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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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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 (롬 12:1-2)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 1장부터 11장까지로 구원론에 대한 이론적인 부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반부는 12장부터 16장까지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에 대한
실천적인 부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실천적인 부분의 첫 번째 부분입니다.
그만큼 이 부분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가장 우선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구원받은 성도들이 해야 하는 첫 번째 일은 바로 예배입니다.
특히 영적인 예배 혹은 합당한 예배라고 말씀합니다.
예배는 이렇게 중요하면서도 우선되는 일입니다.
교회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예배입니다.
예배야말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며,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이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어느 교회의 목사님은 자기 아버지께서 예배 때마다 맨 앞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아, 교인들 보기에 민망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묘안을 생각해 낸 목사님은 자기의 어린 아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얘야 네가 할아버지 옆에 있다가, 조시면 쿡쿡 찔러서 깨워드려라.
그러면 아빠가 천원을 주마.”
목사님의 아들은 할아버지가 졸 때마다 열심히 깨워드렸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목사님은 아들에게 잘했다며 돈 천원을 주었습니다.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졸고 있는데도 깨우지 않는 겁니다.
예배가 끝나자 목사님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할아버지를 깨우지 않았니?”
“할아버지가 안 깨우면 이천 원 준다고 하셨어요!”

  여러분에게 예배 시간은 졸리고 지겨운 시간인가요?
아니면, 즐겁고 신나는 시간인가요?

  여러분의 예배는 영적인 예배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는 어떻게 드리는 것인지 본문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 가운데는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배는 우선 마음을 드려야 하는 거 아냐?”
맞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드리는 일이 없다면 참된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아오는 예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마음을 드리지 않는 형식적인 예배를 하나님이 원치 않으십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은 온전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예배하기를 바랍니다.
몸은 이 자리에 와 있지만, 마음을 다른 곳에 빼앗기고 있다면 참된 예배가 아니죠.

  그러나 많은 경우에 마음을 드린다고 하면서
마음만 있지, 그 몸을 드리는 헌신과 희생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적용하기 전에 먼저 사람들의 관계에 적용해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슬픔을 겪은 가정이 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평소에 마음으로 가까이 여기는 사람이 이런 슬픔을 겪었을 때,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직접 찾아가서 위로하고, 함께 슬픔을 나누고자 애를 씁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시간을 들이고, 물질을 나누면서 함께 하고자 합니다.
물론 정말 부득이한 사정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먼 거리라고 할지라도 찾아가서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전혀 시간도 내지 않고, 물질도 나누지 않으면서
말로만 “미안해. 시간이 없었어. 그렇지만 내 마음만은 함께 하고 싶었어. 알지?”
그것이 진실이었다면 전달이 되겠지만,
말뿐이라면, 마음만 함께 하는 것은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전혀 내가 잘 알지도 못하고, 별 관계도 없는 사람인데
우리 교회의 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찾아와 주고
부조까지 해 주었을 때, 그 교인이 느끼는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상조회는 바로 이런 분들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위해 귀한 시간을 내는 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 소원한 관계에 있던 분이라도 마음만 아니라,
몸으로 마음을 표현한다면 금방 그 관계는 가까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부부사이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는 배면문화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을 드러내 놓고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만 은근히 사랑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실한 마음의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더 좋은 것은
마음의 사랑만 아니라, 입술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청소나, 설거지를 해 주는 등 몸으로 봉사해 주면 더 좋은 일이죠.

  사람과의 관계가 이러하다면 주님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은 땀방울이 떨어지는 핏방울이 될 정도로 사력을 다해서 기도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제자들에게 기도하고픈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분명 그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만 있었지, 실제로 엎드려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제자들을 보며 안타까워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으로만 드리는 예배는 이런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릴 영적인 예배는 우리의 몸을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시간과 물질을 드리고, 손발을 드려 봉사하는 일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의 헌신과 희생이 없는 예배는 참된 영적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제사에는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제물을 드리느냐에 따라서 그 제사를 결정합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물이 있을 때 진정한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기 소유의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난, 생명보다 더 소중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속죄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인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바쳐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지 않고
단지 마음만 드렸다면,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사랑이 단지 마음으로만 하는 사랑이었다면
우리에게는 그리 큰 감동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마음만 아니라 몸을 드리는 희생적 사랑이었기에
우리 모두에게 눈물과 감동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주님께 드려야 하겠지만
진정한 마음의 예배는 몸바쳐 헌신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릴 영적인 예배는 말과 입을 드릴 뿐만 아니라
손과 발을 드리는 것이요, 시간과 물질과 노동을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몸은 더러운 몸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몸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몸이라고 다 참된 몸이 아니며, 예배라고 다 참된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어떤 몸이냐가 어떤 예배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불결하거나 흠이 있거나 온전하지 못한 것은 제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제물은 온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즉 우리의 삶이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아무렇게나 살던 사람이
예배 시간에만 나온다고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삶을 위해 몸부림치며 힘쓰고 애쓰는 흔적이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도 더 기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 다른 차원입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데 삶은 전혀 변화가 없는 겁니다.
사1:11이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3절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아주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15절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하나님은 이런 자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며,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16-17절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것을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즉 악을 버리고 정의를 실천하며,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 때 예배가 됩니다.

  예배는 예배당에 나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높이며 경배하는 겁니다.
이 예배가 살아나야 합니다. 형식적인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참으로 예배한 자들은 세상에 나가서 예배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세상 속에서의 삶이 주일 예배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또 주일 예배를 잘 드린 사람이 한 주간의 삶을 바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올바른 관계 속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안 받으십니다.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먼저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 풍조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 삶의 표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말씀의 기준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한 실천을 통해서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는 행동의 변화를 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때
이런 삶을 산 사람이 드리는 예배야말로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예배의 진정한 성공자가 되길 바랍니다.
예배에 성공하는 자는 삶에도 성공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축복하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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