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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이여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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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이여 (마 5:1-12)

I. 제4의 복

인터넷상에 「마귀의 팔복」이란게 있습니다. 마귀의 산상보효 5:1-10입니다.

1. 마귀가 그를 따르는 무리를 보고 산에 올라가 앉으니 그의 추종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되
3. 세상 일에만 분주하여 예배하고 말씀 읽고 기도할 시간이 없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나의 종이 될 것임이요
4. 목사의 흠과 교회의 허물이 보이고 교회를 향하여 늘 원망 불평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될 것임이요
5. 부정적인 말과 이간질하는 말로 형제를 아프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그가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게 될 것임이요
6. 하나님의 일에 인색하여 헌신하지 않고, 헌금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 그들이 마귀의 비전으로 배부를 것임이요
7. 작은 일에 시험 들기를 좋아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그들이 결국 교회를 떠날 수 있게 될 것임이요
8. 상처로 그 심령이 더러워진 자는 복이 있나니 - 그가 마귀를 볼 것임이요
9. 파당 짓고 교회를 분쟁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그들이 마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악풀로 교회를 박해하고 비난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마귀의 왕국이 그들의 것임이로다.

마음이 아픈 일이지만 이런 일들이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Makarisman - 복 선언 말씀 중 네 번째 복 선언입니다. 팔복의 말씀은 천국을 향해 뻗어 있는 사닥다리와도 같고 산 밑에서 산 정상을 오르는 등산과도 같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문에 다다를 수가 있고 애통하는 자들에게 그 천국문이 열려지는가 하면 온유한 자는 천국 땅을 밟을 수가 있고 오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천국양식으로 배부르게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의 - 디카이오쉬네는 마태복음의 흐름을 이끌어 가는 중심개념입니다. 이미 그 개념이 예수님의 세례사건에서 등장되고 설명되어졌습니다. 팔복 가운데 제4의 복 본문 마태 5장 6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복 있도다. 아 놀랍고 놀랍다 복 있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아 하나님이 너희들을 배부르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단어를 이해할 때 똑같은 정의를 내려놓고서도 경험 여하에 따라 상당히 다른 개념으로 이해되어 질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할때 열 살 어린이가 이해하는 사랑과, 스무살 청년이 이해하는 사랑 그리고 쉰살 장년, 여든 노인이 이해하는 사랑엔 그 개념이 전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단어를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그 처절한 느낌을 오늘 우리가 모두 이해하기는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루에 먹고 남은 음식 찌거기만도 5톤 트럭으로 수 천대를 버리고 1년에 서울시 예산보다 더 많은 음식 찌거기와 쓰레기를 버리고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안될 수 있을 것입니다.

풍요로운 물질 문명 속에서 고기 맛이 없다고 투덜대고 언제든지 수도꼭지만 틀면 생수가 쏟아져 나오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린다는 말이 무엇인지, 목마르다는 말이 무엇인지 설명할 길이 막연하기까지 합니다.


II. 주리고, 목마름

그러나 예수님 당시 민중들은 배불리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며 목마를 때 쉽게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실감하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물이 귀한 나라입니다. 급수 시설이 안된 그 당시야 오죽 했겠습니까? 당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족하지 못한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경제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당시 팔레스틴 사람들의 일당은 80원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연간 수입은 우리돈으로 2만 8천원 정도밖에 안되었다고 합니다. 역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주후 70년경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저들은 너무 배가고파 자기 자식을 잡아 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입니까?

당시 주리고 목마름을 나타낸 한 그림이 있습니다. 설명하기가 좀 난처합니다만 한 노인이 젊은 여인의 젖을 빨고 있는 장면입니다. 흉측스럽기까지 합니다만 사실인즉, 노인은 아버지였고 젊은 여인은 딸인데 그 딸은 굶주려 죽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젖을 먹여 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설명을 듣고 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그림입니다.

진실로 배고파 보지 못하고 목말라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정경입니다.

성경의 시인들과 예언자들은 이 목마름을 비유할 때 흔히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는 것처럼"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사슴은 평상시엔 조용하고 점잖은 동물입니다. 그러나 한번 목이 말라 물을 찾기 시작하면 온갖 몸부림을 하며 바락바락 소리를 지른다고 합니다. 히브리어에서 갈망을 "아락"이라고 하는데 우리말의 바락 바락과 느낌이 같습니다.

