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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일성수 잘 하고 계십니까? (골 2: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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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성수 잘 하고 계십니까? (골 2:16,17)

금년 1월에는 신앙의 기본에 대하여 자주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를 본 받는 교회’라는 목표를 영구적인 목표로 삼는다고 할 때 2008년도에 그리스도를 닮는 구체적인 실천 목표는 ‘말씀과 기도로 주께 더 가까이’ 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분의 가르침과 삶을 본 받아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그분을 본받을 수 있을까요? 

지난 해에는 ‘한 영혼을 귀하게’라는 목표였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한 사람의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 오셨으며 세상에서 소망 없이 사는 죄인들의 참 소망이 되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아 한 사람,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고 함께 구원의 기쁨을 나누며 살자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본 받아 그분의 길을 따르는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발견하며 그 길을 따라 사는 우리는 영혼의 호흡이라 할 수 있는 기도를 통해 주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삽니다.  ‘말씀과 기도의 삶’ 이것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그분을 본 받아 사는 실천목표가 됩니다.  그래서 2008년을 시작하는 첫 주 일부터 신앙의 기본에 대하여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으며 ‘말씀과 기도로 주께 더 가까이’를 금년도 우리교회의 목표로 삼고자 합니다. 

지난 번 설교에서 ‘안식일의 주인’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제7일에는 모든 일을 멈추고 그날을 구별하여 거룩한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십계명의 제4계명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명하신 그 날은 하나님의 안식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의 창조사역을 완성하시고 제칠 일에 쉬신 것처럼 사람들도 하나님의 안식일을 존중히 여겨 육일 동안 열심히 살다가 그날에 일손을 멈추고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몸과 마음의 쉼을 가지며 우리를 지으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구별된 날로 삼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유대인들이 지키던 구약의 안식일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종살이 하던 삶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종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손으로 해방이 되어 자유인이 되었음을 기억하고 그 집의 주인이나 종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안식일에는 일손을 멈추고 안식하라 하셨습니다.  제 칠일 안식을 통해 새 힘을 충전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아보게 하셨고, 매 7년마다 안식년을 지키게 하셨으며, 그 일곱 번의 안식년 다음에 오는 50년을 희년으로 선포하여 그 해에는 땅과 종들과 빚진 자들에게 생명과 회복과 자유를 베푸는 더 큰 안식을 실천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안식일 계명은 창조사역의 완성 그리고 억눌림과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이 큰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그 행하심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그날을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안식일로 지킬 책임과 안식의 특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날을 귀히 여기고 순종하여 살면 하나님의 복이 그들과 함께 하였지만 이 날을 소홀히 여기고 사람의 사사로운 욕심과 무지함으로 함부로 범할 때 하나님께서는 엄한 벌로 다스리셨습니다.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것은 곧 계명을 주신 하나님을 멸시하며 거역하는 범죄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안식일 전통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계속하여 지켜지면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실 즈음에 이스라엘의 종교법은 대단히 세분화 되고 형식화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 규칙을 지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히 율법학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제4계명 안식일 규칙을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하고 또 거기에 세부적인 지침을 달아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무려 234개 조항이나 만들어 놓기도 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식일은 하나님 앞에서 편히 쉬는 날이 아니라 학자들과 종교인들이 만들어 놓은 엄한 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는 부담스런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와 안식을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 자유를 어렵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율법에 정통하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형식과 습관에 굳어져서 안식일의 정신과 본질을 다 잊어버리고 오직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한 율법의 틀에 집착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려고 안식일에 일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시기와 미움으로 가득하여 이웃을 고발할 증거를 찾았으며 안식일에 선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감시하고 질책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랑의 정신을 상실해 버린 율법의 빡빡한 틀보다는 그 본래의 정신을 생각하여 안식일에 배고픈 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도우셨고, 한 손이 말라 비틀어진 사람을 고쳐주셨으며, 중풍병자가 걷고 소경이 눈을 뜨도록 해주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며 ‘나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하신 주님의 말씀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오늘 골로새서 2장16절, 17절을 읽었습니다.  바울은 구약의 율법의 정신과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해 준 사도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껍데기만 붙들고 그 속 중심은 깨닫지 못했던 외식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살던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모두 완성하시고 우리에게 참 자유와 안식을 주신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율법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심지어 유대교에서 개종한 기독교인들 중에도 아직 구약의 법에 매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반쪽만 받아들이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선택 받은 유대인이라는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무시하는가 하면 자기들은 율법이 정한 깨끗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사는데 이방인들은 먹고 마시는 음식에도 부정하고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다고 정죄하였습니다.  이런 판단과 정죄하는 일이 한 공동체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된 그리스도인들끼리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방인에게는 없는 육체적 전통을 내세우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누구든지 먹고 마시는 일과 절기나 초승달이 뜨는 날의 축제인 월삭이나 안식일 때문에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지 마십시오. 이것들은 단지 앞으로 올 일의 그림자일 뿐이며 그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구약에 명한 안식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이 되고 우리에게는 자유함이 은혜의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거룩한 성도가 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제정자이며 동시에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로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그 부활의 날, 승리의 날을 ‘주의 날’이라 부르며 매 주일마다 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사랑의 떡을 떼며 그 날을 기념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년에 한 번 기념하는 부활주일만이 주님의 날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지키고 있는 주일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념하고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어떤 이들은 로마시대에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면서 로마 사람들이 섬기던 태양신 축제일 Sunday를 기독교의 예배일로 바꾸었을 뿐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Sunday에 모이는 기독교의 예배일은 성경적이지 않고 이교도적인 풍습이라 여기고 자신들은 여전히 구약의 제 칠일 안식일을 거룩한 날로 지키며, 예수님의 재림도 제칠일 안식일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소위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또는 ‘안식교’라는 종파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Sunday에 모이는 주일예배는 로마시대 교회가 주일로 공포하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과 성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날을 기념하던 것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날은 율법이 말하는 제칠일 안식일의 참 정신과 뜻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의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날을 일요일이라 부르지 않고 ‘주일’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구원만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여겨 아직도 구약의 율법이 말하는 것을 추가해야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늘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지적한 것처럼 여전히 율법에 매인 유대주의 기독교인들과 같은 맥락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이 완전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결정적인 문제점이 어디 있는지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이심을 확신하지 못하는 셈이 되고 맙니다.

