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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백성과 기도 (창 32:1-3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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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과 기도 (창 32:1-33:17)
 
오늘은 하나님 백성과 기도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외삼촌과의 문제가 해결된 후 야곱은 고향으로 계속 진행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났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를 만난 그 땅의 이름을 “마하나임” 곧 ‘두 진영’이라 칭했습니다(32:1-2).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고향을 떠날 때에도 그를 만나주셨고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외삼촌의 집에 있는 동안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 순간에도 먼저 찾아 오셔서 함께 하셨습니다. 야곱은 인생을 홀로 외롭게 투쟁하며 살아온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야곱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아직 깊이 깨닫지는 못한 듯합니다.

하나님의 군대를 만났지만 야곱의 마음은 불안했습니다. 고향이 가까워질수록 20년 전에 형을 속였던 사건이 점점 또렷해졌기 때문입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 동안은 잊고 지냈지만, 이제는 그 문제가 야곱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야곱은 평화 사절단을 앞서 보내면서 “내 주 에서”에게 “주의 종 야곱”이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하라고 지시했습니다(3-5).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기도를 빼앗았지만 실제로는 20년 동안 종살이했음을 밝힙니다. 또한 아버지의 축복내용과는 반대로 형을 ‘주’로 높이고 자기는 그의 ‘종’으로 표현합니다. 형제가 아닌 주종 관계로서 극상의 예우를 갖추며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애썼습니다.

그런데 사절단의 보고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에서가 어떻게 알았는지 이미 사백 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오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6). 에서가 마음이 어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20년 만에 돌아오는 동생을 마중 나오는 것인지, 복수 하려고 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죽이려고 오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벼르던 성난 형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을 것입니다. 20년 전 형을 두려워하여 피할 때의 마음이 고스란히 되살아났습니다. 에서는 이삭의 예언대로 칼을 믿고 사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27:40). 자칫하면 전 재산을 빼앗기고 전 가족이 몰살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반절이나마 살 수 있도록 대비했습니다(7). 그래도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심히 두렵고 답답한 가운데서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9-12). 겸비한 자세와 감사의 태도로 드린 그의 기도는 짧지만 상당히 훌륭합니다. 야곱은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으로 자신의 인생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고 환난 중에 부르짖습니다.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9)고 최근에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를 시작했고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12) 주겠다고 하신 20년 전 약속을 붙들고 기도를 마감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부딪친 현실 문제를 해결해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11)라고 합니다.

기도 후에 야곱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던 형의 약점을 기억하고 예물 작전을 펼칩니다. 580마리의 예물을 준비해서 여러 차례 나눠서 에서에게 전달합니다. 반복해서 “주의 종 야곱”이 “자기 주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임을 고하도록 합니다(13-19). 이는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20). 이 방법은 야곱이 예전처럼 형의 주인 노릇 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음을 반복해서 알려주는 효과와 함께 예물의 양 또한 더 많아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물론 야곱은 뇌물로 형의 판단력을 흐리려고 했다기보다는 속죄하는 의미로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 자기 꾀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버릇은 여전합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진지하게 기도할 만큼 이미 변화되었지만 급하면 교활한 본성이 다시 튀어나올 만큼 아직 충분히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동시에 자기 꾀도 의존하는 두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러니 기도해도 마음에 있는 두려움을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한차례 훌륭한 기도를 드렸다고 해서 갑자기 성자로 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기도하다가 자기 꾀도 부려보다가 도무지 안절부절못했습니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에 일어나 가족들로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합니다. 그리고 “홀로” 강변에 남았습니다(21-23). 그 밤에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했습니다. 그리고는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위골되게 했습니다(24-25).

