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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행 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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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행 11:1-18)
   
    제가 수년전에 YTN 방송국에 초청받아서 방송국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있습니다. 스튜디오 안이 눈에 보이고 뉴스 진행하는 게 보입니다. 제가 주목해서 보니까 앵커, 아나운서들이 ‘3시 뉴스입니다.’하고 뉴스를 진행하고 그걸 마치고 자기 책상으로 돌아오는데 우리 같으면 ‘아, 수고했어. 잘했어.’ 이렇게 할 같은데 그 주변에 있는 동료들이 어느 누구도 아는 척을 하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아, 민망하겠다. 어떻게 카메라 앞에 섰다 돌아왔는데 아무도 아는 척을 안할까?’ 그런데 그게 그들의 문화였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아주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이 열리는 전조인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전환점이 되는 순간입니다. 이런 일을 하고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돌아왔는데 칭찬 받을 것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힐난을 받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베드로를 힐난했다, 힐난. 이 단어는 우리가 별로 쓰지 않는 단어인데 저는 이 단어를 읽으면서 힐러리를 생각했습니다. 힐로 시작하는 단어가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베드로를 힐난한 이유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도 아니고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도 아니고 이방인과 같이 식사했다는 이유입니다. 2절에 이방인과 식사했기 때문에 힐난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덜 중요한 이유 때문에 실족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루살이는 거르고 약대를 삼키는 것과 같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 예수님을 전하는 일, 이것이 중요한 것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고 율법의 규례에 이방인과 같이 식사하지 말라는 것을 어겼다는 이유로 시비를 거는 것은, 이것이 불신자가 시비를 거는 것이라면 이해하겠는데 믿는 사람인데 예루살렘의 지도자 중에도 이런 일로 인해서 실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앰뷸런스가 환자를 태우고 병원으로 달려갈 때 그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때로는 교통신호를 어겨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모든 국가에서 인정하고 앰뷸런스가 달려 올 때는 비켜야 될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길을 내 주어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앰뷸런스가 교통신호를 어겼다는 이유로 딱지를 뗀다면 그것은 한심한 일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생명이 위태하더라도 교통신호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까? 도대체 무엇이 무엇을 위해 존재한다는 얘기입니까? 인간이 교통신호를 위해서 존재합니까, 아니면 교통신호가 사람의 유익을 위해 존재합니까? 예수님도 안식일에 병자 고치는 것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할 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을 안식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아주 중요한 지적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신앙의 본질을 잊어버리게 되면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엇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잊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조금 있으면 혁명이 일어나고 교회가 엄청나게 핍박을 받고 또 러시아가 어둠 속에 70년을 갇히게 될 텐데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러시아 정교 지도자들이 무엇 때문에 다투었는지 아십니까? 목회자 가운의 길이가 얼마나 되어야 하느냐 이걸 가지고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에요.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영적인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거부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습니다. 영적인 일,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우리의 본성적으로 거부하려는 그런 근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치기 전에는 우리 모두에게 육신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려는 기질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또 누그러뜨리고 배우려고 하지 않으면 신앙인도 마찬가지에요. 저도 그렇습니다, 저도. 제 아이가 교회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교회에 연습을 하러 간다고 할 때 아빠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공부에 손해 보겠다. 무슨 연습을 그렇게 많이 하지?’ 목사인 저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게 처음 드는 생각입니다. 그러다가도 ‘아, 아니지. 이게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사실은 이게 더 귀중하지.’라고 스스로 깨닫거나 아니면 기도 중에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거나 그래야 되는 것이지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적인 것과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처음부터 환영하려고 하지 않고 처음에는 전부다 육신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제일 먼저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득이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하나님이 그를 설득하셔야 했습니다. 세 번 설득했지요. 이제 베드로가 자신의 형제들을 설득할 차례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설득해서 예수님을 믿게 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성령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감동하셔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 말과 전도함이 사람의 설득하는 말에 있지 않고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에 있었다’ 아주 중요한 말씀이지요. 목회를 하고 전도하려는 사람은 늘 유념해야 되는 구절입니다. ‘내 말과-설교- 내 전도가 사람의 설득하는 말-권하는 말, persuasive words - 설득하는 말에 있지 않고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에 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납득하기 위해서는 설득이 필요합니다. 배워야 됩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미국은 대통령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이지 않습니까. 오바마와 힐러리의 각축전이 돼가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은 인종이 이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백인과 흑인. 아무리 시대가 바뀐 것 같아도 여전히 미국에서는 인종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중에는 차라리 여자를 대통령으로 뽑을지라도 흑인을 뽑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이 수백 년 걸려서 노예를 해방하고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고 차별을 철폐하고 많은 발전을 이뤄냈지만 아직은 흑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설득, 교육, 깨달음, 이런 것은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사람, 민족, 국가가 자신의 선입견을 벗어 버리는데 이만큼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인들은 소위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수용해야 되는 그런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그런 문제를 겪어본 적이 별로 없지만 지금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조선족들도 차별대우를 받지 않습니까? 같은 한국인이지만 그러나 다른 곳에서 살다 왔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이 그런 것입니다.

