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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묵은 물동이를 버립시다! (요 4: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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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물동이를 버립시다! (요 4:27∼30) 

지난 금요일 교회학교 아동부인 손모군의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가 굳이 손지호라고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이 손모군의 어머니 김모 집사님이 저에게 전화를 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우리 아들이 궁금한 것이 있다는데 대신 설명을 좀 해 주세요"  그래서 제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손모군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있잖아요.  어떤 교회에는 비둘기가 성령님인데 우리 교회는 왜 독수리입니까?"
손모군의 질문에 제가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있잖아.  원래 성경에서는 성령님을 상징할 때 비둘기를 이야기한단다."
"근데 왜 우리 교회는 독수린데요?"
"그것은 말이야, 강력하고 힘차게 움직이는 성령님의 모습을 상징하기 위해서 독수리를 나타냈단다.  구약 성경 이사야에 보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고, 달려가도 피곤하지 않고 지치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거든"
저의 이 말에 손모군이 갑자기 제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현희는 자던데요?"
도무지 엉뚱한 질문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는지 당황했습니다.
"무슨 말이니?"
"아니 피곤하지 않고 지치지 않는다면서요?"
"그렇지"
"근데 이현희는 자던데요?"
"아냐?  현희는 안 자"
"아니예요.  맨날 앉아서 잤어요"
제가 더 이상 대답을 하는 것이 어려워서 엄마를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했습니다.
"아니 집사님, 지호 말뜻이 뭐예요?
그러면 이현희가 성령을 못 받았다는 겁니까?
잠을 자면 성령을 못 받았다는 겁니까?"
저의 이 질문에 손모 어머니인 김모 집사님도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내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남다른 거룩한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하심과 역사를 체험하려고 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돕고 있으면 가는 길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붙여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사람을 붙여주지 않습니다.  무턱대고 사람을 도와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도와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잘 믿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잘 믿으십시오.  제대로 잘 믿으십시오.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종교놀이는 그만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왕 믿어야 할 신앙이라면 확실하게 믿으십시오.  뜨겁게 믿으십시오.  분명하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셔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시대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축복을 받았던 사람들은 늘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남다른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평생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려는 거룩한 소원을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거룩한 욕심을 가지십시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한 생애를 살아갈 때에 내가 정직하게 살아도,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원하지 않는 환경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오직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어려움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길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험난한 고난과 고통이 와도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이 복입니다.  아무리 대궐 같은 집에서 살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이어도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저주입니다.  기적을 일으킨 하나님의 사람들이 붙들었던 믿음의 공통점은 시간마다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끝까지 성령을 의지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 거룩한 것에 취한 사람, 하나님의 예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철저하게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시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역사를 사모하십시오.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사모하겠다는 이 마음이 변하면 안됩니다.  변치 말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셔야 합니다.  변치 말고 성령님을 의지하셔야 합니다.  아십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민족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과 한 이름 없는 여인과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성경은 그녀가 누구의 딸이었는지, 그녀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지, 그리고 그녀의 교육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여자 분들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구약 시대와 예수님 당시의 여자는 자기 정체성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자신의 이름조차도 불리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수넴 여인, 사르밧 과부, 가나안 여인처럼 지명을 따서 이름을 불렀습니다.  마치 옛날 우리네 할머니들이 부산댁, 서산댁으로 불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여자라고 다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라, 리브가, 한나, 마리아 등 성경 속에는 많은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문에 나타나는 이 여인의 경우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여인의 부끄러운 과거는 오히려 철저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이름도 없다면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도 가리워졌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 여인은 과거에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해서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여인은 철저하게 타락한, 간음죄를 범한 과거가 더러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고 했지만, 그것은 남편들과 사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추악하고 올바르지 못한 행실 때문에 그녀를 버렸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여인의 과거는 그렇게 아름답지가 못합니다.  깨끗하지가 못합니다.

