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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울어야 산다 (눅 19:4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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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어야 산다 (눅 19:41-46)

사람은 태어날 때, 울음으로 시작하고, 눈물 속에 살다가, 통곡소리와 함께, 세상을 떠나게 된다. 눈물 없는 인생은 없다. 눈물은 인간만 흘리지 않고, 짐승도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짐승의 눈물은 생리적인 눈물일 뿐이고, 사람의 눈물은 감정과 의지가 들어 있는 눈물이다.

따라서 사람의 눈물은, 심리적, 철학적, 종교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눈물은 약한 사람,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 없는 사람, 고통 받는 사람들만, 흘린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약한 사람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영적으로 보면, 영적으로 강하고, 건강한 사람이 흘린다.

오늘날 과학과 기계는, 만능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과학과 기계로도, 못하는 것이 있다. 사람을 움직이고 변화시키지 못한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과학과 기계가 아니라, 바로 눈물이다. 망나니 자식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 눈물이요, 낙심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눈물이다.

눈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거두게 한다. 그러므로 눈물은 부끄럽지도 약하지도 않다. 진정으로 강한 것은 사랑의 눈물이다. 이 시대가 고도로 발전하지만, 영적인 힘을 일어버린 이유가 무엇인가? 눈물이 말랐기 때문이다. 메마른 심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외쳐도 가슴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듣지 못한다. 머리는 있지만, 가슴이 눈물이 메말라가기 때문이다. 차디찬 비판은 있으나, 생명을 품는 뜨거운 감격은, 경험하지 못했다. 눈물이 마르면 생명이 없다. 눈물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고귀한 액체다.

우리는 슬플 때도 울고, 너무 기쁠 때도 울고, 억울하고 고통스러울 때도 눈물을 흘린다. 그 뿐만 아니라 감동, 감격이 있을 때, 죄에 대한 참회와 회개가 있을 때도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인간됨의 표현이다. 눈물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① 생리적 눈물이 있다. 눈을 촉촉이 적시기 위해 흐르는 눈물, 눈에 먼지나 티가 들어갔을 때, 눈을 보호하기 위해 흐르는 눈물이 있다. 생리적 눈물이 충분하지 못하면, 안구 건조 증에 걸린다. 생리적 눈물이 없는 사람들은, 인공 눈물이라도 넣어야, 눈이 건강해져서 잘 돌아간다.

② 정서적 눈물이 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감정의 변화에 따라 흐르는 눈물이 있다. 이 감정의 눈물이 많은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정서적 눈물은 장수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여성분들이 남성들보다 오래 사는 이유도, 정서적 눈물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③ 배반의 눈물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악어의 눈물’이 있다. 강가에서 사람을 만난 악어가 사람을 죽여 놓고, 그 사람을 위해 울어주고, 잡아먹는다는 데서 유래된 이야기다. 사람을 죽여 놓고 우는 악어의 눈물, 이 눈물은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눈물이다.

쿼바디스라는 영화를 보면, 폭군 네로가 신하를 죽이고, 그를 위하여 울면서 말한다. “눈물단지를 가지고 와라. 내 눈물은 귀하다. 가족들에게 내 눈물을 갖다 줘라. 그리고 네로가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고 말해라” 네로가 흘린 눈물이 악어의 눈물이다.

④ 영적 눈물이 있다. 가장 신령하고 순수한 눈물이다. 이는 예수님의 눈물이요, 성령님의 눈물이요, 성령의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을 말한다. 다윗 왕도 울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울었다. 사도 바울도 울었다. 눈물을 부끄럽지 않고, 약하지도 않다. 진정 강한 것은, 사랑의 눈물이다.

1. 예수님은 사랑의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의 생애를 한 마디로 하면, 눈물의 생애라 할 수 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우셨다는 기록은 3군데 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조용히 눈물 흘리셨다(요11:35).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도록 기도하셨다. 그 모습을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주님은 이처럼 심한 통곡과 눈물로, 생애를 마감하셨다. 마지막은 본문 41절이다.

감람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신 후, 성에 가까이 오사,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셨다. 여기 우셨다는 말씀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당할 심판, 예루살렘 성이 비참하게 파괴될 것을 아셨기에, 비참한 상태를 눈물로 표현하셨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AD70년,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이 1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침략한다. 3일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토성을 쌓았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100만이 넘는 인파가 예루살렘 성안에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전혀 밖으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게 포위하고, 식량이 반입되지 못하게 함으로, 그 안에서 아비규환 상태가 되었다. 얼마나 비참했는지,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심지어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비참한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유명한 역사가 요세푸스는, 인류 역사에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가장 비참한 참상을 이 예루살렘 멸망으로 기록해 놓았다. 예수님은 이런 참상을 예견하시고 우셨다. 하나님의 아들을 반역하고, 핍박하고, 또 처참하게 처형하는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경고하신다.
 
