 아비가일은 다윗의 의중을 전격 수용하였습니다.

본문 25장 41절에 『그가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가로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사환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아비가일은 겸손했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과 결혼하여 다윗의 둘째 아들 길르압을 낳았습니다.
사무엘하 3장 3절에 『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라고 했습니다.
역대상 3장 1절에 『둘째는 다니엘이라 갈멜 여인 아비가일의 소생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 길르압과 다니엘은 동일 인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비가일은 총명한 여자입니다. 그녀의 총명은 복음을 듣는데 있었습니다. 그녀의 총명은 복음을 믿고 행동화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녀는 용모가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겸손한데 있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남편대신 용서를 구하는데 잇습니다. 불신앙하는 남편과 타협하지 아니했습니다. 겸손했습니다. 간절히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는 영적인 통찰력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한 남편의 아내로서 자시의 책임을 다했습니다. 그녀는 남편 나발의 가문을 멸문지화에서 구했습니다. 그녀는 나발의 아내로서 소임을 다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되는 인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지켜 주실 뿐만 아니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평강의 복음을 모르는 이 세상은 불량한 세상입니다. 그들은 주의 몸된 교회를 파괴시키는 장본인입니다. 평강의 복음을 거부한 배은망덕한 자들에게는 마지막 비참한 한 날이 예비 되어 있을 뿐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힘이며 보호자입니다.
남편은 문장의 주어와 같고 아내는 문장의 서술어와도 같습니다. 문장에서 주어가 빠지면 문장이 되는 것 같아도 의미전달에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남편은 죄인입니다. 배은망덕한 남편입니다. 한 가정의 영과 육의 문제를 책임질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남편은 죽는 남편입니다.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남편입니다. 수학적 한계요 과학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남편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내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 동안 남편 집을 구원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의 칼날이 임하지 아니하도록 내 남편을 살려달라고 애원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먼저 우리 가족들을 사랑합시다.
사랑은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결코 쉬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무겁지 않지만 결코 가벼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무엇이건 사랑하는 마음은 나를 환하게 합니다. 사랑은 상대가 아름다워지길 바랍니다. 사랑은 아름다움을 삼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입니다.
지위나 재산으로 사랑을 재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매이지 않는 마음의 충만함이 사랑이라면 그런 두 마음이 마주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사랑은 상극이 아니라 상생인 것입니다.

사랑은 집착하거나 소유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만 사랑하는 마음만 그대로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가 나에게 그 무엇이 아니어도 좋은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명품사랑입니다. 사랑은 짝퉁이어서는 안됩니다. 차라리 시장상표 사랑이 떳떳합니다.
사랑을 잃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사랑을 잃은 게 아니라 사랑을 잊은 것입니다.
가난이 사랑을 제약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사랑을 잊고 있는 여러분들이여, 저는 여러분들이 사랑을 되찾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여러분의 삶을 자유롭게 해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여러분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이 그렇게 아름다워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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