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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하고 가르치라 (딤전 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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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하고 가르치라 (딤전 4:11~16)

미국의 오하이오주 교회에 평생을 교회학교 교사로 섬긴 '니믹스'(Neemix) 라는 노교사가 있었습니다. 그곳에 이사한 그는 교회를 찾아가 교회학교 교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담임목사는 '맡길 반이 없으니 스스로 전도해서 반을 만들라' 고 합니다. 주일 아침 길에서 놀고 있는 세 아이를 발견한 그는 자신의 반이 되어달라고 아이들에게 부탁합니다. 아이들은 흔쾌히 대답합니다. 이를 시작으로 니믹스는 교회학교 교사생활을 평생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세 아이는 성인이 된 후에도 니믹스의 생일이면 꼭 축하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인도 선교사인 '챨스 콘웨이'(Charles Conway)이며, 또 한 사람은 29대 대통령이 된 하딩(W. Harding)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대통령 특별보좌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타락한다 해도 교회만 타락하지 않으면 희망이 있습니다. 모두가 타락한다고 해도 믿는 이들이 타락하지 않는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교사들만 소명의식으로 깨어 있으면 희망이 있습니다. 역사는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교회의 부흥도 소명의식을 가진 성도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은 30세 생일날, "나는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나이가 되었다. 더 이상은 어린아이 같은 짓과 헛된 일을 하지 말자.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며 살게 하소서!" 라고 일기에 기록하였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 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목에 힘을 주며 경건하게 걷는 모습을 의미합니까? 바울은 디모데의 연소함을 본이 되는 삶으로 보완하라고 권면합니다. 권위는 외부적인 치장이나 연령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가르침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 정절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의 말은 공개적 설교만 아니라 사적인 대화까지 포함됩니다. 행실은 다른 사람과 관계되는 행동을 말합니다. 특히 사랑과 믿음, 정절은 그리스도인의 내면적 성품입니다. 젊은 사람이라도 말과 행실과 성품이 본이 되면 누구도 무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연로하다 해도 말과 행실, 성품이 본이 안되면 업신여김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사들은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배우는 학생들에게 바른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영향을 주는 교육이 되기를 원한다면 교사들은 본이 되어야 합니다. 백 번의 교육을 잘 시켰다해도 한번의 잘못된 행동이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말로 하는 교육보다 본을 보이는 교육을 하는 교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과 믿음의 모범으로 감화를 끼쳐야 합니다. 가르침보다 행함이 앞서야 합니다. 가르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행하는 일입니다. 누구에게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먼저 행하고 가르쳐야 합니까?

첫째로 말씀에 착념하라

하프타임(Half Time)의 저자인 밥 뷰포드(Bob buford)의 말입니다. "어떤 종류의 단체를 이끌고 있든지 간에 리더는 끊임없이 자신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리더를 따르는 사람들은 변화되지만, 리더 혼자만 전통주의와 선입관에 빠져 뒤로 처지게 됩니다."

본문 13절입니다.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그 다음에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여기의 '착념하라' 는 것는 '우선을 두라' 는 뜻입니다. 성경을 읽는 일을 우선하라는 것입니다. 교사들이 배우지 않고 가르치기만 하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의 '가르치다' 의 원어는 '라마드' 입니다. 그런데 '가르치다(to teach)' 라는 뜻만 아니라 '배우다(to learn)' 의 뜻도 있습니다. 먼저 배우는 교사가 되라는 것입니다. 가르치기 전에 먼저 배우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배우는 일에 목마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읽는 일에 둔감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먼저 배우고 가르치는 교사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가르치는 일보다는 성경을 읽는 일에 먼저 착념하라고 권합니다. 그 역시 로마 감옥에서 인생을 마칠 순간에 이르자 디모데에게 부탁합니다. 딤후 4장 13절입니다.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바울은 죽는 순간까지 말씀을 읽는 일에 착념하며 본을 보인 것입니다. 렘브란트는 '옥중의 바울' 이란 그림에서 성경을 무릎에 놓고, 펜을 손가락 사이에 낀 바울을 묘사한 것도 배우는 일에 착념한 바울을 그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배우는 일에 우선하는 교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전력을 다하라