주님은 참상을 당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죄악에 있음을 알고 슬퍼하셨다. (42)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이다.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아야 할, 백성이 사는 성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곳이다.

그런데 그 성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배신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 이는 인간적인 동정심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자가 받아야 할 심판과, 지옥의 비참함을 표현해 준다. 인류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 지옥의 모형으로서, AD 70년에 있을 예루살렘의 파괴를 이야기한다. 인간의 죽음 가운데 가장 무서운 죽음, 영혼의 죽음, 영원한 죽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가슴 아파하며, 탄식하시는 주님의 모습이다. 오늘 주님은 그 눈물을 우리에게 담아주신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울지 않으셨다. 모든 눈물이 우리를 위해 흘려주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실 때, 예루살렘의 딸들이 울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눅23:28)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님은 심판을 미리 보시고 하신 말씀이다. 그때 성안에서 100만 명이 죽고, 10만 명이 로마에 포로로 끌려갔다. 수만 명이 밖에서 전쟁으로 죽었다.

이 전쟁이 얼마나 잔혹했으면, 전쟁을 지휘한 디도 장군이 전쟁이 끝난 후 성곽을 돌 때, 시체가 썩어서 시냇물처럼 흘러감을 보고, 자신이 해놓은 엄청난 일을 보고,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겠으니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오! 이 죄를 내게 돌리지 마옵소서!”


2.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하는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울지 않을 것을 인하여 울고, 울어야 할 것을 인하여 울지 않는, 눈물이 왜곡된 시대다.

(1)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울어야 한다(41).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셨다. 나라를 죄악을 보고 우셨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죄로 사무친 백성을 보면서 울었다. 사도 바울도 (롬9:1-3)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동족의 구원을 위한 고통이라고 했다.

우리의 눈에는, 이 나라의 아픔과 상처가 보여야 한다. 타락과 멸망을 향해 치닫는 사회와 문화가 보이고, 민족의 아픔과 위기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5천년 역사 속에, 이처럼 정치가들이 국민을 혼란하게 하였던 때가 있었는가?

돈 많은 사람들은 졸부로, 국민들은 나라야 망하든 말든, 내 이권만 챙기면 그만이었던 때가 언제 있었는가? 또 교회가 이렇게 희망을 못 주던 때가, 언제 있었는가? 따라서 지금은 교회가 뭉쳐서,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다.

이 나라를 구하는 길은, 그리스도인의 눈물이다. 나라가 썩어서 망하는지 않고, 의인 10명의 애통하는 눈물이 없어서 망한다. 애국자가 다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모두 애국자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국경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겐 조국이 있다.

성경의 위인들은 한결같이,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들이다. 느헤미야는 조국이 어려움에 빠져있다는 비보를 듣고, 찢어지는 마음으로 울면서 기도했다(느1:4). 국가와 민족을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울어야 한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 가는 민족의 쇠운을 보고, 가슴을 치며 울며 “저는 우리 민족의 죄인이올시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사랑하여 주셨는데, 이 민족을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죄인이올시다.”라고 울며 기도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가 존 낙스는 “하나님이여 내 조국을 내게 주시지 않으시려면,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라고 눈물로 기도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총칼로 세운 나라는 망하는 때가 있으나, 기도의 무릎으로 세운 나라는 망하는 법이 없다.

이 백성이 이만큼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것도, 새벽마다 밤마다 울며 기도하는 기도의 종들이 이 땅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지하자원이 풍부한가? 땅이 넓은가? 인구가 많기 때문인가? 백성이 도덕적인 수준이 높고, 지혜롭기 때문인가? 이 민족의 힘은 기도의 힘, 애통의 힘이다.

(2) 우리는 자신과 자녀를 위하여, 울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올라가실 때, 여인들이 뒤따르며 울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고 하셨다.

우리는 자신과 가정, 자식들의 영혼의 상태를 살피고, 눈물을 흘려야 한다. 우리 자녀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다면,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붙잡고서 통곡해야 한다. 예수님처럼 사랑의 눈물을 흘려야 한다. 스펄전 목사는 “마른눈으로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했다.

눈물로 말씀을 먹어야 한다. 눈물이 흘러내리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은혜를 받지 못하면, 자신이 괜찮은 줄 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고 추한지 발견하게 된다. 자기 속에 있는 죄와 허물뿐임을 깨닫게 된다.

옛날 학교 다닐 때, 강한 빛이 들어오면, 먼지투성이임을 발견하게 된다. 초기의 바울은 (고전1:1)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자신이 사도임을 강조한다. (고전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한다. (엡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라고 말한다.

가장 은혜가 충만해 있을 때, (딤전1:15)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한다. 이렇게 은혜 받으면 받을수록 자신을 알기에 겸손해진다. 자신의 더러움을 보고 아픔이 있으면, 자신이 살고, 가정이 산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사람은, 구원해 달라고 울지 않을 수 없다.

