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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에 붙잡혀 사는 사람 (눅 1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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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붙잡혀 사는 사람 (눅 17:5-10)

미국의 한 남자가 침례교 목사를 찾아가서 자기 애완견의 장례식을 집도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는 짜증을 내며"개 장례식은 할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남자가 섭섭해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유감입니다. 장례식이 끝나면 오천 달러 헌금을 하려고 했는데......"목사는 이 말에 웃으며"애완견이 침례 교인이라는 걸 진작 말씀하셨어야죠. 자, 얼른 장례식을 시작합시다."하더랍니다. 남자의 믿음을 칭찬해야 하는 것인지, 헌금한다는 말에 반색을 하는 목사의 욕심을 흉봐야하는지 모를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실 헌금이니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고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교회에 바치는 것이니까 목사 개인의 것이 아니라고 봤을 때 투철한 목회 정신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만 하여간 그랬다는 유머입니다.

[토마스 그룸]이라는 기독교 교육학자는 믿음을 세단계로 말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인지적 차원에서의 신앙>을 말합니다. 이것은 내가 믿는 대상을 내가 깨달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비추어주시는 빛 안에서 또 인격과 인격의 만남 속에서 깨달음이 점점 커집니다. 좀 더 깨닫고 좀 더 알게 됩니다. 그래서 좀 더 확실하게 사랑을 알게 되고 능력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알게 되고 하나님 안에 있는 나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점점 깨달아 나가면서 그것이 믿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신뢰적 차원에서의 신앙>입니다. 아는 것에서 이제는 믿어지고 신뢰가 갑니다. 처음에는 깨닫고 그 다음에는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믿어지고 믿음이 가면서 평안합니다. 그래서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를 의지합니다. 정서적으로 이런 신뢰적 차원에서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행동으로 나타나는 신앙>입니다. 의지적으로 믿어지니까 행동합니다. 믿어진다는 것이 내 삶에 힘과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그 용기대로 그 믿음대로 행동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을 가만히 생각해보면서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 피곤하고 지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왜 이렇게 지쳤습니까? 바로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살려고 하지 않는 남편에게 신뢰가 무너졌습니다. 그런가하면 열심히 살아가는데도 무슨 뾰족한 변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못 믿겠어요. 그래서 지쳤습니다. 그 누구도 믿지를 못하고 아무에게도 믿음이 안갑니다. 무슨 말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신뢰를 잃었으니 용기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다. 믿음이 갑니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왠지 신뢰가 가요. 그 사람에게 생각하지 않았던 신뢰가 생깁니다. 그래서 소망도 있습니다. 이것 저 것 다해 볼 용기도 생깁니다. 보세요. 믿음이 생길 때 용기도 창의력도 발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과 인격, 그 만남의 관계에서 신뢰보다 더 중요한 게 없습니다. 믿음은 곧 생명력으로 삶의 용기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깨달아지고, 믿어지고, 행해지는 믿음의 단계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을 따라가게 될 때 무슨 마음으로 따랐을까요? 첫 동기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세속적 메시아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고 예수님을 맞아들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에 완전히 점령되고 경제 정치 문화 종교 할 것 없이 전부 타락하고 눈에 보이는 것 전부다 죄악뿐입니다. 그래 성경을 읽으면서 메시아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옛날 다윗 왕 때처럼, 솔로몬 왕 때의 영광처럼 그런 메시아의 나라가 빨리 이 땅에 오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훗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힘없이 돌아가실 때 큰 실망을 했었지요. 그리고 부활한 다음에도 또 붙들고 물어봅니다."나라에 임하실 때가 이때입니까?"그걸 보면 끈질기게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메시아의 시대에 대한 기대가 있었고 그것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였다고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처음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들은 생각이 바뀝니다. 간절히 바랐던 그 처음 동기가 바뀝니다.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은 이 신앙의 동기가 바뀌고 또 발전되어야 합니다. 신앙에는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위를 보면 처음에는 병 고침 받기 위해 예수 믿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해서 답답해서 예수 믿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들을 낳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여기 저기 온갖 잡다한 데는 다 돌아다니다가 누가 말하기를"예수 믿으면 아들 낳는다더라."그 심정이야 이해가 갑니다만 이게 예수 믿게 된 동기입니다.

