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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용서와 치료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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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용서와 치료 (막 2:1-12)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에 한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일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여러 지역을 순회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시고 선교 본부가 있는 가버나움에 돌아오신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문 앞까지도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무리 가운데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호기심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심지어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꼬투리를 잡기 위해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있었습니다.

그 즈음에,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헐레벌떡 달려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왔으나 이미 사람들로 입구가 막혀서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자,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그리로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집은 주로 흙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은 슬래브처럼 편편하게 만들었고, 집밖에서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지붕은 약 일 미터 간격으로 양쪽 벽에 보를 걸치고, 그 사이를 나뭇가지로 걸친 다음, 짚과 진흙을 이겨서 발랐습니다. 그러므로 지붕을 뜯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집이 아닌 남의 집 지붕을 뜯어낸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처럼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한 두 시간이나 길어도 한 나절 쯤 기다렸다가 주님을 만나 치료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나 봅니다. 어쩌면 환자의 상태가 촌각을 다툴 만큼 위급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들은 집밖의 계단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가서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집 주인의 허락을 받고 지붕을 뜯어냈는지 알 길이 없지만, 그렇게 하라고 허락할 주인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들은 그 모든 비난과 항의를 감수할 각오를 했음이 분명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환자를 뉘인 침상을 달아 내릴 수 있으리만치 뜯어냈으니 방안 분위기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쏟아지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그러나 마가는 사람들의 반응에 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것은 청중의 반응이 이 이적 사건을 설명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마가는 예수님께서 보이신 반응은 빼먹지 않고 기록했습니다.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마가는 예수님께서 저들의 행동을 처음부터 관심 있게 지켜보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의 무례하고 무모하게 보이는 행동을 통해서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주님께서는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삼상 16:7).

요즘 우리 사회는 외모 가꾸기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쌍꺼풀은 기본이고, 입도 고치고, 코도 세우고, 턱도 깎고, 가슴도 고치고, 보톡스를 주사해서 얼굴을 팽팽하게 만들기도 하고, 날씬한 몸매를 만들려고 지방흡입술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는 엉덩이와 종아리에 실리콘을 넣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외모를 가꾸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성형외과가 가장 인기가 좋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외모지상주의에 빠져서 빚어진 병적 현상입니다.

저는 외모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을 죄악시하지는 않지만, 건강이나 사회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모습을 간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작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주님의 평가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시며,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보시기 원하십니다.

또 한 가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는 학벌이나 경제력이나 성공 여부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사람 됨됨이 보다는 어느 학교 출신인가, 재산이 얼마나 되는가, 얼마나 출세했는가 등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평가기준이 주님께는 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내세울만 하더라도 믿음이 없으면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인위적으로 자기를 꾸미면 꾸밀수록 위선자가 되어 주님의 외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마 7:23). 꼭 기억하십시요! 주님께서 보시기 원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믿음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여러분께서 예배에 참석하신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믿음의 분량에 차이가 날 수 있지만 이제 갓 믿기 시작한 신자라도 그 속에 믿음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겨자씨처럼 작은 믿음이라도 멸시하지 않으시고 소중히 여기십니다. 처음부터 큰 믿음을 가질 수는 없으며, 나무가 자라듯이 우리의 믿음도 점점 자라나는 것입니다.

믿음의 중요성에 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 11:6)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한갓 종교행위에 불과하므로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열납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도 교회생활을 열심히 할 수 있고, 직분을 맡을 수도 있고, 기독교인 행세를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중풍병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구절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들이 남의 집 지붕을 뜯어내고 환자가 누운 침상을 줄로 달아 내린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무례하고 몰상식하게 보였을지 몰라도 주님께서는 이를 믿음의 행위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그 같은 행동으로 표출되었음을 아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믿음은 그것에 걸맞은 믿음의 행동으로 표출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백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셨을 때, 그는 지체 없이 순종했습니다. 따라서 야고보 선생이 아브라함에 관해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 하신 것은 정확한 평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죽은 믿음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어떻게 행하셨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중풍병을 고치러 나온 사람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사람의 병이 그의 죄와 관련이 있음을 전제할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병이 죄의 결과라는 뜻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그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무슨 까닭인지 궁금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입니까? 자기입니까, 그 부모입니까?” 우리는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서 죄와 질병에 대한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시기를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든 사람들을 대할 때 그 병의 원인이 그들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죄와 질병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죄가 질병의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의 경우가 그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중풍병이 그의 죄로 인한 것임을 아셨으므로 병을 고쳐주시기에 앞서 그를 죄의 매임에서 풀어주기 위해서 죄 사함을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데이빗 A. 씨맨즈 목사는 〈상한 감정의 치유〉라는 책에서 죄와 질병의 관계에 대하여 이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한 사람들과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은 죄책감, 원망하는 마음, 애쓰며 갈등하는 것, 그리고 근심하는 마음의 네 가지 어려운 문제 가운데 빠진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네 가지 요소들은 긴장감 및 갈등과 다른 모든 종류의 정서적 문제들을 낳게 한다. 데이빗 벨굼 박사는 현재 신체적 질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 중 75%가 정서적인 문제 때문에 병이 생겼다고 주장한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들이 경험하는 신체적 증상과 문제들은 자신도 모르게 생긴 죄책감의 발로라는 것이다.》

어느 유명 한의원의 홈페이지에 홧병에 관하여 이같이 설명한 것을 보았습니다. “홧병은 생활 속에서 겪는 심한 스트레스, 분노, 억눌린 감정을 풀지 못한 것이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홧병에 걸리면, 가슴 답답함, 불면증, 두통, 피로감, 우울증, 불안함, 소화불량, 식욕부진, 호흡곤란, 전신의 통증 등 다양한 증상이 동반된다.”