죄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 예수님께서 용서하신다. 슬피 우는 자에게는 위로의 은혜를 부어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 자기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은, 교만의 눈으로 자기를 보기에, 울 수가 없다.

그러나 영의 눈이 열리면서, 자신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된다. 자신의 비참한 미래를 보게 된다.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여, 눈물을 흘리게 된다. 나를 살리고 자식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는 힘은 눈물에서 시작이 된다. 눈물은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다. 눈물은 실패를 성공으로 바꾼다.

(3) 교회를 위해 울어야 한다(눅19:46).

예수님은 우시며 성전으로 가셨다. 성전에 가서 장사치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밖으로 내어쫓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서, 신앙 양심이 무너진 현실을 탄식하고 계신다. 이 집은 눈물로 기도하는 집인데, 어찌하여 눈물은 없고, 장사꾼들만 우글거리는가! 유월절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여들었는데, 각기 제물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너무 멀어서, 소나 양을 끌고 오면 다치니까, 예루살렘에 와서 제물을 사서 바쳤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서,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 뜰 안까지 들어와서, 짐승을 사고 팔게 했다. 거기에서 수입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강도의 소굴이 되었느냐고 탄식하셨다.

민족을 살리는 마지막 힘은 교회다. 그런데 교회가 타락했으니, 끝장이 나고 말았다. 강도가 역사 구석구석에 있어도, 주님은 참으신다. 청와대에 강도가 들어가도, 주님은 참으신다. 국회 의사당에 회사에, 학교에 강도가 들어가도 주님은 참으신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강도는, 주님께서 용납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를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오늘도,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눈물을 흘릴 자를 찾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눈물 없는 사람, 눈물이 없는 공동체, 눈물이 없는 세대를 향하여 한탄하셨다.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마11:17)라고 나무라셨다. 유명한 설교가 토마스 왓슨은 “눈물 골짜기를 지나야 낙원이 나타난다.”고 했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가슴이 없는 사람이다. 사람은 흘린 눈물만큼, 인생의 깊이를 안다. 교회를 위해 눈물을 흘리시기 바란다.

(4) 이웃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요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주검 앞에 눈물을 흘리셨다. 주님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불행해짐을 원치 아니하셨기에 우셨고 살리셨다.

예수님은 무덤 문을 막고 있던 돌문을 여시고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애통은 이웃을 향한 애통이었다. 이는 우리 신앙인이 흘려야 할, 신령한 눈물이다. 오늘도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은, 잠든 영혼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신다. 죽은 심령들 일어나라 말씀하신다.

썩어 냄새나는 자에게, 문을 닫고 살지 말고, 돌문을 열라 말씀하신다. 나사로야 나오라! 죽음의 자리, 실패의 자리, 질병의 자리, 절망의 자리, 게으름과 나태의 자리, 무력한 그 자리에서 일어나라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참된 애통은 자신을 성찰하고 아파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약점까지도 자신의 허물인줄 알고 함께 아파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웃을 살리려는 눈물이 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웃을 볼 때, 잃어버린 영혼 때문에, 사탄에게 빼앗긴 백성 때문에,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

우리는 눈을 열어, 교회 밖의 잃어버린 영혼, 죽어 가는 영혼, 사탄에게 빼앗긴 영혼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저들을 불쌍히 여기며,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한다. 저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불붙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회개의 눈물만이 우리를 살린다. 가슴을 찢는 회개가 없이는, 살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물을 보신다. 우리에게 진정한 회복이 일어나려면,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시내처럼 흐르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의 눈물을 귀하게 보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눈물 흘릴 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신다. 부모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의 최고 무기는, 잘못을 인정하며 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의 눈물을 보고 회복시키신다. 히스기야는 죽을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기도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사39:5)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며 아주 시청각적으로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눈물을 보시는 분이다. 따라서 우리도 많이 기도하고, 많이 울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이 부러워서 우는 눈물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눈물이 있기를 원한다. 억울해서 우는 눈물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의 탄식소리를 듣고, 나를 보고 우는 눈물이 쏟아져야 한다. 내 감정에 북받친 눈물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신령한 눈물이 흘러야 한다.
 
결론이다. (시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고 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에는 공짜가 없다.

내 죄를 통회하면서 흘리는 ‘회개의 눈물’이나, 내 이웃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 이 거룩한 눈물에는 절대로 공짜가 없다. 우리가 눈물을 흘린 만큼, 언젠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신다.

조국을 위해 흘린 눈물에는, 삶의 평안과 풍성함으로 갚아주신다. 우리의 회개의 눈물에는 사죄의 은총과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우리 이웃을 위해 흘리는 눈물에는, 성숙한 믿음과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으로 채워주신다.
이런 축복이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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