로마서 14장5절-10절을 함께 찾아봅시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갈라디아서 4:9-11을 봅시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

갈 5:1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종의 멍에로부터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는데 또 다시 그 종의 멍에를 메려고 힘쓰는 것은 그것을 통해 스스로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와 의식에 의존하는 모순된 믿음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하셨으니 이제 우리가 주 안에서 누릴 안식은 나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인가 아닌가 여기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살면서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나에게 기쁨과 감사가 된다면 내 삶에 진정한 평안과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제목인 ‘주일성수 잘하고 계십니까?’라는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이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어느 정도 감이 잡히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주일성수입니다.  물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 중 우선적인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그랬고 신약의 성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안식일이든 주일이든 이 날의 생명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찬양입니다.  주일에 해야 할 일이 예배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우선되고 급한 것이 또 있겠습니까?

  금년에 신앙의 기본, 기초에 대해 강조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신앙의 기본이 잘되는 성도로 힘쓰시기 바랍니다.  기초가 부실하고 기본이 없이는 모래 위에 세우는 누각과 같아서 큰 바람이나 비가 닥치면 언젠가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주일에 여러분은 어떤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시겠습니까?  예배는 꼭 주일에만 드려야 하는 의식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신 육일은 마지막 날 칠일에 비해 거룩하지 않은 속된 날이라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날들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으니 칠일에만 거룩하게 살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부활의 날 주일만 거룩한 날, 승리의 날 또는 복된 날이 아니고 나머지 날들도 동일한 주님의 날입니다.  다만 일주일 동안 하던 일을 멈추고 하루를 구별하여 그 날에 모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이 사랑으로 교제하며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날이 오늘의 주일입니다.  주일 외에 나머지 날에는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터이니 맘대로 살다가 주일에만 교회 와서 예배 드리고 다른 날보다 경건하게 지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무를 다했다고 허락하신 것도 아닙니다.  주일이 거룩하고 복된 날이면 다른 날들도 역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날들입니다. 

