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확신(1) :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마 8:5-13)

  • 잡초 잡초
  • 417
  • 0

첨부 1


확신(1) :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마 8:5-13) 
 
이제 신년의 분위기도 바뀌어서 어느 새 2월이 되었습니다.
"잡석이 보석되자"
"무덤덤한 성도가 헌신자 되자"
"열정과 노력으로 재능을 넘어서자"
세 가지 표어를 정했고 우리는 올 한 해를 시작을 했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우리 성도님들께 묻습니다.
어느만큼 진행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일 년이면 충분하다라고 마음먹고 출발했는데 한 달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느 정도 선에 와 있는가 생각을 합니다.
'역시 힘들어. 내가 수십 년 동안 살아 온 결과가 지금인데 일 년 동안에 무슨 변화가 있겠어? 또 한 달 지내보니 결국 나는 나 일 수밖에 없어.' 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올해는 반드시 무엇인가 될 것 같다.' 라고 생각하고 지금 달려가고 계십니까?
삶이라는 것은 의욕이 있을 때 싱싱한 겁니다. 그 의욕이 특별히 주님의 나라를 위한 것일 때 우리는 거룩한 사명감 속에서 결코 시들지 않고 실망과 낙심의 산을 넘고 강을 건너 가야할 목적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부터 시작해서 믿음 있는 성도의 삶에 대해서 몇 주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실생활에 있어서 믿음이 가지는 각양의 면모를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믿음이라는 것은 저 멀리 있는 상상이 아니라 내 앞에 바로 그 현장에서 어떤 능력과 기능을 발휘하고 실제화 되어서 내게 힘이 되고 은혜가 되는가?
그리고 주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초기에 이루어진 사건으로 한 군대의 백부장이 자신의 중풍병이 들린 하인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와서 병 낫기를 간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예수님께서 그 백부장의 소원을 들어주셔서 그 하인의 중풍병을 낫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이 진행되면서 그 과정 속에서 이 백부장의 믿음이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사람들에게도 추천되는 믿음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작은 하인의 병 낫기와 결과는 그 병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낫게 되는 것이지만 이것을 통해서 더 드러나는 믿음의 아름다운 모습, 믿음의 확신에 대해서 우리가 볼 수 있고 감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내용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으로서 그 믿음이 의미하고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바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하는 것은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것의 외적인 일차적인 모습은 기대를 품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결국 주님께 대한 기대를 품되 그 기대가 내 외적인 행동까지 움직이는 실제화 된 사실일 때 빛을 발하고 힘을 발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내 머릿속에서 관념적으로 맴돌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해 볼까? 그러다가 아니야, 그러면 안 되지. 라고 소용돌이 쳤다 끝나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생각되는 것이, 내 마음속에 확신되는 것이, 이제 의지적인 나의 손과 발의 행동을 통해서 실제적인 사실화된 작용과 그리고 사건과 일로써 나타날 때 그것이 우리들에게 믿음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와 같은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기 위해서 우리들에게는 수많은 갈등이 있고 갈등을 이겼을 때일 것입니다.
아마 올 연초에 우리 성도님들이 <잡석이 보석되자> 라는 표어를 들었을 때 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표어를 주셨구나! 라고 마음에 받으리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를 통해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셨으니 아마 목사님을 통해서 내게 귀한 은혜를 주셨다라고 생각하고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비록 현재는 보석이 아니라도 잡석과 같은 우리가 갈고 닦이고 세련되어서 하나님 앞에 보석처럼 빛나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보석처럼 빛납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역사의 한 순간 모퉁이에 사용되고 그것으로 역사를 구성하는 인자가 되자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과연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떨까? 다른 사람은 어떠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또 마음의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입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까지도 내가 정말 잡석과 같은 존재지만 보석과 같이 빛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자라고 마음먹고 계신다면 이와 같은 갈등을 극복하고 넘어오셨을 것입니다.
내 몸이 불편한데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래. 하나님이 은혜주시면 할 수 있을 거야.