이런 과거가 있는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본문에서는 그녀가 물을 길러온 때가 제 육시쯤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제 육시는 우리 시간으로 정오 열두 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곳은 사막 지대라는 점입니다.  때문에 당시 유대 풍속으로는 저녁때라야 부인들이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이런 낮 시간에, 그것도 햇볕이 가장 뜨겁게 내리쬐는 이 시간에는 물을 길러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이 여인은 깨끗지 못한 과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녀야만 했습니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며 살았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이제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고 어느 누구도 이 여인과 상대하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사람들의 외출이 뜸한 한 낮을 골라, 사막의 햇볕이 강하게 내리 쬐는 시간에 혼자서 쓸쓸히 물을 길러 나왔던 것입니다.  그것도 될 수 있는 한 많은 물을 길어 갈려고 몸부림을 쳤을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저런 자신의 문제를 놓고 몸부림치고 있는 이 여인, 찢겨진 과거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 여인에게 주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여인의 상처 나고 찢겨진 아픈 과거를 끄집어내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너라"  예수님의 이 요구에 여인은 상당히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 그녀의 삶의 내용이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대답을 합니다.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그 대답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말이 옳도다, 네게는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니라"  짤막한 대화에서 이 여인의 숨겨져 있던 생활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다 드러납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자신의 아픈 과거를 들추어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이 취한 행동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자신의 과거를 들추어 낼 때, 이 여인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부인하려고 하지를 않고 그대로 시인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이 여인이 펄쩍 뛰면서 '웬 사람잡을 소리냐?'고 잡아떼었더라면, 그날 예수님과의 만남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앞에 서는 성도의 자세가 바로 이러해야만 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사람, 주님을 만나는 사람에게 이름이 없으면 어떻고, 부끄럽고 상처난 과거가 드러나면 또 어떻습니까?  그날 예수님을 만나 다섯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 여인은 일평생 어두운 그늘에 묻혀 살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솔직하게 시인합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과거를 주님 앞에 다 드러내고 고백하였던 이 여인의 변화된 모습을 보십시오.  근심과 괴로움의 여인이 기쁨이 넘치는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눈물과 절망의 여인이 소망이 넘치는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좇아 쾌락을 추구하던 여인이 영생을 추구하는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남들처럼 든든한 가정도 없고, 이웃도 없고, 거기에다 다른 사람들이 물을 길러오지 않는 이 폭염의 시간에 혼자서 와야만 하는 기구한 여인을 보십시오.  그런데 이 여인이 변했습니다.  이 여인에게서 위대한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서 참된 변화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해야 바르게 변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삶의 방향과 질이 달라진 것이 참된 변화입니다.  참으로 기구한 인생을 살아왔던 이 여인은 이제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그의 삶의 방향과 질이 달라진 이 여인이 취한 행동을 보십시오.  본문 28절을 여러분께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지금까지 육신적인 만족으로 살아보려고 본능적인 쾌락을 추구했지만 행복을 찾지 못했습니다.  물을 길으려고 왔지만 그 물은 먹어도 먹어도 내 갈급한 심령은 해결해 주지를 못했습니다.  이 여인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여인은 자신이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며 부둥켜안고 살아왔던 물동이를 과감하게 던져버렸습니다.  지금처럼 상수도시설이 없었던 당시의 생활에서 물동이는 참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물동이가 없으면 물을 길어다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물동이는 식수 수단이요 생활 수단입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지금까지 부둥켜안고 살아왔던 그 물동이를 버렸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미우나 고우나 붙들고 살아왔던 그 물동이를 미련 없이 던져 버렸던 것은 지금 이 여인 앞에는 더 좋고, 더 귀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그렇게도 갈망해 왔던 인생의 모든 문제가 주님 앞에서 완전히 해결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께서도 어렸을 적에 해 보셨을 겁니다마는, 어린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모래 퍼서 밥 만들고, 풀잎 잘라 반찬 만들어 노는 소꿉장난을 합니다.  그런데 그 소꿉장난이 끝나고 이제 진짜 밥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면 아이들은 모래밭에 그것들을 그냥 그대로 버려 두고 갑니다.  그 밥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더 좋은 것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진짜 밥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까지 죄에 파묻혀 살면서 여섯 명씩이나 남자를 바꿔가며 소꿉장난 같은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생활은 언제나 고독한 것이었습니다.  허무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거듭났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부둥켜안고 살아왔던 묵은 물동이를 미련 없이 던져 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묵은 물동이가 그녀의 삶에 있어서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이 여인에게 있어서 묵은 물동이는 세상의 정욕으로 가득찬 물동이였습니다.

옛날 그 당시에는 신분이 높은 여인들은 물을 길러 다니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여인은 날마다 우물가에 물을 길러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것도 불볕 더위가 심한 대낮에 말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그녀는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아무도 오지 않는 그 시각에 혼자서 외롭게 무거운 물동이를 들고 우물가에 나와야만 했습니까?

