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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갈릴리를 영화롭게 (사 9:1-4, 고전 1:10-18, 마 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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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를 영화롭게 (사 9:1-4, 고전 1:10-18, 마 4:12-23)

1. 우리 사회에는 “모창가수”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성가수의 흉내를 내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생긴 모습도 비슷하지만 예명도 본 가수와 비슷하게 짓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통용이 됩니다. 그러나 이름과 노래를 무단으로 흉내 내던 한 사람은 처벌을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대개 선거 때 부르는 로고송들은 대중들이 잘 아는 노래 가사를 바꾸어서 불러서 후보자를 홍보합니다. 그 가운데 지난 대선 때 허황하기는 했어도 흥미를 불러일으킨 사람이 허 아무개라는 사람입니다. 그의 이력이나, 공약뿐만 아니라 노래도 “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되는 “새마을 노래” 가사를 바꾸어 불러서 흥미로운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선거법 위반으로 물의를 빚고 있기는 하나 각박한 선거 풍토에 재미를 주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찬송가 가사를 바꾸어서 그리스도인들을 풍자한 노래가 있습니다. 한번 들어보시고 여러분 자신을 그 거울에 비쳐보시기 바랍니다.

  “드라마 끝까지 보다가 지각 예배 / 스포츠 중계 보러 일찍 귀가 / 다음 주는 바캉스 떠나오니 오 주여, 해변으로 임하소서. 장로님의 기도 때는 낮잠 보충 / 목사님의 설교 때는 설교비판 / 하지만 축도는 받아야지 / ‘아멘’ 끝나자마자 서둘러 퇴장. 찬양대가 노래하면 실력 평가 / 안 가져온 헌금 찾아 뒤적뒤적 / 밥 먹을 땐 누가 볼까 눈만 껌벅 / 술 마시고 담배 필 땐 무신론자. 목사님이 몰라 준다 투덜투덜 /  보기 싫은 교인 있어 교회 바꿔 / 그래도 헌금은 꼬박꼬박 / 왜냐? 봉사하면 그대로 복 받을 테니.”

  오늘 일그러진 우리 모습을 풍자해 주고 있습니다. 대체로 우리가 물건을 말할 때 “진품”을 흉내 내서 만든 모조품을 “짝퉁”이라고 합니다. 우리 신앙에도 짝퉁이 있습니다. 겉모습이나 형식을 봐서는 신앙인인데 속을 뒤집어 보니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사회나 유대종교가 그랬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었습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했지만 행위로는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거리에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면서도 가난한 자의 머리에 티끌을 탐냈으며 과부의 가산을 통째로 집어 삼켰습니다. 밤낮 주님 오시기를 고대했으면서도 정작 주님이 오셨을 때 그들은 그 주님을 십자가로 내몰고 말았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바로 그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최근에 대형교회들이 끊임없이 내부 진통에 휩싸여서 허덕이는 모습이 그것이 아닙니까? 문제의 내막을 캐 들어가 보면 성경이나, 교리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헤게모니 쟁탈전이요, 물질과 관계된 문제요, 윤리적인 문제들입니다. 교회 안에 세상과 조금도 다름없는 행태가 벌어지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방법도 세상보다 더하면 더 했지 나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가 그랬습니다. 당시 고린도라고 하는 도시가 부패의 극치였었는데 그것이 그대로 여과 없이 교회로 흘러 들어와서 재연되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너희 중에 교회 문제 하나 해결할 사람이 없어서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느냐? 그보다는 차라리 형제에게 손해 보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본문은 바로 이런 현실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 분파가 생겼습니다.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그리스도 파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이방인 크리스천들은 이방인의 사도로 자처한 바울을 선호해서 교회 안에 자기들의 계파를 이루었습니다. 다소 보수적인 사람들인 유대인들은 정통성과 베드로의 권위를 내세워 또 다른 계파를 만들었습니다. 아볼로 파는 좀 더 진보적인 사람들로 형성되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고 우리야말로 가장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파라고 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 계파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객관적으로 볼 때 저들은 한결같이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이었습니다. 어느 계파도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독점적으로 가진 계파도 없었거니와 그리스도를 독점적으로 가질 수 있는 온전한 종파는 이 땅에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 합해도 주님을 온전히 나타내기에는 너무도 부족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서 하면 모두가 합심 협력해야 더 온전하게 되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사용된 “온전하다”는 말은 위골된 뼈를 맞추는 것을 말한다.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면 뼈가 위골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따르고 도무지 무슨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온전히 합해야할 절실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교회는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가 하나 되는 비결입니다.

