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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자! (요 2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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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자! (요 21:15-23)

우리 모두는 인생 길에서 크고 작은 장애물들을 만납니다.  그 중에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있고,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장애물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만나게 되는 가장 강력한 장애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 속에 나타나는 이 분노의 장애물!  미움의 장애물!  자기 속에 있는 상처의 장애물!  의심의 장애물!  자기를 번민 가운데 빠뜨리는 무서운 불신의 장애물!  자기 안에 있는 열정을 빼앗아버리는 낙심의 장애물!  우리 모두는 살아오면서 한 번쯤은 이런 장애물 때문에 힘들어했던 경험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나를 힘들게 했던지를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간을 향하여 고발하십니다.  "내 속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내가 있다.  내 속에 나타나는 나도 모르는 내가 있다.  내 속에 나를 웃기고 울리는 나도 모르는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나를 가장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세상에서 내가 나를 가장 잘 모릅니다.  똑같은 사건을 받아들이는 감정이 전에는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아주 기분이 영 죽을 맛입니다.  똑같은 환경을 놓고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감정은 어제하고 오늘이 다릅니다.  똑같은 말 한 마디인데도 그 말을 받아들이는 내 감정은 조금 전과 지금과 하늘만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도무지 내가 나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나를 나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 길에서 만나게 되는 가장 크고 강력한 장애물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모든 인생들이 한결같이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토해내는 고백은 이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랴!"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자기도 주장하기 어려운 마음의 장애물을 누가 좀 처리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손에 가시가 박히면 뽑아내야 됩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위 안에 바늘이 들어갔다 하면 수술을 해서 꺼내야 됩니다.  그런데 바늘이 내 마음 속에 꽂혀 있으면 어떻게 빼낼 것입니까?  내 마음 속에 나를 쏘는 가시가 있고 나를 썩히는 쓴 뿌리가 있다면, 사람의 힘으로 뽑아낼 수 없는 그 마음의 가시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잠재 의식 속에 한 인간의 성격을 형성하는 뿌리가 있습니다.  이 뿌리가 성장 과정에서 상처를 입으면 고통스런 상처의 축적이 잘못된 성격을 형성한다고 합니다.  상처받은 마음은 보이지는 않지만 반드시 그 삶 속에 그 상처로 인한 결과가 나옵니다.  가시덤불을 잘라내도 땅 속의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결국 다시 자라기 마련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그 삶 속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첫 번째 결과는 대인관계의 어려움입니다.  극단적인 지배형태의 모습으로 모든 것을 간섭하고 주장해야만 마음에 안정감이 생깁니다.  그래서 자기도 그 분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참견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 주장만을 강하게 펼치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뜻과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속상해 합니다.  집안의 물건들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놓여 있어야지 누가 흩어 놓으면 벌컥 화를 냅니다.  사람들과 깊게 사귀지 못하고 친구도 별로 없습니다.  늘 다른 사람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남에게 후한 점수를 주기보다는 야박하게 점수를 줍니다.  억울해하기를 잘하고 남을 깎아 내리기를 좋아하고 예민하고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흔히 교만한 사람으로 남에게 비쳐집니다.

상처가 마음에 있으면 부정적인 언어나 부정적인 태도가 늘 나를 괴롭힙니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마음의 고통과 고난도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중에 제일 큰 피해자는 바로 제일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데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냥 생각 없이 툭툭 내뱉는 말이 제일 가까운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는데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육체의 감옥보다 더 무서운 것은 마음의 감옥입니다.  수많은 상처, 수많은 고통과 아픔 등이 쓴 뿌리를 만듭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긴 가시들이 잠재 의식을 형성합니다.  확실한 것은 이 숨겨져 있는 마음의 씨앗이 현재의 생활과 삶에 언제나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잠재 의식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여기 길이 있습니다.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임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날마다 때마다 사람 앞에 설 때마다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하나님! 내 안에 나도 정복할 수 없는 어떤 내가 나타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정복하옵소서.  나를 지배하옵소서."