우리는 본문의 여러 정황을 살펴보건대, 그녀가 이 시간에 물을 길러 나와야만 했던 이유를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녀가 이 시간에 우물에 나온 것은, 또 다른 어떤 남자를 찾기 위함이었을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 시간에 우물에 오는 사람은 양떼를 치는 목동들이거나 아니면 길가는 나그네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의 이 남자가 아닌 또 다른 저 남자를 찾아 쾌락을 얻기 위해서 태양이 이글거리는 한낮에 우물가로 나온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녀는 지금까지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여인의 남편이 다섯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남편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원인은 두 가지일 것입니다.  그것은 그녀의 품행이 올바르지를 못해서 보다 못한 남편들이 그녀를 버리고 떠나갔던가, 아니면 바람난 그녀가 남편을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녀에게 있어서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원인이 어디에 있었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은 이 여인은 자기의 정욕을 따라서 마음대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욕을 따라서, 육체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마음내키는 대로 살아가면 어쩌면 그 순간만큼은 좋게 보일지런도 모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런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존재로 느껴질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꿀발림 된 독약과 같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꿀발림이 된 독약을 아십니까?  처음에 입에 댈 때에는 달고 맛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삼키게 되면 죽습니다.  세상의 정욕을 따라 마음내키는 대로 방탕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처음에는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의 결국은 비참해지고야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도 처음에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섯 명의 남편이 떠나갔습니다.  이웃도 떠나갔습니다.  오직 그녀에게는 세상 정욕의 상징물인 묵은 물동이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육체적인 욕구를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 육체적인 정욕에 자신을 내던지게 되면 영적인 욕구를 전적으로 무시해 버리게 됩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게 됩니다.

가인이 그러했습니다.  가인은 질투의 정욕에 사로잡히게 되니까 사랑하고 보살펴주어야 할 동생을 질투한 나머지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 땅에서 방황하는 저주받은 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사울은 권력의 정욕에 사로잡혀서 사위인 다윗을 질투하게 됩니다.  겸손하였던 그가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결국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온 집안이 길보아 전투에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굶주렸을 때에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목이 마르게 되면 물을 마셔야 한다는 것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영적으로 주리고 목마를 때에 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은 왜 모르고 있는 것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육신의 갈증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영혼의 갈증입니다.  영혼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십시오.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결코 육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이 잘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범사에 더 잘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의 정욕을 따라 마음내키는 대로 살아왔던 이 여인은 지금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지금 자신이 영적으로 매우 주리고 목마른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날마다 이 우물에 물을 길러 나왔지만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내 영혼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영혼의 갈증은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더 많은 물을 떠 갈려고 애를 썼지만 그 갈증은 더욱 강하게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생명수 되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 앞에 선 이 여인의 간절한 소원을 여러분은 들어보시겠습니까?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그리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앞에 선 이 여인은 자신이 그렇게도 소중히 여겼던 그 물동이를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그 기쁨을 가슴에 안고 지금까지 담을 쌓고 살아왔던 이웃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생명수 되는 주님을 만났던 이 여인, 분명 그녀의 삶은 변했습니다.  아름답게 변했습니다.  멋있게 변했습니다.  세상의 근심과 걱정과 괴로움에 가득찬 묵은 물동이를 내던지게 되니까 인생의 모든 문제가 순식간에 다 해결되었습니다.  구원의 손길이 이 여인에게도 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것을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베풀었던 그 기쁨의 은혜를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똑같은 사랑으로 베푸시기를 원하는데 우리가 이것을 체험하지 못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근심과 괴로움과 정욕에 차득 찬 묵은 물동이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여인이 정욕의 상징물이었던 묵은 물동이를 버렸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결단코 영생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묵은 물동이를 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삶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던져 버리십시오.  이 여인이 정욕으로 가득 찬 묵은 물동이를 던져 버렸던 것처럼 세상의 욕심 때문에 꽉 붙잡고 살아왔던 그 묵은 물동이를 미련 없이 던져 버리십시오.  그 순간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이 내 속에서 강같이 철철 넘쳐흐를 것입니다.  이 은혜, 이 역사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이 여인에게 있어서 묵은 물동이는 너와 나를 비교하던 편견으로 가득 찬 물동이였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이 여인은 철저하게 비교하는 편견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피곤하여 우물가에 앉아서 쉬시는데 마침 이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 여인은 주님께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본문 9절 말씀을 여러분께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너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시면서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며 자신의 과거를 들추어내니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20절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포로에서 귀환한 이후 주전 400년경에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워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이 산이 참 예배의 장소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심지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곳과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난 곳도 이 산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나는 유대인이고 너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이라고 말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나는 사마리아인이고 당신은 유대인이요, 또 당신과 내가 예배할 곳은 다르지 않느냐고 비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여인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여인이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 있어서 편견된 생각으로 너와 나를 비교하려고 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진취적인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나와 너, 환경과 환경을 서로 빗대어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발전적이지를 못합니다.  그 사람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비교하기를 좋아하고 과거에 얽매이는 사람은 그 스스로가 왜소해집니다.  옹졸해 지고, 초라해집니다.  비참해집니다.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남의 잘잘못을 찾아내어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를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을 찾아내는데 더 열심이더라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과거에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은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 명의 전남편들이 왜 이 여인을 버려 두고 떠나갔을까?  저는 본문을 대하면서 나름대로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러나 보다 궁극적인 이유는 그릇된 편견을 가지고 남을 비교하는 그 소리에 질려서 떠나갔을 것입니다.

