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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도록 (살전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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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도록 (살전 2:1~12)

세상에 우연이란 결코 없습니다. 단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의 모든 삶에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이 우리들의 삶에 나타날 때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서 그것을 우연으로 보기도 하고 필연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번 성지 여행 중 예루살렘에서 반가운 사람 두 분을 만났습니다. 한분은 서울서 목회를 하시는 가까운 후배 목사님이셨고 또 한분은 박사 과정 때 제게 큰 감동을 주셨던 교수님이셨습니다. 한국서도 쉽게 만날 수 없었던 두 분을 예루살렘에서 만날 수 있다니 정말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습니다.

한데 그 만남도 제가 성지여행길에 나섰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기에 뜻을 세우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다가온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또한 삶 자체를 보는 시각도 모든 것을 운명이라는 굴레를 통해서 바라보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그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아름다워질 수도 있고 엉망진창이 될 수도 있다고 믿고 자기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우리가 바라볼 때 이 길을 내가 능히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담대히 한걸음씩 그 길을 통해 나아가지만 나는 도저히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포기하거나 아니면 시작은 했다가도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하고 돌아서고 맙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할 때 앞서서 하는 사람과 뒤로 처지는 사람의 차이도 분명합니다. 같이 성지여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가는 가이드 뒤를 바짝 따르는 분은 그분의 설명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들을 수 있기에 같은 것을 보고도 더 많은 이해를 할 수 있는 반면 뒤에 처지는 사람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다다를 때쯤이면 벌써 설명이 거의 끝나가는 때도 있어 그만 자기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지나갈 때도 종종 있더란 말입니다.