오늘 함께 봉독한 본문에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가 다시 일어나 자기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떠나갔던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히 인생의 실패자였습니다.  그러나 실패보다 더 불행한 것은 그가 꿈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포함되어 있는 요한복음 21장 3절에 보면 베드로는 이렇게 푸념하면서 독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서 처음으로 베드로를 만나주시고 그를 제자로 부르셨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주님의 이 말씀 앞에 베드로는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쫓아갔습니다.  물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의 변화, 그것은 분명히 비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하고 떠나갔던 베드로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시간은 거꾸로,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베드로의 이야기의 끝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여기에서 베드로의 인생이 끝났다면 베드로의 인생은 실패자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우리는 베드로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본문은 베드로의 좌절과 절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재기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베드로가 재기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을 부인하고 그 옛날의 삶의 터전이었던 바다로 돌아와서 다시금 고기를 잡으러 가는 순간 베드로는 스스로를 포기했습니다.  그의 미래를 포기했습니다.  그의 꿈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를 포기한 베드로였지만 그 베드로를 포기하지 못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베드로가 모른다고 부인하며 저주했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스스로를 포기한 베드로를 다시 일어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을 다시 만난 베드로는 다시 비전을 붙잡고 일어섭니다.  그리고 그는 훗날 위대한 순교자의 반열에 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 가운데 지나간 한 해에 내 꿈을 잃어버렸고, 내 삶이 좌절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베드로가 다시금 일어나는 은혜로운 삶의 현장에서 배워야 합니다.

스스로를 포기한 베드로를 다시 일어나게 해 주셨던 주님, 그 주님께서는 오늘 내 자신은 포기했을는지 몰라도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지 아니 하십니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일어나야 합니다.  꿈을 가져야 합니다.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붙잡고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다시 한번 우리의 비전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나 사명자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비전을 회복하고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확신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패한 사람에게 있어서 재기의 의욕을 빼앗는 가장 무서운 적이 있다면 그것은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냉소적인 시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혹은 무관심일 겁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더러는 관심을 갖지만 그러나 그것이 싸늘한 조롱과 냉소의 시선일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재기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실패하고 좌절했지만 내 곁에 나를 붙드는 따뜻한 사랑의 시선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에게 있어서 자기의 최대의 사랑은 주님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실패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쩌면 주님마저도 자신을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나 같은 제자를 우리 주님은 더 이상 상대하시지 않으실 거야, 주님은 나 같은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실 거야?'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면 베드로에게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첫째로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도망치고 있는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베드로를 향해서 변함없는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말로 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에게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과 배신한 베드로, 베드로의 타락 이후에 최초의 만남의 장면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주님은 바닷가에서 생선요리를 만들어놓고 자기를 저주하면서 부인했던 어리석은 제자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생선요리의 향연을 준비하고 제자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만났던 예수님의 첫마디 말씀이 무엇입니까?

제가 만약 예수님이라면 나를 배신한 제자를 만났을 때 저는 아마도 이런 이야기를 했을 것 같습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그렇지 않다면 '야! 너 무슨 이유로 나를 배신했니?' '내가 지난 3년 동안 너를 어떻게 했는데 네가 나를 배신하다니?  그럴 수 있는 거냐?'  최소한 그렇게 한 마디 정도는 따져 볼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첫 만남은 분명히 어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첫 마디 말씀이 무엇입니까?  베드로를 향한 다른 말씀은 없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춥지? 배고프지? 식사해.'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조반 먹은 후에 …'

본문 15절에 보면,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대화가 시작됩니다.  만약에 식사가 끝나기 전에 '너,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그랬으면 베드로는 분명히 소화불량에 걸렸을 겁니다.  생선 가시가 목에 턱 걸렸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기다리셨습니다.

조반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아직도 사랑하니?  이 말 속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 밑바탕에는 내가 너를 사랑한 것은 물론이고 내가 너와 더불어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네가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몇 번 물으셨습니까?  베드로는 세 자리 숫자에 대해서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왜요?  그가 세 번 주님을 부인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세 번씩 사랑을 확인하시는 주님과 대화를 하면서 베드로의 얼어붙은 가슴은 녹아 내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결론 앞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구나"

주님은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이 확신, 이것은 베드로가 일어날 수 있었던 동기였습니다.  그것은 베드로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 사명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는 힘이었습니다.

세상이 나를 버려도, 사람이 나를 버려도 그렇습니다.  나의 주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나를 향한 이 사랑을 믿는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안고 사명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서 보십시오.  그 사랑을 다시 확인해 보십시오.  만져 보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을 확신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나는, 우리는 다시금 일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충성된 제자로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다시 한번 비전을 붙들고 일어나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비전을 회복하고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나를 향한 주님의 기대를 확인해야만 합니다.