아무개의 남편은 어떠 어떠한데 당신이라는 사람은 무엇하는 사람이냐?  아무개의 남편은 밍크 코트도 해주었다는데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느냐? 며 허구한날 비교하며 들볶는데 견뎌낼 장사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첫째 남편은 떠나갔습니다.  후에 만났던 또 다른 남편도 떠나갔습니다.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렇게 편견과 아집과 걸핏하면 남을 비교하기를 좋아했던 그 여인이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변해도 너무 변했습니다.  비교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듬직한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은 가지고 왔던 물동이를 내팽개치고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이웃과 담을 쌓고 살아왔던 그녀가 편견과 아집과 비교의 묵은 물동이를 던져버리니까 그 스스로 이웃 속으로 달려들어가는 삶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우리들 중에도 편협된 생각으로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 어쩌면 이 사람, 저 사람을 비교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비난도, 정죄함도, 남을 판단도 하지 말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아랍 나라의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대에게 잘못한 일이 떠오르거든 모래 위에 적어두고, 그대에게 좋은 일이 생각날 때는 대리석에다 기록하라."

저는 이 속담을 이렇게 풀어보고 싶습니다.
"형제에게 어떤 잘못된 단점이 떠오르거든 모래 위에 적어두고, 형제에게 좋은 점이 생각날 때에는 대리석에다 기록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남을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비교할 자격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죄인이 어떻게 남을 비난하고 비교할 자격이 있단 말입니까?
일평생 편협된 생각으로 남을 비교하면서 살아왔던 사마리아 여인이 과거 지향적이면서 남을 비교하며 헐뜯는 올바르지 못했던 과거의 묵은 물동이를 미련 없이 던져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잃었던 이웃을 되찾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문제가 깨끗이 해결함을 받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있어서 묵은 물동이는 그의 지나간 상처투성이의 과거였습니다.  어두운 삶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묵은 물동이를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버려야 할 것들과 버려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것, 귀한 것, 필요한 것, 가치 있는 것은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해로운 것, 유익하지 않은 것, 나쁜 것들은 미련 없이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묵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달려간 이 여인의 결단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도전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동네도, 사람도 겁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묵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뛰어가던 이 여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뛰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가벼웠을 것입니다.  걸어가는 어깨는 덩실 덩실거렸을 것입니다.  입에서는 노랫가락이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을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여인은 그 이후로 그 생활을 버리고 예수님의 일행을 따라나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충성스러운 여제자가 되었고 열렬한 전도자로 나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생을 바치고 그의 열정을 바치고 일생을 헌신하는 이런 놀라운 삶의 변화는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묵은 물동이를 버림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이야기는 그 옛날 2천년 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나 자신의 이야기여야 합니다.  그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묵은 물동이를 버리십시오.  아직도 무슨 미련이 남아서 묵은 물동이를 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내게 있는 한 나의 문제는 해결 받지 못합니다.  묵은 물동이가 있으면 오히려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져 갈 뿐입니다.

태어나면서 뇌성마비요, 사지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면서도 하루하루를 기쁨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시인 "송명희"씨는 아직도 묵은 물동이를 버리지 못하는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너는 너의 지혜를 다 버리라.
오직 주께서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모든 것을 깨달으라.
너는 너의 힘을 다 버리라.
오직 주께서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죽도록 충성하라.
너는 너의 모든 것 버리라.
오직 주께서 주시는 모든 것 가지면 부족함 없으리라.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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