1950년 베를린 대학의 피아노 교수로 유명했던 '헐만' (Herman)은 나치즘에 반대하던 인물입니다. 이 일로 그는 강제수용소에 갇혀 하루종일 힘든 노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나무 침대를 건반 삼아 피아노 연습을 한 시간씩 하였습니다. 소리도 나지 않는 건반을 두드리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반드시 다시 피아노를 연주할 것이다." 후에 그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연주곡목들은 그때 한없이 반복되었으며, 수용소 연주장에서 밤마다 공연되었습니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귀에는 아름다운 곡들이 쟁쟁히 울렸던 것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여기의 '전심전력' 에 해당하는 헬라어 '멜레타오' 는 사명을 위해 항상 준비하고 연구하라는 뜻입니다. 최선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무슨 일이든 전심전력하는 자만이 진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사성어 중에 '괄목상대' (刮目相對)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을 비비고 상대방을 본다' 는 의미입니다. 오랜만에 상대를 보니 발전하고 성장하여 전혀 다른 사람 같아 다시 본다는 뜻입니다. 진보가 나타나지 않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진보를 나타내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진보를 나타내야 합니다. 사명을 가진 교사들은 더더욱 성숙에 대해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교사의 믿음이 성숙해질 때 학생의 믿음도 성숙합니다. 교사의 믿음이 성숙한 분량만큼 학생의 믿음도 성숙하기 때문입니다. 성숙은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것은 성숙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진보와 성숙을 위해 힘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성숙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과감하게 제해 버리시기 바랍니다. 성숙한 믿음의 증거를 보여 책임을 다하는 교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구원을 보이라

2차 세계대전중 영국의 어린 병사가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군목은 그의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서 유언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목사님, 어머니에게 전해주세요. 이 아들은 고통이 없이 죽었다고." 잠시 후에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그가 다시 말합니다. "목사님, 부탁이 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학교 선생님을 만나 꼭 전해주세요. 편안하게 눈을 감도록 가르쳐주신 선생님께 감사를 드리더라고." 군목은 유언에 따라 교회학교 선생님을 어렵게 찾았습니다. 그리고 죽어가던 병사의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교사는 눈물만 흘리더니 이렇게 말을 합니다. "지금은 교회학교 교사가 아닙니다. 교사라는 직분이 대단치 않게 생각되어 그만 두었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유언을 들으며 다시 결심했습니다. 이번 주부터 다시 교회학교로 돌아가 교사로 봉사하겠습니다." 교사의 일을 소중하게 생각치 않기에, 바쁘다는 핑계로 혹 힘들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교사를 중단합니다. 그러나 영혼을 책임지는 교사임을 알게 될 때 이보다 중요한 일이 세상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영혼을 위하여 가르치는 일은 복된 일입니다. 자신도 구원할 뿐 아니라 가르치는 영혼까지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을 주님 앞에 인도하는 일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인한 기쁨보다 훨씬 더 기쁘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교사 직책에 대한 영적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사의 직책이 참으로 영광스러운 직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사의 사명에 대한 가치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20세 때부터 교사의 직책을 맡아 감당하던 권사님이 80세 생신을 맞이하였습니다. 예배시간에 목사님은 "권사님,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라고 말씀합니다. 권사님이 일어나시자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우리 교회에서 권사님에게 배우셨던 사람은 자리에서 다 일어나 주십시오." 그랬더니 절반 가량의 성도들이 일어납니다. 목사님은 말씀합니다. "이 교회는 내가 키운 교회가 아니라 권사님께서 키운 교회입니다. 처녀 때부터 한결같이 봉사하셨기에 여러분 같은 신앙의 자녀들을 두신 것입니다. 오늘 권사님께서 80세 생일을 맞으셨습니다. 모두 권사님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시며 간절히 기도할 때 권사님은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이런 교사가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하는 일에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치 있는 일이기에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변화시켰고 영적으로 변화된 제자들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교사는 섬기고 봉사하는 직책입니다. 교사가 된 것은 사람이 인정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주님이 인정해 주시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상급이나 인정이 있을 때에야 만족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미련들을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교사의 사명은 주님이 맡기신 직분인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이 충성 되이 여기시어 맡기신 것입니다. 사람이 맡긴 것이 아니라 주님이 충성되이 보시고 맡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확신이 없다면 교사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디 말씀을 배우는 일에 우선하는 교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전심전력을 다하는 교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귀한 사명을 가진 교사임을 명심하고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신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여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교사와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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