  요즘 변화, 혁신이 이십일 세기의 키워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이 기업 경영인, 또 교수, 학자들, 혁신하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 망한다, 이런 식으로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천년 전에 제일 먼저 혁신을 단행한 것이 교회였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주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이 열리고 이방인들을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이건 대단한 혁신이었습니다. 이런 혁신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의지로 자기의 계획에 의해서 혁신을 단행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따라가다 보니까 사람이, 교회가 혁신을 할 수밖에 없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비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간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따라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혁신이나 변화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얼마든지 필요한 그 시대의 요구에 얼마든지 적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따라갈 수만 있다면. 그게 관건입니다.

  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처음부터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출발한 게 아니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어떤 문제가 앞으로 있을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해서 미리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고 그것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지혜를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 어떤 일이 생기든 그때마다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믿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미리 알고 간 것이 아니에요. 어디로 갈지 모르고 믿음으로 출발했는데 하나님이 적재적소에 아브라함을 인도하십니다. 그를 인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일을 무엇을 할까? 내일은 무엇을 먹고 살까?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또 베드로의 말은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내일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내일, 내년 이렇습니까? 하나님의 뜻이면 우리가 살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것이지 사람이 내일 일도 알지 못하는데 내일 일에 대해서 미리 해답을 준비한다는 것은 그건 가능하지도 않고 또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저에게 ‘목사님의 목회 비전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제가 민망해서 대답을 못합니다. ‘그런 거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하고 싶은데 그러면 ‘저 목사님은 비전도 없고 도대체 뭐하시는 분이야?’ 이렇게 생각할까봐 얼버무리고 맙니다. 신년계획? 저 이런 거 없습니다. 한 주, 한 주, 목회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5년 계획, 5년 계획 같은 얘기를 다음 주에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그러나 필요할 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고 또 비전을 주시고 깨달음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순종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초대교인들에게도 그렇고 우리에게도 그렇고 우리가 이처럼 필요할 때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어디서 얻을 수 있느냐? 성경 말씀과 성령 이 두 가지입니다. 사도들도 그랬습니다. 이제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는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지 이 문제에 대해서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았고 성령의 역사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고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증거로 삼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15절에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러니까 성경 말씀이 필요할 때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평소에 읽어놓으면 우리가 백과사전처럼 성경을 외우고 다니는 게 아니더라도 필요할 때 성령이 적절한 성경구절을 기억나게 하셔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인도하시고 그것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 됩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그때에 기억해서 ‘아,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처럼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성령을 주시는구나.’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이 ‘내가 누군데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느냐’ 막을 수 없지요. 내가 누군데.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는데 내가 누구라고 그것을 반대하겠느냐?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올바른 자세이지요. 하나님을 반대할 수도 없지만 반대해서도 안되지요. 사람이 누군데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반대하겠습니까? ‘하나님 싫어요! 나 그런 거 싫어요! 내 취향에 안 맞아요. 나하고는 안 맞아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데. 누가 적응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적응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에게 적응해야 됩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때 자기 스타일대로 믿는다는 것도 그것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뭔데 무슨 자기 스타일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스타일에 우리가 적응해야지요. 할렐루야! 주님의 방법에 우리가 적응해야지요. 어찌 주님이 나에게 맞춰 주기를 요구하겠습니까?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이 말을 예루살렘의 형제들이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18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이것이 은혜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은혜를 받기 전까지는 이미 예수님을 믿은 사람도 은혜를 받기 전까지는 이기적으로 믿습니다. 그 사실을 아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더 은혜를 받기 전까지는 이기적으로 믿습니다. 우리는 너무 기복신앙을 탓하면 안됩니다. 그건 이기적인 인간이 예수님을 믿을 때도 이기적으로 믿다보니까 내가 복을 받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이상한 게 아니에요. 그게 인간이에요. 인간은 모든 일을 할 때 자기중심적으로 하다 보니까 예수님 믿는 것까지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기 전까지 그렇다는 얘기에요.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사람의 첫 번째 사인은 묵묵히 침묵하는 것입니다. 잠잠하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했다… 은혜 받기 이전에는 자기 의견, 불평, 고집을 말하느라고 시끄러운데 은혜를 받으면 잠잠해 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 중에 하나는 아마 ‘Be Quiet! - 좀 조용히 해라’ 그건 점잖은 표현이고 'Shut up! 입 좀 다물어라! 제발 좀 조용히 해라!' 우리가 잠잠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고 배울 수도 있는 게 아닙니까.

  두 번째 은혜 받은 증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하셨구나!’ 하나님께 감사,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구나!’

  네 번째는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 믿음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내 영혼만 생각했는데 내 영혼이 중요하다면 남의 영혼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방인의 영혼도 중요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만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방인도 사랑하죠, 남도 사랑하죠.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받으면 ‘아, 하나님이 남들에게도 은혜를 주시는구나. 하나님이 남들도 사랑하시는구나.’하고 그때에야 그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봉사나 섬김이라는 것 남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남들도 이렇게 사랑하신다면 나도 남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되겠구나!’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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