갑자기 한밤중에 씨름한 것이 무엇일까요? 표면적으로 보면 야곱은 에서를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야곱이 두려워한 것은 ‘죄로 인한 죽음’ 문제입니다. 그는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11)고 했습니다. 형이 달려오는 것은 마치 죽음이 자기를 향해 질주해오고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 죽음 앞에서 그는 전적으로 무력했습니다. 죽음은 그가 평생에 걸쳐 이룩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빼앗아 갈 수 있었습니다. 죽음 문제는 어떤 인간적인 꾀나 어떤 강한 인간성으로도 막아낼 수 없고, 홀로 해결해야만 하는 두렵고 답답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이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씨름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밤새 씨름하게 하신 후에 지금까지 야곱을 지탱해온 환도뼈를 치셨습니다. 그의 강한 인간성을 무너뜨려 하나님께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더 이상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 붙들도록 만드셨습니다. 야곱에게는 이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복은 인간의 힘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틀 무렵에 하나님의 사자가 가려하자 야곱이 말합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26). 일평생 축복 쟁취를 위해 씨름해온 야곱의 입에서 매우 놀라운 말이 나왔습니다. 야곱은 장남을 축복하기 원하는 아버지와 겨루어 축복기도를 쟁취했습니다. 형과 겨루어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외삼촌과 겨루어 라헬을 얻었고, 공짜로 부려먹으려는 처가댁 식구들과 겨루어 막대한 재물을 모았습니다. 야곱은 항상 승리했고 원하는 명예와 사랑과 부를 모두 얻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기고 축복을 쟁취하려고 애씁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께 축복해달라고 매달립니다. 자기의 모든 꾀를 내려놓고 하나님께만 의존합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축복을 쟁취하는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겨루었고 하나님과도 씨름했습니다. 기도의 씨름을 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쟁취해 내려고 용을 썼습니다. 하지만 사람과 겨루어 이기고 심지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고 해서 축복이 자기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평생 겨루어 쟁취한 것이  한 순간에 없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축복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야곱의 이름을 물은 후 “이스라엘”로 개명해 주시면서, 이는 그가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라 했습니다(27-28). 야곱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시험을 잘 통과했다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축복은 ‘소유’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존재’를 바꾸어주셨습니다.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나서부터 사람들과 겨루며 살았던 야곱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이스라엘이 되게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두렵고 답답한 상황이 되면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며 기도가 뭔지도 모르는 불신자들조차 겸비하게 무릎을 꿇고 신의 은총을 간구할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 역시 스스로 해결해보려고 애쓰다가 도저히 어쩔 방도가 없으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겸비하게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런데 대체로 그 때에 당면한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해 간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기도의 씨름을 하다보면, 결국 변화되어야 할 것은 환경이 아니라 자기 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에게 있는 근본적인 결함을 고치는 것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철저히 인식하기까지, 그래서 강한 인간성이 깨어지고 철저히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에만 의존하기까지 씨름하게 하십니다.

한 밤중에 열린 얍복강 씨름 대회가 끝난 후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했으므로 죽어야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보존해 주셨습니다(30). 단지 환도뼈만 부러졌을 뿐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이제 과거의 야곱은 죽고 새로운 생명,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는 부러진 환도뼈로 인해 절었습니다(31). 그는 이제 더 이상 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무리의 가장 뒤에서 두려워 떨던 그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를 맞이합니다(3). 20년 동안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가 해소되고 야곱은 형과 뜨겁게 화해했습니다(4-17).

우리는 여기서 진정으로 복된 하나님 백성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의 축복을 받은 후 야곱은 또 다른 어떤 종류의 복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가 복된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무엇이 더 복 된 삶입니까? 많은 것을 소유하고 당당하게 걸어가지만 내면의 불안에 떨던 야곱입니까? 아니면 비록 절뚝거리며 불안하게 걷지만 그 마음에 해가 돋은 것처럼 밝은 가운데서 걸어가는 야곱입니까? 환도뼈가 부르진 것이 야곱에게는 참으로 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도 주시지만 문제도 주십니다. 때로는 결코 피할 수 없는 문제, 붙들고 씨름해서 결판내야만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하십니다. 이를 통해 그 존재자체를 변화시키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두렵고 답답한 문제 때문에 시작했을지라도 단지 당면한 문제 해결로 끝나지 않고 존재가 변화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환경의 변화보다 자신의 변화가 일어나는 기도가 되도록 은혜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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