누구는 왜 얼마 전에 가 본 성지를 또다시 가느냐는 분들도 계십니다마는 제 개인으로는 이번 여행을 통해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깊이 알게 되고 깨우치며 은혜를 받았던지 정말 다시 오기를 잘했다 싶고 같은 장소에서도 지난번에도 그 자리에 있었건만 아하 이거를 내가 놓쳤었구나 하는 것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올 때의 기쁨이 얼마나 크고 이미 보고 들었던 것을 다시 보고 듣지만 더욱 새로운 감동을 하나님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기회만 있으면 다시금 가서 지금까지 한번 두 번을 보았어도 깨닫지 못했던 것을 더 깊은 은혜 가운데 들어가 깨우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했으면 이젠 고만해도 되지 않느냐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복음은 전하고 사람을 세워나가는 일에 있어서 이제 그만이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실망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그 중 하나를 생각한다면 내가 하는 일이 헛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나타나는 결과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뜻도 없이 대강 대강한 것도 아닙니다. 내 나름대로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런데도 나타나는 결과가 신통치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안함만 못한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실망합니다. 아니 좌절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려고 내가 그 수고를 다 했나 싶을 마음이 듭니다. 아니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오히려 수고는 다 하고도 욕만 실컷 얻어먹을 때도 있습니다. 온갖 비난이 다 쏟아지는데 그래도 무슨 결과가 있으면 그걸 핑계 삼아서라도 위로를 삼겠는데 내가 보아도 결과가 영 아닙니다. 그나마 내가 못나고 내가 잘못해서 그렇지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이젠 겉잡을 길도 없습니다. 그냥 털썩 주저앉고만 싶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의 위대함이 바로 이런데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여러분을 방문한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여러분도 알 것입니다.” 라고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을 보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여러분에게 가기 전에 빌립보에서 고난을 당하였고 멸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에게 갔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대적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고난을 당하고 멸시를 받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대적하였다고 하면 결국 무슨 말입니까? 이건 실패도 그런 실패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차라리 복음을 전하지나 않았더라면 이런 고난을 당할 이유도 없고 멸시를 받을 이유도 없으며 대적을 당할 필요도 없을 것이 아닙니까? 사서 고생한다고 하지만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느냔 말입니다. 이런 고난과 멸시 속에 많은 사람이 대적을 하는데 거기서 얻을 결과가 또한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바울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그것을 바울이 우리들에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 주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나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감당할 때 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담대히 맡겨주신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빌립보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당했던 고난과 멸시로 인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처음 복음을 전할 때 귀신 들려 점치던 여종 하나가 바울과 그 일행을 따라오면서 큰소리로 “이 사람들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이다. 이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계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 여자가 며칠이고 계속 이렇게 하자, 참다못한 바울은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령한다. 그 여자에게서 나오너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귀신이 그 여자에게서 나왔습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돈을 벌 희망이 사라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광장에 있는 관리들에게로 끌고 가서는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인데 우리 도시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 로마 사람들로서는 받아들이거나 실천할 수 없는 풍습을 선전하고 있습니다.”라고 고발을 했고 군중들도 합세하여 바울과 실라를 공격했습니다. 로마 관리는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고 매질하라고 명령을 했고 이에 따라 바울과 실라를 호되게 때린 뒤에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간수에게 그들을 잘 지키라고 명령했습니다. 간수는 그 명령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깊숙한 감옥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쇠고랑을 단단히 채웠습니다. 결국 좋은 일 하고 실컷 얻어만 맞은 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가운데서도 감옥 안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을 할 때 하나님의 손길이 그들에게 임하여 감옥 문이 열리게 되고 결국 그로 인해 간수장과 그 집의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결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만약 바울과 실라가 좌절하고 주저앉아 하나님만 원망하고 있었더라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며 기도하고 찬양할 때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빌립보에서 옮겨간 데살로니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 데살로니가에 도착을 하자 바울은 습관대로 회당으로 들어가 삼 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유대인들과 토론을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이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 유대인 중에 그 말에 설득되어 바울과 실라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많은 그리스인들과 적잖은 귀부인들도 바울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들을 시기하여 시장에서 불량배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켜 도시를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래 바울이 다시 그 도시를 도망치듯 떠나게 되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때 이미 믿게 된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더욱 부흥했고 지금 바울이 편지를 그들에게 써서 보낼 정도까지 이르지를 않았습니까? 이 모든 것이 다 어찌 가능했겠습니까? 하나님이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건 바울만이 특별히 그런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둘씩 둘씩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 승리의 보고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늘에서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능력을 막을 권세를 주었다. 아무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마귀들이 너희에게 굴복한 것으로 기뻐할 것이 아니라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능력을 막을 권세를 주셨기에 아무도 우리를 해치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시를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미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아니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주님을 알 수 있도록 허락하셔서 믿음의 고백을 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주셨단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실패하는 것 같으나 결국은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찬양하기를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실패는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우리를 낮추시고 시험하셔서 마침내 복을 누리게 하려 하신다고 신명기서 8장에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도움의 손길을 펼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주님의 주신 능력으로 승리하도록 감사와 기도와 찬양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될 일입니다. 그것도 우리 모두가 다 해야 될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다음으로는 우리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우리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격려하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지 말라든지 뭐 말썽만 일으키고 문제만 일으키면서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복음을 전하는 길에는 악한 마귀 사탄의 방해공작이 끊이지 않는데 우리까지 나서서 그들을 힘들게 할 까닭이 없습니다. 오히려 실망되고 결과가 시원찮을 때 더욱 격려하고 더욱 그들을 위해서 중보하며 기도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앞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해도 제일 앞에서 나가는 사람이 위험을 당할 확률이 제일 높습니다. 적들은 제일 앞에 선 사람 그리고 정탐꾼들을 제일 먼저 표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히려 그들을 감싸고 그들을 둘러싸고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전하는 말은 여러분을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거짓을 말하지 않고, 악한 생각도 품지 않습니다. 결코 여러분을 속이지도 않습니다.”라고 바울이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앞서서 수고하는 이들을 그 어떤 말로도 핍박하거나 비난하지 마십시오. 그건 악한 마귀가 할 일이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할 일은 끊임없이 격려하는 일입니다. 이 사람은 도무지 아니다 싶습니까? 그러기에 더욱 붙들어주고 세워나가도록 하여야 합니다.

정말 아니다 싶은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마가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붙잡히시던 밤에 홑이불로 둘러싸고 나왔다가 얼떨결에 그것을 벗어던지고 도망쳤었던 사람입니다. 자기의 집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 말씀과 기도 중에 성령 강림의 대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삼촌 바나바를 따라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길을 나섰지만 너무도 힘들고 겁도 나고 하니까 그만 도중에 도망쳐버렸습니다. 그래 나중에 다시 전도여행을 나서면서 바나바가 함께 데리고 가자고 하였어도 바울이 거절했었지 않습니까? 그랬던 마가를 바나바는 계속해서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칩니다. 바나바라고 어찌 속이 썩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바나바는 그런 아무짝에도 쓸데없을 것 같던 마가를 끝까지 끌어안습니다. 계속해서 일을 맡깁니다.

그 결과 마침내 마가는 베드로의 수제자가 되고 더 나아가 바울조차도 마지막에는 “마가가 우리에게 유익한 자니 그도 데려오라.”고까지 합니다. 그 뒤 마가는 복음서 가운데 제일 먼저 마가복음을 기록하게 되고 이에 자극받아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인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줍니다. 그뿐 아니라 마가는 이집트까지 내려가서 그곳에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꼽틱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회교국가인 이집트에서 그 명맥을 이어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는 안 된다. 누구는 마음에 안 든다. 누구는 일만 만드는 사람이다.” 라고 하면서 외면하지는 않습니까?

