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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왼손잡이 사사 에훗 (삿 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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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잡이 사사 에훗 (삿 3:12~30)

오늘 이 시대를 보면 목적을 위하여 바른 수단과 방법이 사용되기 보다는 그 목적을 위하여 어떤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되는 아니 정당화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으냐 나쁘냐를 더 많이 생각하여서 때로는 의 보다는 개인의 영리가 우선되는 세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 쉽게 말을 하고 쉽게 판단하는 경향이 지나친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치관, 세계관,이런 것들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알든 모른든지 간에 우리는 이런것에 의하여 지배받고 있습니다. 어떤 생각과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그리고 가게 되어있습니다.

몇 년전 제 멘토가 되시고 존경하는 목사님이 모 방송국 아침 강좌에 나오셔서 좋은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와 ‘잘사는 것’에 대한 개념정리였습니다. 이 목사님이 80년대 초반에 교단의 대형교회 부목사로 있셨는데, 첫째아이가 친구집에 나녀와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빠 네 친구네 정말 잘 살아라! 차가 두 대가 있어!” 지금이냐 차 두 대가 부의 상징은 아니지만 그 때야 차 두 대는 대단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 말을 들으신 목사님께서 아이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고 하셨습니다. 차 가 두 대가 있으면 부자지, 잘사는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어린 아들에게 단어 풀이를 정확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단어 뜻이 개념인데, 개념을 바르게 가지게 하기 위해서라 하셨습니다.

예! 맞습니다. 부자와 잘사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잘 사는 것과 부자는 조금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부자도 잘 살 수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잘 살 수 있습니다. 잘 산다는 것은 부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런 것으로 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장애인을 불행하고 비 장애인은 행복하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알것입니다. 장애인 중에 비 장애인보다 더 행복하게 사는 사람 많습니다. 물론 불행하게 사는 이도 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다 불쌍하다. 그것은 여러분의 생각입니다. 가난해도 그들도 행복하게 잘 삽니다. 우리가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저들이 가난하기 때문입니까? 그러면 한국은 부유하니깐 복음이 필요없습니까? 아프리카 이들에게 설교전에 이렇게 늘 질문합니다.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그럴때마다 저들은 이렇게 답을합니다. “예 우리는 행복합니다.” “여러분 가난하지 않습니까?, 질병도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행복하십니까?” 그러면 저들은 “예 그래도 우리는 행복합니다. 예수님이 있기 때문이고, 당신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은 부자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잘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택하신 민족으로 살라는 것입니다(출19:3~9).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의 삶과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저들은 Struggle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을 보면 저들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다시 노예가 되었습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열여덟 해 동안 섬기니라.” 하나님을 섬기라고 가나안을 오게 한 것인데, 엉뚱한 사람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왜 일까? 원인 없는 결과가 있겠습니까? 12절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왕 에글론을 강성하게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악을행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악을 행했습니까? 살인을 했습니까? 도적직을 했습니까? 여자와 아이를 학대했습니까? 7절을 보면 아주 재미있은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이스라엘의 악은 이런 것 이었습니다. 첫째 저들이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습니다. 둘째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겼습니다. 이게 악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목전에서 이스라엘이 범한 악한 짓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주신땅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은혜와 기적으로 주신 은혜의 터전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여리고에서 모압의 신들이 버젓이 서 있습니다.

저들이 왜 하나님을 잊었는가? 그리고 왜 가나안의 우상을 섬기었는가? 첫째 가나안은 광야와는 완전히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유목생활하던 이스라엘이 농경생활하는 곳에 오니깐 정신을 못 차린 것입니다. 이것은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모세를 통하여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미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정신을 차리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를 쓰셨고, 여호수아는 죽기전에 모든 부족장을 모아놓고 다짐을 하게 했습니다. 광야에 생활하고 땅이 있고 농사짓고 집짓고 사는 삶이 비교가 되겠습니까? 문화적 수준차이가 얼마나 나겠습니까? 자신들이 문화가 쪽발렸겠지요? 자신의 행색이 우스웠겠지요?