어쨌든 여러분 모두의 마음속에도 동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동기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면서 성경을 이해하면서 믿음을 가지기 시작할 때 이 동기가 변화됩니다. 그래서 오늘 제자들 보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가르침을 받고 주님의 생활을 보면서 예수님을 권능의 사람, 능력의 사람으로 만나게 되면서 동기가 바뀌게 됩니다. 그 변화 된 제자들이 오늘 본문에 보면 오로지 하나의 소원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5절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이것은 처음부터 가졌던 생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해서 변화된 제자의 모습으로서의 소원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저들이 깨달은 것은 믿음이 문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칩니다.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오천 명을 먹이는 능력을 행합니다. 그럴 때마다 거기에 작용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믿음을 경험하면서 그들의 신앙동기도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보세요. 제자들이 비로소 믿음에 대해 눈을 뜨고 그것이 신앙을 변화시키는 동기가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 설명하십니다. 6절입니다."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믿음의 소중함을 강조하시는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그러시면서 어떡해야 믿음을 키울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유감스럽게도 믿음을 가졌다가 믿음에 손해를 보고 믿음에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아무리 오래 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도 스스로 상처 받는 데는 잠깐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비유로 대답하십니다."종이 있는데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저녁에 돌아왔을 때 종이 수고했다고 해서 사례하겠느냐? 먼저 먹으라 하겠느냐?"는 질문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종은 여전히 종입니다. 마땅히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이지 그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나는 무익한 종일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르고 충성된 종의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바로 그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자랍니다. 바치겠다고 하는 마음이 생겼다가 받고자 하는 마음이 되어버리고, 수고하겠다고 하다가 또 칭찬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 버립니다. 이렇게 생각이 바뀌니까 믿음도 쏟아지는 겁니다. 처음부터"나는 종입니다. 섬기는 자입니다."라는 동기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절대로 시험에도 들지 않고 상처도 입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출발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반드시 출발이 잘못되었다고 마지막까지 잘못 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출발이 시원찮았더라도 바뀌면 됩니다. 그 동기가 변화 되어야 믿음이 자랍니다. 매일 잘못된 그 신앙동기로 살아봤댔자 늘 불평이고 불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몇 십 년을 믿었다고는 하지만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이 살아가는데 거기에 무슨 능력이 있겠으며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믿음이란'거기까지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가는 날까지 변화되고, 나아지고, 성장하고 성숙해야하는 것입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리더십전문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존 맥스웰]은<인재경영의 법칙>이라는 책에서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말하면서 아주 의미 있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사람이 변화를 주도하려면<온도계>이기보다는<자동온도조절장치>가 되어야한다고 했습니다. 두 가지가 온도를 측정하는 기구라는 공통점은 있습니다만 이 둘의 기능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온도계는 수동적입니다. 그래서 주위 환경의 온도를 측정하고 기록은 하지만 그 환경을 변화시키는 데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온도계가 온도를 올리고 내리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미 변화된 온도를 가르쳐 줄뿐입니다. 반면 자동온도조절장치는 능동적입니다. 환경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미리 알아냅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변화를 주도합니다. 주위의 온도가 차가우면 자동으로 작동하여 온도를 올립니다. 뜨거우면 온도를 내립니다. 환경을 마음대로 조절하는 것이 자동온도조절장치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이란 온도계가 아니라 자동온도조절장치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야 쉬지 않고, 멈추지 않고 성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일을 잘해내면 일하는 데 가속도가 붙게 됩니다. 이 가속도라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간단한 물리학의 원리 하나를 생각해봅니다. 물은 섭씨 100도가 되어야 끓습니다. 99.5도가 되었을 때의 물은 그냥 뜨거운 물에 불과 합니다. 겨우 0.5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차이가 아무리 열을 가해도 끓지 않는 물과 주전자 안에서 부글부글 힘 있게 끓는 물의 차이입니다. 증기를 만들어 내고 수백 톤의 기관차를 움직이는 엄청난 힘의 원천이 됩니다. 이 작은 차이가 바로 가속도의 차이입니다. 믿음에 붙잡혀 사는 사람은 멈추지 않습니다. 쉬지 않습니다. 믿음의 성숙을 위해 가속도를 얻어 날마다 전진하는 사람입니다. 전도에도, 봉사에도, 기도에도 가속도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는 나를 거듭나게 하시고,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기도응답도 믿고 하나님의 경륜을 믿습니다. 그 경륜 안에서 현실을 해석할 줄 아는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을 믿을 뿐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사랑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습니다. 내 삶 그 자체에 사명이 있음을 믿기 때문에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도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오직 한 가지 기도는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하나님 믿음을 주십시오. 믿음을 더해주십시오. 믿음을 키워주십시오. 믿음을 온전케 해주십시오. 내가 하나님 앞에 가는 날까지 믿음에 붙잡혀 살게 해 주십시오. 이것만이 소원입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현실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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