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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혼 구원과 대사면의 차이점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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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구원과 대사면의 차이점 (눅 17:11-19)
   
    가끔 국가에서 대사면을 단행할 때가 있습니다. 국가의 권위로 너그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국민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 범법자들의 공로나 행실과는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그들의 죄를 사해주는 것, 이것이 대사면입니다. 저도 대사면의 혜택을 입은 적이 있습니다. 교통 범칙금, 이것을 사면 받은 적이 있는데 보통 대통령이 새로 취임할 때 선심을 베풀기 위해서 교통위반자들을 수백만 명을 사면해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번에도 새 대통령이 취임할 때 사면을 실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농담까지 있지 않습니까. ‘새로운 대통령이 될 때까지 범칙금을 내지 말고 질질 끌어라.’ 이것도 하나의 도덕적인 해저드라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도 하나의 대사면의 방편이 아닐까? 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의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다 벌을 줄 수 없고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인간은 죄인이고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유일한 방법이 하나님의 권한으로 모두의 죄를 사해주는 하나의 대사면의 방편으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닐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고 아무런 명분을 내세우지 않을 수 없으니까 예수님을 내세우기는 내세우는데 그것이 하나의 형식이고 결국은 다 죄사함을 받게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실제로 이런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가 있는데 미국에 가면 소위 만인구원론을 가르치는 universalist 교회, Unitarian 교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미국 동부에 가면 이런 교회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다보니까 결국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논리를 펴게 되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다보니까 예수님이 빠져버리는 그런 결론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굳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굳이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굳이 크리스챤이 되지 않아도 결국 하나님은 다 용서하실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로 시작한 것 같은데 결국은 예수님이 없는 종교가 돼 버리고 또 교회에 굳이 다닐 필요가 없다고 사람들을 가르치다 보니까 이것이 교회의 문을 닫게 만드는 그런 아주 엉뚱한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우리가 굳이 만인구원론 쪽으로 가지는 않더라도 예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엉뚱하게 해석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지 않은 그런 방법으로 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용서해 주실 것이 아니냐. 어차피 인간은 죄인인데.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의 죄를 정당화 하거나 변화를 거부하거나 심지어 회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아니지만 사람이 워낙 왜곡되다보니까 하나님의 의도와 다른 그런 이상한 결론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경건하게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자기의 죄를 정당화 하고 합리화 하는, 그래서 죄 속에 그대로 살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신용불량자 구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신용불량자가 이백 칠십만 명이 된다고 하는데 신용불량자를 구제하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그런 것을 악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멋대로 빚을 져 놓고는 나 몰라라, 국가가 책임져라 하고 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원래 국가의 의도와는 다른, 국가의 선한 뜻을 사람들이 악하게 사용하는 그런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소위 도덕 해저드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악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도 이와 같은 위험이 존재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이러한 위험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위험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구원을 받는다’, ‘내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자는 반석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지만 말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다.’ 그리고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에 ‘내가 율법을 폐하러 왔다고 하지 말라 내가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이루려 왔다 만일 너희 중에 지극히 작은 계명이라도 버리고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은혜 사이에서 이제는 율법이 아니고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믿는 우리에게 한 가지 걸리는, 좀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예수님의 말씀이 됩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마태가 그 구절을 기록할 때 당시 사도바울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도 그 당시 초대교회의 상당한 견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 유대인이 되고 그리고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 게 아니고 그들이 직접 예수님만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복음의 진리를 정립한 인물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진리가 되기 때문에 이것은 이방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유대인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의롭다함을 얻기 위하여 율법을 지킬 필요 없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면 유대인도 마찬가지가 아니냐. 예수님이 율법을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냐. 놀라운 결론이지요.

그런데 마태가 이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할 목적으로 마태복음을 쓸 때 뭔가 바울의 가르침을 견제할 목적으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내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이루려 함이라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율법의 한 획도 한 점 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리라’ 그리고 ‘이 작은 계명이라도 버리고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가장 작다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니라’ 이것이 어떤 교리적으로 균형을 잡을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사도의 말보다도 우선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사도, 어떤 선지자의 말보다도 우선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다만 예수님의 말씀 중에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이루려 오셨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완벽한 인생과 예수님의 순종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율법의 모든 요구가 성취되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결국은 인간이 이룰 수 없었던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이 대신 이루신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인간이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할지라도 예수님이 그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의 혜택을 입어서 의롭다 함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는 교리는 여전히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은 어떤 법이든 어떤 방침이든 간에 그 원래 의도와는 별개로 사람이 육신적으로 이기적으로 어떤 허점, 빈틈을 찾아내서 원래 의도와는 다른 엉뚱한 결과를 추구하는 속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 한 예가 우리나라가 지난 수십 년 동안에 별의 별 정책을 다 내놓고 그것으로 과외를 줄이고 사교육을 줄이려고 애썼지만 엄마들은 그보다 머리가 좋아서 어떤 교육방침이라도 어떤 대학입시 방법이라도 늘 어떤 허점 내지는 빈틈을 발견해서 엄마들이 훨씬 앞서갔다, 이렇게 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어떤 정책을 내놓지만 결국 그것이 사교육을 줄이겠느냐고 회의를 갖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다고 정부가 학부형들을 적으로 여기고 그들을 이기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정부의 역할은 좋은 백년대계의 정책을 만들어서 그것이 학생들에게도 유익하고 또 학부형들에게도 만족이 되어야 그것이 국가적으로도 유익한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사람과 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인과 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싸우신다면 하나님이 이깁니다. 그러나 죄인과 싸워서 이긴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죄인이 회개하는 것이고 탕자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탕자가 돌아와야 아버지가 기뻐합니다. 탕자가 망하는 것을 아버지가 기뻐하지 않습니다.