둘째 가나안은 풍요와 다산의 농업 신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와서 이것이 훨씬 좋아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신이 보이지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부유와 풍요를 줄 것 같습니다. 의식도 그렇고 서 있는 우상들도 그리고 이론도 너무 잘 맞는 것입니다. 하늘 비 바알이고 땅은 대지의 여신 아세라 저들이 합치면 열매가 맺혀지는 것, 마치 우리네 종족 번식과 똑같은 것이고 그런것이 실지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예배에도 보여지고 말입니다. 죄요 재미없으면 안 짓습니다. 재미있으니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 값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재미로 이 세상 사는 것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고 말하는 지도자들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야성이 있고, 분명하게말하는 지도자들은 사라지고 함께 섞여 살자고 하는 사람들이이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는 놀랍게 성장하고 발전하고 부유해졌습니다. 없을때는 하나님께 메어달리고 올고 불고 하더니 있으니깐 다른 생각이 조금나는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아프면 목사한테 와서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아프면 병원부터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든 승부를 다 볼려고 합니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병원도 가야지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의료혜택이라는 것은 받기 힘든 일입니다. 돈도 그렇고 장비도 그렇고 두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한곳은 제가 사역하는 곳에서 우리 단체와 일하는데 제가 사역하지 않지만 저와 가까운 지역에 있은 곳에 일어난 일입니다. 제가 지역을 방문하면 목사들의 집과 교인들의 집에 찾아가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느 목사집에 갔는데, 아이들을 소개하는 중에 한 아이가 한쪽 다리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것과 더러운 헝겊으로 발목을 감싸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아이가 지붕을 덮는 함석판에 뒤 발목이 찢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갔냐고 했더니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리를 좀 보자고 이리 오라고 했더니 아이가 걷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상처난 부위를 보았더니 살이 뒤집어져있었습니다. 깊이 상처가 난 것을 보고 왜 병원에 안 갔냐고 했더니 말을 못하고 머뭇머뭇하기에 바로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고 돈을 지불해 주었습니다. 아프리카는 이런식으로 해서 이차 삼차 감염이 진행이 되어 죽는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는 것입니다. 별 것 아닌 것인데 죽습니다.

한 목사는 아이가 열이 나서 병원에 갔습니다. 말라리아라고 약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열은 내리지 않고 병이 깊어지고 머리가 부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병원에 갔더니 다른 처방을 주었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나이로비로 왔습니다. 온지 이틀만에 아이가 죽었습니다. 제 지역이 아니었기에 상황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게 아프리카의 현실입니다. 2005년도에 Times지 세계의 질병에 대한 것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보면 29초마다 한 명의 아이가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로 죽고 있다고 합니다. 말라리아는 약만먹으면 낳습니다. 먹지않으면 100%죽습니다. 그 기자가 마지막에 이런 글귀를 남기었습니다. “We can"t stop the earth quake but you can stop malalia." 아프리카의 현실이 이러니 기도하러 옵니다. 한번은 집회를 마치고 기도를 해주는데, 한 할머니가 머풀러는 어느 목사를 통하여 저에게 주었습니다. 영문을 몰라 물어보았더니 한 사람이 너무 아파서 움직이지를 못하는데, 이 머풀러가 그 사람이 쓰는 것인데 그 머플러에 손을 엊고 기도해 주면 낳을 것이라고 믿기에 기도해달라고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머풀러 보고 만가지 생각을 짧은 시간속에 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믿음을 보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바울입니까? 예수님입니까? 베드로 입니까? 아프리카 사람들은 아프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없으면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있으면 있는 것을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한국이 왜 잘 살게 되었습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기도때문입니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창설하신 고 김용기 장로님은 기도굴에서 늘 기도하셨답니다. 그 기도굴에 이런 노트가 있답니다. “대한민국은 잘 될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니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것이다.” 대충 이런 내용의 글귀였다고 합니다. 기도굴에서 외친 겁니다. 주님 이 나라를 부강한 나라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때문에 잘 사는 나라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모든 계층, 모든 성별,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시고 모든 나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그때부터 우리는 우리가 이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이땅에 것에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곳에서 주신 땅에서 종되고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그 모든 축복들이 우리들의 왕 노릇하게 되어서 우리를 엇누르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비젼이나 꿈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요? 모압이라는 부족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올때 만났던 부족이었는데, 민22장에 보면 발람과 발락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노력했던 모압왕 발락이 저주 못합니다. 발악을 하지만 안됩니다. 그런데 그런 부족한테 당하는 것입니다.