인간이 가진 수많은 욕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강렬한 욕구가 목마름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와 배고픔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이 음식과 음료는 사치품이 아니라 생활필수품입니다. 이것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생존과 관계된 것들입니다.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내게 영적인 목마름과 배고픔이 있다!
이것은 영혼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시체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모릅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은 갈급함이 없습니다. 내 영혼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알고 사모하는 마음 - 이것이 영적 주림과 목마름입니다.

배고픔을 느낀다고 하는 것은 내 영혼이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병들고 나면 입맛이 없어집니다. 그러다가 건강이 회복되기 시작하면 뭔가 자꾸 먹고 싶어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이 병들면 갑자기 영적인 관심이 적어집니다. 설교를 들어도 재미가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싶은 목마른 마음이 없습니다. 기도하고 싶은 열정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영적인 회복이 찾아오면 예배에 대한 그리움이 용솟음쳐 오릅니다. 갈증과 배고픔을 느낍니다. 설교를 듣지 않고는 살수가 없습니다. 들어도 들어도 또 듣고 싶어집니다. 기도하고 나도 또 모자란 것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섬겨도 또 섬기고 싶어집니다. 주림과 목마름에 허덕이게 됩니다. 세상 모든 일을 영적인 문제와 연결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내 영혼이 살아나면 이렇게 됩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고대 헬라어에서 숨은 목적격이 있었습니다. 목적격이 주리고 목마른데 얼마만큼 목이 마른지 아니면 어디에 목이 마른지 목적이 없습니다.

우선은 큰 우물에서 목마른 내 목을 적시기 위한 물 한 컵이 필요하고, 빵공장에서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한 빵 몇 조각이 필요하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목이 마르다고 한 바케스를 마실 수는 없지요. 배가 고프다고 밥을 한 드럼통을 먹을 수는 없지요. 그 많은 것들 가운데 내게 필요한 부분의 주리고 목 마른 것 - 이런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고대 원문에는 이런 뜻이 아닙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전체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빵 공장 전체를 갈망할 수 있습니다. 왜요? 근원적인 문제의 해결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주리고 목마른 것을 해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나를 통해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도 이 갈망에서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헬라어 단어는 후자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리고 목 마르다는 말은 헬라어 문법적으로 하나님을 통째로 원하고 온전한 구원을 열망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우물을 주세요. 하나님,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예수님 양식을 주세요. 구원의 일부분이 아닌 온전한 구원을 주세요."하는 참된 열망을 가진자는 참으로 복되도다고 선언하는 겁니다. 이게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III. What - 의란?

그러면 우리가 그토록 사모해야 할 의가 무엇입니까? 한자로는 "옳을 義"자를 쓰고 있습니다. 저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기준은 애매하고 모호합니다.

북한 공산세계 속에서의 義가 자유세계에서는 義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반대로 여기서의 義가 북한 사회에서는 반동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의"는 인간이 생각하는 옳고 바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과 표준에서 본 의를 말합니다. 마태복음에 "의"란 낱말이 7회 정도 나오는데 마태 신학의 핵심이라고 말씀드렸지요.

타락한 인간에겐 본질적으로 의가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이에 한걸음 더 나아가 사도바울은 자기가 지금까지 의롭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 앞에서는 걸레조각과 같고 배설물과 같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3:7-8)

사도 바울 신학에서 의는 "디카이오쉬네"(의) 아니라 "디카이운"(칭의) - justify입니다. 내가 완전히 의로운 존재로 바뀌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일컬어 주면 내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디카이오쉬네에서 디카이운으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정과 용납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것 입니다.

예수님의 용서 -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것이 의입니다.
하나님의 인정 -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것이 의입니다.

IV. 모순 - 극복

하나님 자신이 의라면 그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가 복되다는 겁니다. 불의한 자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없는 자가 불의한 자입니다.