매우 일반적인 상식으로 말하자면 한번 내 기대를 져버린 내 제자, 나를 배신하고 떠나간 제자에게 더 이상 기대를 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습니다.  못난 제자 베드로에게 찾아와 변함없는 사랑을 확신시켜 주셨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를 향한 변함없는 기대를 확인시켜 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씩 물으신 후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새로운 과제를 주셨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내 어린양을 먹여달라고….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어부였던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 주셨던 과제는 어떤 의무였습니까?  나를 따라오라고,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  이것을 기독교적인 개념으로 말하자면 전도자의 사명입니다.  사람을 낚는다, 이것은 전도자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내 어린양을 먹여달라, 키워달라는 것은 목자의 사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도자의 사명과 목자의 사명 중에 어느 것이 더 힘들겠습니까?  어느 것이 더 어렵겠습니까?  전도해 보셨습니까?  전도한 사람을 키우고 양육해 보셨습니까?

그러면 쉽게 이야기를 바꾸어 말하겠습니다.  여자 분들이 대답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이를 낳는 것이 어렸습니까, 키우는 것이 어렵습니까?  저는 경험이 없지만 여자 분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어보면 속에 집어넣고 다닐 때가 더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키우는 것이 훨씬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훨씬 더 어려운 과제, 이제 내 어린양을 먹이고 키워 가는 목자의 사명을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처음 부르셨을 때 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사명을 주시고 있는 이 광경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실패 때문에 우리에게서 기대를 철회하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래서 하나님을 가리켜 하나님은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한번의 실패로 '나는 너하고 일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또 기회를 주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고 또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실패를 통해서 훌륭한 교훈을 배웠다고 판단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에게 더 높은 과제와 더 높은 소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실패했다고 우리를 버리시는 주님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더 높은 계획과 더 높은 사명과 더 높은 비전을 준비하셨다면 이제 그 주님 앞에 서서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새해의 길에 있어서 그 주님의 기대를 확인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비전을 회복하고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꿈이, 우리의 비전이 회복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의 보람찬 미래가 저절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붙잡게 될 그 비전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오늘 중요한 질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베드로에게 마지막 중요한 명령이 주어집니다.  19절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나를 따르라는 이 명령은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서 처음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를 만났을 때 주셨던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새로운 비전을 보게 하시면서 또 다시 명령을 주십니다.
"나를 따라오라고…"

그러나 따라갈 때 아마 주님은 다른 각오를 부탁하셨을 것입니다.  사실 나를 따라오라는 것은 주님이 처음에만, 그리고 마지막에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시시때때로 주님은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고….  우리가 흔들릴 때마다 주님은 그 말씀을 지금도 우리에게 주시고 계십니다.
"나를 따라오라고….  나만 따라오라고…"

베드로의 실패 직전에도 주님은 단단히 각오하고 기도하면서 따라오라고, 나를 따라오라고, 기도하지 않으면 사탄에게 넘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기억하십니까?  그때 베드로는 아주 당당하게 주님께 말합니다.
"주님,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저는 주님을 위해서 감옥에도 가고, 죽을 준비도 다 되어 있습니다"
아주 자신 만만하고 당당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베드로는 자신만만하게 넘어졌습니다.  철없던 베드로, 아직도 자기의 연약함을 알지 못하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달라진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었을 때 아마 실패 이전의 베드로라면 어떻게 대답을 했겠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했을 때에, "주님, 그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라고 당당하게 큰 소리로 대답했을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어떤 톤으로 말했을까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대답했을까요?  아니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쩔쩔 매면서 '제가 주님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시잖아요'라고 말했을까요?  아마 틀림없이 후자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자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더 겸손히 무릎을 끓고 주님을 의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겸손한 순종 앞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생애에 마지막에 펼쳐질 광경을 보여주십니다.  본문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여기에는 '젊어서는'이라는 단어와 '늙어서는'이라는 두 가지 대조적인 단어가 있습니다.  젊어서는 네 마음대로 다녔다. 네 충동대로, 네 본능대로, 네 느낌대로 네 마음대로 살았지, 마음대로 살다가 마음대로 넘어지고….  그러나 늙어서는 네 마음대로 살수 없도록 내가 네 인생 속에 들어가 너를 꽉 붙잡으마, 내가 억지로라도 붙잡으마, 그리고 네 인생의 마지막이 승리가 되도록 간섭할 것이다.