축구에서 한국이 피지라는 나라한테 지는 것과 같은 수치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모압이 이스라엘을 정복한 것은 하나님이 이기라고 한 종자들에게 지는 것입니다. 정복하고 다스려야 할 존재들에게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밥인데요, 사단한테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롬16:19-20“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사단을 우리 발 아래 두셨습니다.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섬기면 모든 것이 변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고통이라는 것이 육체적으로 물리적인 압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더 고통과 고난는 심리적이요, 영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끝났습니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타락했다. 병들었다. 종말이다. 말세다. 교회는 문제가 많다. 목사들이 돈 만안다. 그런데 답은 무엇입니까? 답이 없고 문제만 많으면 답답하기만 하지요! 답이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을 찾으면 되는것입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통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때에” 살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세우셨다고 합니다. 부르짖으면 되는 것입니다. 살려달라고 외치면 사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해야 할까요? 될 때까지 해야하는 것입니다. 한 이틀 기도하고 답이 없네 그러고는 포기하고, 또 한 일주일 기도하고 포기하고 그러니 기도의 응답이 있겠습니까? 죽을 병이 걸렸으면 나을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은 사단이 하는 것입니다. 왜 포기합니까? 왜 절망합니까?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이스라엘이 몇 년을 기도했겠습니까? 적어도 17년은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애굽에서 나오기 위하여 이스라엘이 몇 년을 기도했는지 400년을 기도했습니다. 울부짖었습니다.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끝장을 보는 것입니다. 중환자실의 환자들이 의사와 간호사에게 나를 실험도구로 써달라고 애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절박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코끼리는 이쑤시게 하나로 죽이는 방법 세가지 죽을때까지 찌른다. 죽을려고 할때 찌른다. 한번 찌르고 죽을때까지 기다린다.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데 왜 여러분이 포기하시는 것입니까?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절망도 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프리카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낳고, 올해 보다는 내년이 낳고 5년후가 더 좋을 것이다.” 저는 몸이 많이 망가졌습니다. 사단을 우리로 하여금 포기하게 합니다. 절망하게 합니다. 부정적인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감사함으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의 마음을 지키시리라”

저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이 구원자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데요, 이 구원자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가 왼손잡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다윗이 오른손을 쓰는지 왼손을 쓰는지 아십니까? 그러면 모세는요? 혹시 아브라함은 삼손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혹시 예수님에 대해서는 아십니까? 성경은 오른손 왼손을 쓰는 것 이야기 안합니다. 그런데 오늘 에훗에 대해서는 그것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더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성경은 오른쪽과 왼쪽중에 어느 곳을 좋은 곳으로 표현합니까? 구약에서 야곱은 라헬에게서 난 둘째아들의 이름을 사람들이 지은 베노니에서 베냐민으로 바꿉니다. 베노니는 ‘슬픔의 아들’이라는 의미이고, 베냐민은 ‘오른 손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오른편으로 구원받지 못할 자를 왼편으로 분류하십니다. 예수님은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유목민들은 오른손은 밥먹는데 사용하고 왼손은 지저분한 일을 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에훗이 장애인 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오른 손의 사회에서 왼손을 사용한다는 것은 오른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에훗을 독특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훗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는 정말 그런 만한 사람입니다. 16절을 읽겠습니다. “에훗이 길이가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 선칼을 만들어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차고” 사람들은 그를 단순히 공물을 바치는 사람정도로 보냈지만, 에훗은 칼을 차고 갔습니다. 그는 에글론을 죽이려고 작정하고 갔습니다. 죽을려고 환장한 것입니다. 다 겁먹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때 왼손잡이 에훗이 주를위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른손 잡이들이 가만히 있으니깐 왼손잡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성이 있는 사람과 교회를 쓰십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그런 것이 있어야지요! 평화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에훗이 이겨서 평화가 왔습니다. 평화는 전쟁없이 올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세상에 칼을 주러왔다고 비유하신 적이 있습니다. 싸워서 평화를 쟁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칼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사단과 이땅에 어둠에 세력들과 싸워야만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에글론에게 공물바치면서 전쟁없이 조용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평화가 없고 있다해도 그것은 가짜 평화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이 땅에 어둠에 세력을 물리칠때 나타는 것입니다.

할말이 많은데 여기까지 하고 싶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야성을 회복해야지요? 적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싸워야 지요! 오늘의 교회는 문제가 나면 무서워 합니다. 더 공격적으로 더 사생결단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한국교회가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마음이 아프시겠지만 그렇다고 일 못하시지 않습니다. 왼손잡이인 아프리카인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 커피 마시는 법 아십니까? 커피는 그냥 먹는 것이 아닙니다. 커피를 머금고 숨을 들이쉬고 코로 내 뱉으면 커피의 맛이 온몸으로 느껴집니다. 이 이야기를 한 청년에게 해주었습니다. 그가 제게 “목사님! 저는 성질이급해서 그렇게 못해요, 그냥 마시면 되지요 무슨 법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래 그냥 마셔도 되지 그런데 커피를 혀를 느끼는 사람하고 커피를 몸으로 느끼는 사람하고 삶이 같겠냐? 그럴려며 무엇하러 원두로 먹어 그냥먹지!

하나님은 혀로 느끼고 그 정도의 은혜밖에 모르는 사람하고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과 나라와 민족이 같겠습니까? 이제 혀로 하나님을 안 한국교회가 이정도의 축복을 받았다면 온몸으로 주를 깊이 알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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