그러나 잠시 잠깐만 현실로 눈을 돌려 살펴보면 이 땅에는 의로운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악한 사람이 오히려 성공하고 잘사는 모순을 많이 보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오히려 진실하게 살고 정직하고 의롭게 사는 것이 어리석게까지 느껴집니다. 악한자가 승리하고 불의한 자가 잘되는 것을 보면 우리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회의와 유혹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항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째서 의인이 고난을 받으며 악인이 흥하느냐고요?"

공자의 제자 중에 자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날 그가 증자라는 다른 제자와 얘기를 나눈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자하가 몹시 만족한 모습을 하자 증자가 묻습니다. 무슨 그런 신나는 일이 있느냐고? 자하가 대답하길 "큰 싸움에서 이겼다고" "아니 언제 무슨 그리 큰 싸움이 있었습니까?" 자하가 자세히 대답을 했습니다. "아니 글쎄 성현들의 글에는 분명히 의로운 사람이 잘되고 불의한 사람은 망한다고 되어 있는데 세상에 나가보니 반대로 불의한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의로운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질 않겠소. 책을 믿어야 할는지 세상을 믿어야 할는지 두 마음이 오랫동안 싸움을 했는데 결국 책을 믿기로 했소. 이것이 승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하박국 선지자도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이 모순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압니다. 악인의 형통은 돼지의 번성이나 아침에 핀 꽃과 같아서 잠시 이기는 것처럼 보이나 궁극적으로 심판을 받고 멸망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아아 살리라"
주어, 동사는 "의인은 살리라"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는 수식어입니다. 이것을 부사로 볼 것인가 형용사로 볼 것인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사로 이해하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이 살리라를 꾸미는 것입니다. 형용사로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 의인을 꾸미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부사로 해석을 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경가들은 신구약 성경에 비취어 볼 때 형용사로 사용하는게 더 옳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옳고 더 쉽습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이란 말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말은 같은 말입니다.

세상에서 형통할 때 내 잘나서 잘되는 줄 압니다. 모든 일이 잘될 때 내가 똑똑해서 내가 성공해서 열심히 일해서 모든 것이 형통하는 줄 아는 것 이게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난 것이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혜였군요. 이게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세상 살다가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해가 안되고 용납이 안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건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하나님의 의는 나타난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나타난다.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사는 것"입니다. 이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형통할 때 교만하지 않고 어려움이 있을 때에 비굴하지 않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의 삶의 자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십시요. 나사렛 예수의 처절한 실패와 불의한 자들의 멋진 승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요. 로마 병정이 이겼습니까? 가롯 유다가 이겼습니까? 제사장 무리들이 이겼습니까? 역사는 나사렛 예수의 승리를 명명백백하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과 현실이 모순으로 만날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돌리는 역사의 맷돌은 비록 천천히 돌아가지만 정확하게 돌아갑니다. 의가 이깁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된 존재입니다.
V. 관계로서의 의

신학적으로 보면 의란 바른 관계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사는 것이 의입니다.
사람들과 바른 관계로 사는 것이 의입니다. 물질과 바른 관계로 사는게 의라는 것이지요.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은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영광과 존귀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셨습니다. 모든 삶의 목적이 그분에게 있습니다.

인간은 사랑의 대상입니다. 목적입니다. 섬김의 대상입니다.
물질은 이용가치입니다. 편리의 문제입니다. 이용은 쓰는 것입니다.

타락하고 나니까 뒤죽박죽이 되는 것입니다. 영광 받고 예배 받아야 될 하나님이 나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들 사람이 목적이 되고 사랑이 되어야 하는데 그들을 이용합니다. 그들을 짓밟습니다. 인격을 손상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이용가치 편리의 문제 등 물질이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물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바른 관계 이것이 불의라는 것입니다.

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돌아오고나니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랑스러워집니다. 깨어졌던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질관계가 회복되어집니다. 나를 위해서는 아낄 줄 압니다. 나를 위해서는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아깝지 않게, 교회 공동체 영광의 회복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물질에 목적을 알고 여유있게 쓸 수 있는 삶의 자세로 가는 것입니다. 이게 물질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의가 회복되지 않으면 이것은 불가능해 집니다. 왜? 물질이 목적인데, 물질이 우상인데, 하나님이 나를 도와야지, 사람들을 이용해서라도 내가 성공해야지, 사람들을 짓밟아서라도 내가 높아져야지.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의가 깨진 것입니다.
VI. 사모하는 자가 복되다

문제는 세상에 의로운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때문에 본문은 "의로운 자는 복되다"하시지 않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되다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이 못되어도 의를 갈망하는 자가 복됩니다. 다만 배고파하고 목말라 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로를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의를 사기 위해 돈뭉치를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목마르고 배고픈 심령으로 나오라 하십니다.