에스겔서 33장에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이라는 것은 결국 죄인이 돌아오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고, 잃어버린 양을 찾고, 잃어버린 동전을 찾고, 잃어버린 아들을 찾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지 그게 아니고 잃어버린 양을 영원히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동전을 못 찾았다, 탕자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잔치를 예비하고 계시고 그 잔치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앉기를 원하시는 것이지 잔치를 준비했는데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기뻐하지 않고 거기에 춤추는 소리 풍류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고독한 천국이 될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기쁨은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오는 것이고 열방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천사들이 기뻐하고 예수님이 기뻐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명절에 부모님 댁에 가서 어머니가 차린 음식을 먹고 그 자리에서 가족, 자식들이 모여서 웃고 기뻐하는 것이 어머니에게 기쁨이 되지요. 그게 아니고 ‘이번 설에는 어머님 편히 쉬시라고 저희가 안 가겠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에게 기쁨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수고를 많이 하더라도 자식들 손자들이 와서 그 음식을 먹어주고 기뻐하고 좋아해야 어머니에게도 즐거움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도 당신이 예비하신 천국 잔치에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주기를 기뻐하시고 하나님은 너그러우시고 하나님의 의도는 선한 것인데 왜 선한 것을 사랑을 사람들이 사랑으로 받지 못하고 선한 것으로 받지 못하고 선한 것에 선하게 응답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무관심하고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무시하거나 악용하거나 왜곡시키고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로막는지 이것은 인간의 가장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도덕적으로 연약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도 나쁜 일이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고 그것을 감사하지 못하고 거부하거나 아니면 왜곡시키는 그것은 더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고 성경에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여기에는 논란이 있습니다. 성령에 대해서 농담을 하면 그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냐?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농담을 하면 그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냐? 아니라고 봅니다. 결국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게 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마음이 완악해져서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예수님을 천대하게 되면 결국 그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성령으로 예수님을 믿게 함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게 하셨는데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면 그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금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얼마나 무서운 얘기입니까.

  그러니까 사람이 죄를 짓는 것도 나쁜 것이지만 주님의 죄사함의 길을 거부하는 것은 더 나쁜 죄가 된다는 얘기인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효력이 얼마만큼 있는지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얼마만큼 죄사함의 효력이 있을까? 요한복음 1장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신다고 했지요. 이론적으로는 온 세상이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5장에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것은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한 것인데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됐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다, 이 두 인물을 비교하게 되면 아담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죄인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똑같은 원리를 적용하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의인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면 굳이 거기에 어떤 교회를 다니라든가 기도를 하라든가 경건하게 살라든가 그런 조건이 없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 효험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되겠지만 그러나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은혜를 강조하다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하도 크니까 일단 그 효력을 받은 다음에는 ‘이제는 예수님 없이도 살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예수님, 예수님 하고 예수님에게 연연하지 않아도 그 은혜의 능력이 하도 크다보니까 이제는 예수님 없이도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천국에 가서 뵙겠습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하도 크니까 이것은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혜택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마음속에 두지 않고 굳이 예수님을 섬기지 않고 내가 굳이 크리스챤으로 살지 않아도 이미 그 은혜가 족하다… 이것이 복음의 허점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인데 오늘 본문의 사건이 그러한 면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멀리서 예수님께 소리쳤습니다. ‘예수 선생이여 우리를 긍휼이 여기소서’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고 깨끗함을 선포하십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래서 그들이 가는 도중에 열 명이 다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고개를 숙이고 사례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요지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지만 여기에는 많은 상징적인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뜻하는 것은 죄인입니다. 인간의 죄를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문둥병처럼 추하다는 뜻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있었다는 말은 열은 인간의 손가락의 숫자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열은 합계, 전부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열 명의 문둥병자가 있었다는 말은 죄인 전부를 뜻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긍휼을 구했을 때 열 명이 다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죄사함의 능력이 강력하고 이같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한 것은 -제사장은 율법을 뜻합니다-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킨다는 얘기입니다. 율법 앞에서 죄인이 의롭다 함을 얻게 하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제 예수님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끗함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돌아온다고 해서 더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고 떠나간다고 해서 도로 문둥병자가 되는 것도 아니에요. 예수님의 능력이 하도 크다보니까 이제는 예수님 없이도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것이 유혹이에요. 그들의 유혹은 예수님 없이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강한 유혹입니다. 그런데 열 명 중에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했습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그때 예수님 말씀이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다 깨끗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예수님 말씀 속에는 섭섭함이 깃들여 있습니다. 예수님이 섭섭해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섭섭해 하신다고 아홉 명이 도로 문둥병자가 되는 것은 아니에요. 예수님이 한 번 깨끗하게 하시면 영원히 유효합니다. 해병대와 같습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한 번 깨끗해지면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사람이 속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한번 깨끗하게 하시면 영원히 깨끗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깨끗함을 받은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사마리아 사람이 진짜 크리스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은 그냥 죄사함을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예수님께 돌아오고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이 진짜 크리스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주신 목적은 그저 어떤 도장처럼 우리의 죄를 사면하기 위한 도구로 보내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인류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노라’ 나머지 아홉 명은 율법 앞에서 깨끗함을 입었지만 이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이 친히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는지도 몰라요. 이것은 우리가 천국에서 여쭤봐야 될 그런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대사면과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용서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이냐? 그건 예수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널리 깨끗케 하셨습니다. 열 명 다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소수였고 그것을 예수님이 기뻐하셨고, 그것을 예수님은 믿음이라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여기에 참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된 신앙이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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