2. 오늘 구약 본문인 이사야서는 “흑암 속에서 고통 받고 멸시를 당하던 갈릴 리가 큰 빛을 보게 되고, 창성하게 되고, 멍에가 깨어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이 넘치게 되리라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갈릴리이겠습니까? 우리가 잘 알듯이 갈릴리는 유대나라 북쪽 국경지역입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시작되는 소위 Kings high way가 통과하는 길목입니다. 그곳이 국경지대요 길목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외국의 침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말하자면 고난의 1번지입니다. 호남지방을 보면 홍수나 태풍도 맨 먼저 가장 많이 당하고, 폭설 피해도 그렇고, 또 작년 말에 기름유출로 대변되듯이 이런저런 시련의 1번지가 바로 호남지방입니다. 일제 때는 그 넓은 평야에서 거둬들이는 농산물을 통째로 수탈당해야 했습니다. 동학란의 본 고장이요, 광주 학생사건, 5.18민주화 운동 등이 한결같이 호남지방에서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갈릴리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항정신이 강했고, 끊임없이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문에 당시 로마통치자들은 정책적으로 갈릴리를 억압했습니다. 우리가 호남지역에 대한 인식이 많이 왜곡되어 있듯이 당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해서도 역시 그랬습니다. 니고데모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한 것도 이런 지역적 역사적 배경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갈릴리에 빛이 비치게 된다고 예언합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예언입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만 해도 갈릴리는 이방인 취급을 받았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갈릴리에 빛이 비친다고 하는 것은 정통 유대인들에게는 모욕인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오늘 교회 안에서는 이런 일이 없습니까? 옛날 신라시대처럼 교회 안에도 성골이 있고 진골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미국에는 소위 “WASP”라는 것이 있습니다. 미국사회의 주류를 일컫는 말입니다. “White, Anglo-Saxon, Protestant”를 말합니다. 이것이 사실은 미국 사회의 치부 아닙니까? 흑인을 비롯한 유색 인종이 차별받는 사회, 그래서 예수님도 결국 그들로부터 거부당하는 사회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동 사람들이 외지인들에게 지나치게 인색한 것도 어쩌면 이런 우월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늘진 현실을 고쳐주실 분이 누구이십니까? 이사야서 오늘 본문 바로 아래 나오는 말씀을 보면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한 아기”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원래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히브리인은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층을 말합니다. 소외계층, 억압받는 사람들을 히브리인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자기 백성을 내보내라고 요구할 때 맨 먼저 내 건 말씀이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억압하는 강자 바로에게서 억압받는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신 분이십니다. 오히려 당하던 그들을 구원해서 하나님의 선민으로 세우셔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마25:의 양과 염소 비유에서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옥에 갇힌 자, 병든 자” 즉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신 말씀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일을 두고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한 것은 이 땅의 불평등과 부당한 일들을 바로잡아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신 것을 말씀해 줍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이방의 갈릴리, 흑암과 그늘에 앉은 백성들에게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파를 해결해 주신 분이 주님이듯이, 오늘 우리 안에 있는 이런 저런 차별을 없애고 우리 모두를 다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실 분도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달리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님의 이 밝은 빛이 비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계시는 곳에 어떤 분쟁도,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샬롬의 사회요 희년의 성취입니다.

  왜 예수님은 사역의 효과를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지 않고 갈릴리에서 하셨습니까? 왜 예수님은 수많은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능력을 나타내어서 그들로 하여금 일시에 자기 앞에 무릎 꿇게 하지 않고 먼지 나는 갈릴리를 이 동네 저 동네 다니시면서 약하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까? 왜 예수님은 그 참혹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양 백 마리를 소유한 목자는 그냥 “100”이라는 숫자에 얽매이지 않고 한 마리, 한 마리를 개별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잃었다면 1/100입니다. 남은 99마리를 더 잘 지키기 위해서라면 잃은 한 마리쯤은 그냥 버려두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한 마리가 바로 나 자신입니다. 1/100로만 계산하면 나는 구원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한 마리 잃은 양으로 보셨기 때문에 목자는 그 들판을 찾아 헤맨 것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까지 대문 앞에서 눈이 빠지도록 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어리석음입니다. 이 어리석음이 우리에게는 구원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로움 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아니 이것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라고 찬탄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는 오늘 우리 사회의 물량적 가치관인 숫자 우상숭배에 빠질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 어리석음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지게 됩니다.

3. 어떤 사람이 사업에 실패해서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이 예수님을 믿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목에 걸고 다니는 십자가를 보여주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사람에게 종이 한 장을 주면서 앞면에는 잃어버린 것을 뒷면에는 아직 남아 있는 것을 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앞면에 “사업”이라고만 쓰고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뒷면에 “예수 그리스도”라고 써주었습니다. 그것을 보고난 그 사람은 비로소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글자 밑에 가족, 건강, 은총, 소망 등 아직도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수없이 써내려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앉고 있는 모든 문제, 개인의 문제, 가정의 문제, 교회의 문제, 국가 사회적으로 남북문제, 지역 문제, 계층간의 문제 등등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계시고, 십자가가 있는 곳에 빛이 비칩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그늘이 없어집니다. 주님은 갈릴리를 영화롭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바울처럼 “내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노라.”고 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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