여러분이 이 류목사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저에게 음식값을 지불할 돈을 가져오기를 기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왕성한 식욕만 가지고 오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친히 의를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목말라 사모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 짓기를 원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열왕기상 8장 18절에 보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목말라 사모하는 마음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를 배고파 사모하는 심령을 기뻐하십니다. 의를 사모하는 마음 자체가 복된 것입니다.

왜요? 세상적으로 보면 모든 환경이 불행할 수밖에 없고 원망밖에 나올 것이 없으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에서 보면 무엇하나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모든 조건 하나 하나를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게 됩니다. 옷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떻습니까? 집이 크면 어떻고 작으면 어떻습니까? 배웠으면 어떻고 못 배웠으면 어떻습니까? 구원받고 살아있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세상 것으로 가득차 헛배가 부른 사람! 위장에 바람이 가득찬 사람들! 의를 사모하는 대신 세상적인 대용품을 붙들고 만족해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감사하며 살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제 잘나서 사는 줄로 압니다. 자기가 똑똑해서 이만큼 된 줄로 압니다. 그것은 심판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이것이 곧 불의입니다.


여러분! 건강 잃어 울고, 장사 안돼 울고, 사업 망해 울고, 실패해서 울어 보았지만 - 하나님의 의를 사모해서 울어 보셨습니까? 다윗처럼 성전이 그리워 울어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복된 존재입니다. "복되구나. 너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니"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VII. 배부를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이 복 선언 역시 미래 수동태, 신적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 거룩한 수동태엔 늘 당연한 주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배부르게 해 주실 거라고 약속합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가 처음 배가 고팠을 때는 돼지 쥐엄 열매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배가 고팠을 때는 아버지를 찾아 왔습니다. 아버지를 찾아 왔을 때 모든 풍성한 것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배부름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배부르다는 "코르타제스다이"라는 헬라어는 양적으론 다시는 안 먹어도 될만큼 먹이는 것을 말합니다. 질적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는 완전한 만족을 말합니다. 이러한 만족과 배부름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복음서 기자들의 외침입니다.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내가 배 부른다는 것입니다. 배 부르려면 먹여주는 사람 즉, 주어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주어가 숨어 있는 수동태이기 때문에 거룩한 수동태라 부릅니다.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는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는 깊은 공백이 있습니다. 이 세상 것으로는 배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수동태 -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배부르게 해 주실 수 있다는 강력한 약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만이 나를 만족케 하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위로가 되시고, 하나님만이 천국의 땅을 주시고, 하나님만이 천국양식으로 배부르게 먹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 배가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우주보다 배가 더 큽니다. 서울을 다 가지면 만족할 것 같아요? 대한민국을 통째로 가져보면, 대통령이 되면 만족이 있을 것 같아요? 우주를 가져도 만족이 없습니다. 왜요? 우리 인간의 배가 우주 보다 더 큽니다. 그러면 우주보다 더 큰 실제를 가슴속에 넣으면 됩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거룩한 수동태를 쓴 것입니다. 나만이 너를 배부르게 할 수 있다. 네가 나를 그리워할때만이 너는 만족할 수 있다. 나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만족과 쉼을 얻기 전까지 우리는 참으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싶은 사람들, 예수 먹고 싶은 사람들, 성령으로 목마름을 해결하고 싶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복이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배부르게 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이 충만히 이 시간에 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신령한 은혜로 넘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삶을 살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형통하든지 고난 가운데 있든지 감사함으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애매한 말씀으로 저 구름에나 떠 다니는 말씀으로 여겨진다면 아직도 믿음이 멀은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손에 잡혀야 됩니다. 이 복이 내 복이구나! 감탄하셔야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여러분들은 참 복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배부르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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