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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향유(香油) (요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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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향유(香油) (요12:1)

"(요12: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요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자 중에 있더라 (요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요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요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12: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 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요12: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터어키의 반체제 영화감독인 일마즈 귀니가 옥중에서 원격 조종으로 제작했다는 <욜, YOL>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군사정권 하의 터어키 형무소에서 5명의 죄수가 5일간의 휴가를 떠나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영화에서 특별히 관심을 끈 사람은 세이트(Seyit)라는 죄수였습니다. 그는 출옥할 때 까지 자기를 기다리겠다고 했던 아내가 생활고 때문에 창녀가 되었다가 잡혀와서 쇠사슬에 매여 헛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 집으로 갑니다. 아내는 자신을 벌해 달라고 애걸하지만 세이트는 그녀가 자신의 명예를 더럽힌 만큼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자기의 명예가 손상되었다는 터어키 사회의 통념 때문에 아내를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딸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세이트의 장인은 혹시 사위가 마음이 약해져서 딸을 용서할까 봐 "신이여! 저를 용서하지 마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세이트는 아내의 운명을 신에게 맡길 것을 다짐하고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 넣기 위해 얇은 옷만 걸치게 한 후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들짐승이 들끓는 산 속에 내버려 두어 동사(凍死)하도록 합니다. 8개월의 유폐생활로 쇠약해진 아내가 얼어붙어 마비가 된 다리를 끌며 "세이트! 나를 버리지 말아요"라고 절규하는 마지막 소리에 명예보다 사랑이 중요함을 깨닫고 그녀를 구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지만 이미 아내는 죽은 후 였습니다. 서구 사회의 사고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가부장(家父長)적인 질서가 엄격한 터어키 사회로서는 종교가 곧 국적이며 법률이고 동시에 생활규범인 것입니다. 종교를 위해서 인간이 죽어야 하는 종교는 종교의 주인인 인간이 소외된 종교입니다.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이 생명력있게 살기 위한 것이지 종교를 살찌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삶을 생명력있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고, '생명' 그 자체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고전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인간의 존재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본문에 마리아가 노동자의 1년 임금에 해당되는 값비싼 나드 향유 한 병을 깨뜨려 예수께 부은 사건은 예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과 존경의 표시입니다. 마리아는 평소에 예수님의 교훈과 말씀에 항상 귀를 기울였으며(눅10:39),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훌륭한 스승으로 여겨왔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자신의 오라버니 나사로에게 부활 생명을 주신 기적과 축복을 인하여 자신이 소유한 최고의 것으로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과 존경을 표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오빠를 살려준 것에 대한 감사 이상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씻는 행위는 예수님께 대한 겸손과 헌신의 표현입니다. 엎드려 발을 씻는 행위는 자신을 최상으로 낮추는 표현입니다.

당시 손님의 발을 씻는 일은 노예가 주인에게 하는 일로 주인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고자 하는 구체적인 행위는 섬김으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요13: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요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요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요13: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마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참다운 사랑은 섬기기 위해 이처럼 자신을 대속물(代贖物), 희생의 제물로 내어 주는 것입니다. 단편 소설의 거장 오 헨리(O.Henry)가 쓴 <현자(賢者)의 선물>이라고 하는 감동적인 한 편의 소설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델라와 짐이라고 하는 젊은 미국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가난하였지마는 서로가 깊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기 한 가지 보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델라의 머리칼은 그녀의 영광이었습니다. 그 머리를 밑으로 내리면 그것은 마치 긴 드레스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짐은 아버지께로부터 이어받은 금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자랑이었습니다. 바로 크리스마스 전 날 델라는 짐에게 무엇인가 선물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분명히 1달러 87센트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을 했습니다. 즉 그녀는 밖으로 나아가서 20달러로 그녀의 머리를 팔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돈으로 그녀는 짐의 귀중한 시계를 위해서 백금 시계줄을 샀습니다. 짐은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델라의 깍인 머리를 보고는 정신나간 사람마냥 멍청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든가 또는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더욱 귀여웠던 것입니다. 짐은 천천히 자기의 선물을 그녀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의 선물은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를 위한 보석으로 가장자리를 수놓은 거북 껍질로 만든 값진 머리빗 한 세트였습니다. 그는 델라를 위하여 그 셋트를 사 주려고 자기의 금시계를 팔았습니다. 그 두 사람은 각기 자기가 갖고 있던 모든 것, 최상의 것을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향기(香氣)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전13:5) 사랑은....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창18:7)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창18:8)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창18: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창18: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의 이러한 행위 역시 그 사자(使者)들에게서 무엇을 바랬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을 대접하고자 했던 그의 헌신적인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과 번성의 축복을 사자(使者)들을 통해 다시 확증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이익을 바라고 헌신하거나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아무런 사심없이 하나님께 헌신할 때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전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여 섬기시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사랑과 헌신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사랑과 헌신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며 마음에 참 평안과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하나님의 축복도 아울러 받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러한 아름다운 사랑의 섬김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하시고 축복하시었습니다.

"(마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수를 은 30냥에 팔아먹을 가롯 유다는, "(요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면서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을 돈으로 계산하며 비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 사고 방식과 평가, 그리고 가롯 유다의 인본주의적인 사고 방식과 평가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시골 농가에 큰 마차가 잠시 머물게 되었습니다. 대도시로 물건을 팔러 가던 중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날 밤 짐마차를 끄는 말 주위에는 그 마을의 모든 가축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대도시를 수없이 다닌 말에게서 여러 가지 진귀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여왕이 살고 있는 궁전이었단다. 수 백 가지 종류의 꽃들로 장식된 정원, 수 많은 보석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옷들...." 그 말(馬)은 그 궁전의 아름다움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듯 도취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후로 단 한번도 이 마을을 나가본 적이 없는 가축들로서는 도무지 그 아름다움이 상상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그 자리에 남아 그 궁전에 대해 서로 상상한 바를 토론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한 바가 너무 달라서 도대체 궁전이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 두고 며칠을 의논한 결과 그들 중의 하나가 직접 궁전을 보고 오기로 하였습니다. 그 임무는 젊고 힘이 있는 고양이에게 맡겨졌습니다. "궁전을 샅샅이 살펴보고 와야 해." 화창한 어느 날 주위 가축들의 격려와 충고를 뒤로 하고 고양이는 궁전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 그 고양이는 궁전을 방문하고 의기양양하게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 마을의 모든 가축들은 환호로 그를 맞이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빙 둘러싼 채 무척 궁금한 표정으로 그의 얘기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그래, 궁전은 얼마나 아름답니?" "여왕은 만나봤어?" "..... " 쏟아지는 질문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고양이는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다만 여왕의 의자 밑에 있는 생쥐만을 보았을 따름입니다." 고양이는 그 아름다운 궁전에서 여왕이나 아름다운 물건을 보지 못하고 겨우 여왕의 의자 밑에 기어다니는 생쥐만을 보았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행위 속에서 참된 사랑과 헌신, 그리고 겸손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가롯 유다는 바로 이 고양이와 다를 바 없이 자신의 이익(생쥐)만을 탐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희생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쏟아 붓는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 속에서 복음을 위한 아름다운 헌신과 사랑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복음을 위한 성도들의 희생과 봉사 속에서 참된 사랑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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