어제 인터넷 조선일보의 김지철 차장 대우가 편집자 레터라는 블로그에 “괜찮아, 괜찮아”라는 제목으로 실은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장영희 서강대 교수는 초등학교 때 서울 제기동의 한옥에 살았답니다. 다리가 불편해 집에서 책읽기에만 빠져있던 그녀를 어머니가 대문 앞 계단에 끌어 앉혔습니다. 작은 방석을 하나 깔아주고요. 아이들이 노는 것을 구경이라도 하라는 뜻이었답니다. 술래잡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공기 외엔 끼어들 수 없었던 그녀에게 친구들은 꼭 무언가 역할을 만들어줬습니다. 고무줄이나 달리기를 하면 심판을 시키거나 신발주머니와 책가방을 맡기는 식으로요. 덕분에 놀이에는 참여하지 못해도 소외감이나 박탈감은 느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내가 소외감을 느낄까봐 친구들이 배려를 해준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어느 날 엿장수 아저씨가 골목길에 들어섰습니다. 집 앞에 앉아 있던 그를 지나가다가 다시 돌아와 깨엿 두개를 내밀더랍니다.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깐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습니다. “괜찮아.”
돈 없이 깨엿을 공짜로 받아도 괜찮다는 것인지, 아니면 목발을 짚고 살아도 괜찮다는 것인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그날 마음을 정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런대로 살 만한 곳이라고. 좋은 사람들이 있고, 선의와 사랑이 있고, ‘괜찮아’라는 말처럼 용서와 너그러움이 있는 곳이라고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지금도 이 말을 들으면 괜히 가슴이 찡해진다고 했습니다. TV 퀴즈프로그램에서 혼자 남아 문제를 풀다가 결국 골든 벨을 울리지 못하면 친구들이 얼싸안고 “괜찮아! 괜찮아!”하는 말을 들을 때도요.

샘터사가 이번 주에 내놓은 ‘견디지 않아도 괜찮아’ 첫 대목에 실은 글입니다. ‘나를 움직인 한마디’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어느 쪽을 펼쳐도 가슴 따뜻한 얘기가 반깁니다. 박원순 변호사는 초등학교 때 개구쟁이로 유명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참 잘했다”고 칭찬해줍니다. 성적도 별로였고, 품행이 방정하지도 않았는데요.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도 뭔가 잘 할 수 있는 아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거지요. ‘실제로 그 후 나는 공부를 잘하게 됐다. 하루아침에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는 이 칭찬 한마디가 인생을 변화시켰다고 했습니다.
개그맨 전유성, 무용가 홍신자, 건축가 김석철, 시인 문태준, 소설가 최인호, 배우 안성기, 가수 김창완 등 49명이 이 책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꾼 한 마디를 고백합니다. 오늘 아내와 남편에게, 자녀에게, 직장 동료와 선후배에게, 친구에게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

이 블로그의 내용처럼 우리 이제 서로를 격려하며 세워주는 일에 함께 나서지 않겠습니까? “괜찮아”하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를 불러 숯불 앞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하는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바울은 그저 듣기 좋은 말로 마음을 사거나 돈을 바라거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거짓으로 행동한 적이 없고 사도의 권위를 이용해 짐을 지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온유한 마음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대했노라고 하면서 오직 어린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여러분을 대했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기쁜 마음으로 전할 뿐 아니라 여러분을 위해 우리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세워나가는 일은 어린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의 심정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도무지 사람 될 것 같지 않은 어린 자녀를 넘어지고 쓰러져도 계속해서 끌어안고 세워나가는 어머니의 마음으로만이 참된 하나님의 일꾼들을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정말 자기 생명을 내어줄 수도 있는 그런 사랑으로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사람들을 제자로까지 키워나가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꾼이 그냥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가슴앓이와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나는 “괜찮아”라는 말 한 마디조차도 힘들어 하지를 않습니까?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수고를 아까지 않으며 누구보다 앞서서 내가 먼저 흠없이 거룩하고 바르게 살고자 하며 아버지가 자녀를 대하듯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품어 사람들을 돌봄으로 세워나가며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삶이 그렇다면 어떠해야 하는가 하면 바로 다른 사람을 높여 주고, 위로하며, 하나님을 위해 선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에 합당히 행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을 높여 주고, 위로하며, 하나님을 위해 선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한 삶의 출발은 “아냐 괜찮아 정말 잘했어”하는 이 말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선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나라로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족한 사람을, 말썽만 일으키는 사람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을, 오히려 높여주고, 위로하며, 하나님을 위해 선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주는 그것이 곧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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