19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아시고 베드로의 마지막이 영광이기 위하여, 그 마지막이 승리이기 위하여 처음도 중요하고 과정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러분과 제가 인생을 끝내는 순간 그 마지막 결산이 영광이고 승리가 되기 위하여 내가 이제부터 강권적으로 간섭하마.  너, 그런 나에게 순종을 결단하고 나를 따라 올 수 있니?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런 각오로 나를 따라올 수가 있느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새로운 각오,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기꺼이 겸손히 주님의 능력을 의뢰하면서 따라가겠다는 이 각오와 결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제 베드로는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쓰셨습니다.  놀랍게 쓰셨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 달라지고 새로워진 베드로였지만 그에게는 또 하나의 장애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같은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본문 20절에 보면, 그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확인하고 소명을 받은 그 순간 그가 돌이켜보니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바로 요한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베드로에게 있어서 요한은 같은 갈릴리 어부 출신의 친구요 동역자였습니다.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주님으로부터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중요한 자리에는 언제나 예수님과 동행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들 두 사람은 성격 면에서도 비슷함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거니와 베드로의 성격은 급하고 불같았습니다.  그런데 요한도 마가복음 3장 17절에서와 같이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릴 만큼 성격이 불같았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부드럽고 온유한 성격으로 변해갔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끝까지 그 성격 하나 고치지를 못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금 모닥불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베드로는 모닥불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모닥불 앞에서 사랑하는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모닥불을 지나 주님이 고난 당하시는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자신은 주를 모른다고 부인하며 도망갔지만 요한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골고다 언덕까지 따라갔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알레르기와 같은 그 모닥불 앞에서 그 요한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가 요한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사명이 또 다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주님의 대답을 귀담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그렇습니다.  요한이 무슨 짓을 한들, 요한의 인생이 어떻게 된들 그것이 사명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베드로와 무슨 상관이라는 말입니까?  베드로는 오직 주만 바라보면서 달려가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어쩌면 너무 자주 주님이 아닌 다른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시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의 헌신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말입니다.  그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보면서 말입니다.  그의 믿음 없는 행동들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이 주신 사명을 붙잡고 저 천성을 향하여 달려가야 할 나와 무슨 상관이라는 말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가 무슨 짓을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만 따르라!'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성도들 가운데 게으름을 피우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보이십니까?  주를 위해서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싶은데 그 사람 때문에 낙심이 되십니까?  그만하십시오.  그는 그대로 가게하고 당신은 당신에게 주신 그 사명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게으름을 피우는 그 성도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주님입니까, 아니면 헌신하지 않는 그 사람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 없이 행동하는 그를 바라보고 힘들어하고 스스로 시험에 드는 어리석은 일은 이제 그만하십시오.  그를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불평과 원망과 짜증만 생깁니다.  결국에는 낙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내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걸어간다면 우리의 심령에는 기쁨과 감격과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삶의 열정이 불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영원한 천국에 갔을 때 나를 맞아주시고 내 머리에 면류관을 씌워주실 분은 그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의 믿음의 대상을 분명히 하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일하지 않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짜증만 내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그대로 가게 하고, 당신은 오직 주님만을 따라가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경영의 귀재이자 연매출 1천억 달러가 넘는 세계 최고의 기업 GE사의 '잭 웰치'는 비전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비전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미래를 키운다."

저는 이 말에 공감합니다.  그렇습니다.
"비전이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이 내일의 교회를 키운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비전이 무엇입니까?

째즈 음악가이며 작곡가이고 밴드 리더였던 '듀크 앨링톤'은 누군가가 리듬의 정의를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리듬을 가지고 있다면 정의를 내릴 필요가 없고, 리듬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어떤 정의도 도움이 안될 거요."

비전이란 무엇입니까?  엘링톤의 말을 인용해 보면 "만일 당신이 비전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이고,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내 가정과, 내 사업과, 직장과, 사랑하는 내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비전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분에게 '당신의 비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그는 분명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인식하십시오.  그리고 그 할 일을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그것이 비전을 붙잡고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야 할 사람이 취할 올바른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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