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성도로서 사는 것이 주일성수의 기본 자세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안식일을 지키지 않지만 안식일의 정신은 이어받아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생명을 나누는 풍성한 교제와 그리스도를 세워가는 축제의 주일을 지킵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킨다고 하여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신 제4계명이 폐기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으로 안식이 완성되었으니 곧 주의 날로 계승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일의 내용과 정신을 잊어버린 채 지킨다면 일년 52주 성수주일을 잘 할지라도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주님을 고발하고 비난했지만 주님은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고 약한 자들을 돌아보시고 불쌍히 여기며 사랑을 나누셨습니다.  여러분은 주일을 이런 날로 삼아 지키고 있습니까?  형제와 자매를 긍휼히 여기고 위로를 나누며 곤란에 처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삶입니까?  아니면 미움과 분노로 형제를 심판하고 정죄하는데 이 귀한 날을 사용하십니까?  만일 주일에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고 있다면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주일 하루 동안 내가 하는 행동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하다는 양심의 울림이 있으면 거기서 더 나가지 말고 멈추시기 바랍니다.  양심을 어기면서까지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한다면 그것은 주일을 성수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시다.  나의 양심에 꺼려 주일에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것은 평일에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6일 동안은 어떻게 살아도 무슨 일을 해도 좋지만 주일만은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주일은 물론 평일에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참된 성수주일의 정신입니다.  주일만 거룩한 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년 52주일 한 번도 결석하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참 귀한 일이지만 그것이 주일 성수의 전부가 아닙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 받을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여 이른 아침 예배시간을 만들어 참석하여 오늘 주일 성수했다고 스스로 위안을 받고 예배가 끝난 후에는 나머지 시간은 어떤 일을 해도 괜찮다고 여기며 내 욕심과 쾌락에 끌려 산다면 주일의 정신을 망각한 형식주의가 되어 주님께 칭찬받기보다는 외식주의자라는 책망을 들을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형식만 남고 속 알맹이는 없는 율법주의자일 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주일성수를 힘쓰려 했던 저희 가정의 분위기는 보수신앙의 장로교 목사 가정으로서 상당히 엄격했습니다.  주일에는 빨래도 하지 않았고 학교 공부도 하지 않고 돈을 사용하지도 않고 사사로운 오락도 금했습니다.  대신 하루 종일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집에 오면 성경을 읽거나 휴식을 했습니다.  집안 어른들이 예고 없이 주일에 저희 집을 방문하시면 어머니가 주일에 시장을 볼 수 없으니 특별한 반찬이 없이 그날 있는 반찬으로 대접해 드렸습니다.  믿지 않는 어른들은 목사 집에서 너무 한다고 섭섭해 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주일 성수를 잘 하는 길은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배웠으며 그렇게 살려고 힘썼습니다.  이것이 모두 옳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습관에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너무 엄격하다 보니 제대로 지키지 못할 때 죄책감에 빠지고 자유가 없이 형식에 치우치고 피곤한 주일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어른 세대가 그 만큼 주일을 구별된 날로 여겨 경건하게 지키려고 힘썼던 주일성수 전통이 한국 교회에 끼친 귀한 영향도 참 많습니다.  이것을 무조건 율법주의나 형식주의로 쉽게 비판해버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주일에 예배 드리는 일 외에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일에는 몸도 마음도 휴식을 가져야 합니다.  한 주간의 일로부터의 자유가 필요합니다.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담소하고 산보를 하며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나누며 즐길 수 있습니다.  이웃과 교제를 할 수도 있습니다.  급한 환자는 병원을 찾으며 휴식을 가져야 합니다.  몸이 너무 아파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 걸린 위급한 일을 만나면 교회로 오다가도 먼저 위급한 일을 처리할 수도 있습니다.  주일이 포함된 여행이나 출장을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 아침이 되면 먼저 무엇을 마음에 두십니까?  오늘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합니까?  가까운 교회를 찾아 예배 드리는 그런 마음 자세가 되어 있습니까?  여행은 이 다음에 다시 할 기회가 있지만 오늘의 예배는 나의 일생에 마지막 예배일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주일을 맞이한다면 주일에 무엇을 해야 할지 우리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습니다. 주일성수라는 엄한 규칙에 매여 우리에게 이런 자유조차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자유함이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거나 형제의 자유와 양심을 침해하는 방종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갈5:13-15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 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주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은혜의 선물로 주셨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나의 쾌락과 방종을 위해 허비하라고 주신 자유는 아닙니다.  믿음이 약한 형제의 양심과 신앙을 해치면서 나의 자유를 누리라고 주신 것도 아닙니다.  주일을 잘 지키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 받아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부활하신 주님을 마음껏 찬양합시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 하루를 구별하여 모이기를 힘쓰며, 주께서 나에게 주신 귀한 생명을 이웃과 나누는 풍성한 교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일에 함께 모여 피차 위로를 나누며 새 힘을 공급받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강하게 세워가는 기쁨의 날 복된 주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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