원인은 홧병 한 가지이지만, 다양한 증상을 나타내며, 우리 주위에는 홧병으로 폐인이 되거나 심지어는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만큼 홧병은 무섭습니다. 한국인의 경우, 가족 간의 갈등이 홧병의 주원인이라고 합니다. 홧병을 고치기 위한 의학적인 처방이 있지만, 가장 효과적인 치료방법은 나를 억울하게 하고 괴롭힌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할 때 마음의 병이 치료되고, 아울러 육신의 병도 고침받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 역시 죄와 관련 있는 질병이 있음을 언급합니다.

“14)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15)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6)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

이 말씀의 요점은, 모든 병이 죄 때문은 아니지만, 사람은 누구나 죄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회개함으로 사죄의 은총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범죄로 인해 병에 걸린 것이 아닐지라도 죄 사함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평안을 누리게 되어 치료를 촉진시킬 수 있습니다.

현대의학은 사람이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의 뇌에서 베타 엔돌핀이 생성되어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고, 노화를 방지하고, 암세포를 파괴하고, 기억력과 면역능력을 강화시켜 준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은 이 같이 유익한 엔돌핀이 생산되지 않겠지요.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일로 범죄했을 때,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그의 심령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시편 32편에서 그는 당시의 고통에 대하여 “3)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뼈가 쇠하고 진액이 말라버렸다는 표현은 그의 육체의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음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죄가 그 원인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고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나자 심신의 건강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은 죄 사함의 행복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알았으므로 “1)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2)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라고 읊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단절시킵니다. 생명의 근원이시며 빛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의 심령에 기쁨이 머물 리 만무할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 주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 막혔던 장벽이 무너지고 친밀한 사랑의 교통이 이루어집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윗처럼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라고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17장 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죄 사함의 은총 가운데서 날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주셔서 죄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마 1:21).

예수님의 생애는 십자가 죽음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습니다. 무죄하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그것은 순전히 죄와 허물로 지옥 형벌을 받게 된 인생들을 대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잔을 가지시고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고 하셨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함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불화를 청산하고 화목을 이루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운명에서 벗어나서 영생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모든 은혜는 죄 사함 받은 성도들만이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타 종교들과 다른 점이 여기 있습니다. 세상 종교들은 죄의 문제와 맞닥뜨리지 않으려고 하며, 혹 죄를 언급할지라도 윤리 도덕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만 죄를 다루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죄란,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 명령을 불순종한 것입니다. 죄는 화살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간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때 과녁은 하나님의 말씀 또는 하나님의 뜻이고, 화살은 우리의 순종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죄 중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그를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 심판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인생을 살기 원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받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죄 사함 받은 사람이라야 죄책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 하시자, 그곳에 앉아 있던 어떤 서기관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그들의 생각은 옳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죄책을 없애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실 자격자는 하나님 한분밖에 없으십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만 죄를 사하실 수 있다는 서기관들의 생각은 원칙적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생각한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올바로 알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평생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릇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예수님에 대하여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기를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인자(人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자에 대한 개념은 구약 성경 다니엘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하늘 구름을 타고 오셔서 세상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신적인 존재를 의미합니다. 인자는 곧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신 것은 인자 곧 메시야로서 행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인자로 오셨음을 입증하시기 위해서 많은 사람 앞에서 중풍병자를 성하게 만드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자, 그 사람이 곧 일어나서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걸어 나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셨을 때 신성모독죄를 범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죄를 사할 수 있는 자격이 없으면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죄 사함을 선언하였을 때, 그 사람의 죄가 사해졌는지 알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 사함을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이 인자인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인간들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분이심을 입증할 수 있는 실질적인 표적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4:20).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 긴장해서 숨을 죽이고 침상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를 주시했을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환자가 일어날 것인가, 만일 환자가 일어나지 못한다면 예수님은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중풍병자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제 발로 일어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눈앞에서 일어난 기적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앞에 서 계신 나사렛 예수가 누구이기에 이처럼 큰 능력을 행하는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이 명명백백하게 입증이 된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감사할 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변함이 없으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갈 때 죄 사함과 치료의 은총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기 위함입니다(마 8:17). 우리가 병에서 놓여나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치료의 은총을 받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불치의 병이라도 주님께서는 다 고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치료를 받아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 우리의 믿음을 주님께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용서와 치유를 인생들에게 베푸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와 저주와 질고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버리는 희생을 통해서 우리를 죄와 질병에서 해방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붕을 뜯고서 중풍병자의 침상을 달아 내렸던 사람들처럼 간절한 심령으로 주님을 찾고 찾을 때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과 치유의 은총을 받아 언제나 영육 간에 강건한 삶을 영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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