또 내 삶의 상황이 수십 년 살아온 결과가 이건데 가능할까?
그래,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면 어떤 일도 할 수 있지. 라는 마음의 갈등과 극복의 과정을 거쳐서 결국 우리는 어떠한 결론에 지금 이르러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과정의 어려움을 능가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가다가 실망할 일도 많지만 그 실망을 딛고 넘어서기에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이 백부장이 주님 앞에 나왔다는 것은 공개적인 상황입니다. 물론 이 백부장은 그렇게 큰 직책은 아니나 그래도 그 당시에는 상당한 직책에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말했지만 나도 남의 수하에 있고 내 아래에도 많은 병졸들이 있어, 또 종들도 있어... 라는 얘기를 보면 이 백부장도 그럴듯한 사람입니다.
물론 요즘 말로 따지면 100명 정도의 군사를 다스리는 사람이니까 뭐 그렇게 큰 힘이 있겠나?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시대에 있어서는 그래도 꽤 괜찮은 직책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로마가 전 세계를 정복하고 있을 때 로마는 그렇게 국민 수가 많지는 않습니다. 군사의 수가 많지 않아요. 그래서 로마는 전략을 세웠죠. 그 넓은 자기들의 점령지에 군사를 많이 주둔시킬 수 없으니까 일정한 수의 군사를 주둔시키고 어떤 한 지역에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분산된 병력들이 일시에 모여서 그 한 곳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또 다시 분산되어 있다가 또 사건이 일어나면 일시적으로 모일 수 있게 한 겁니다. 즉 군사도로를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로마시대에 가장 발전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도로였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기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도로를 발달시키고 그래서 한 지역에 거주하는 로마의 군사들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백부장도 꽤 그럴듯한 직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 사역의 초기당시에 예수님의 위치는 그리 확고한 위치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이 백부장쯤 되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무릎 꿇고 조아리고 "예수님 내 하인의 병을 고쳐주십시오." 하고 간구한다라는 것은 그야말로 군신의 관계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그 하인의 병을 고쳐주는 역사가 일어났기에 이 사람이 무릎 꿇고 간구한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지 만약에 그렇지 않았다면 이 백부장이 예수님께 간구한 것은 하나의 우스개꺼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상당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머릿속에 생각한 것, 그러다 다시 거두어들이면 그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평가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머릿속에 생각한 것을 사람들이 있는데 공개적으로 공포하고 그것을 실행한 것은 전혀 다릅니다. 여기에는 평가가 따르게 되고 평가에 대해서 내가 대가를 치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백부장이 한 일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따라서 백부장이 한 것은 절대적인 믿음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린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서 성전미문을 지나가다가 그 앞에 앉아서 상인들에게 구걸을 하는 앉은뱅이 걸인을 보고 담대히 외치는 겁니다.
"은과 금은 나에게 없지만 나에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이름으로 일어나라."
우리는 이 장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뭔가 찾아봤지만 줄게 없었습니다. 줄게 없어도 그래도 주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뒤져보니까 예수님의 이름이 있지요. 그것을 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그 자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때 이미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유명인사였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충만하고 밖에 나가서 한 번 외칠 때 이미 삼천 명이 회개한 이후였습니다. 그 조그만 도성 예루살렘에서 삼천 명이 모일 수 있는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성전이 그렇게 수만 명 모일 수 있는 곳도 아닌데 아마 거기서 삼천 명 외쳤을 때 사람들이 삼천 명이 회개했다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베드로가 담대히 외칠 때 삼천 명이 회개를 하고 말았어요. 그렇다면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이미 유명인사가 된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베드로가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데 은과 금 나에게 없지만 나에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이름으로 일어나라
안 일어나면 어떻게 되요? 베드로는 난감한 겁니다. 이제까지 한 순간에 그의 모든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복음을 전할 길도 망가지는 겁니다.

때때로 우리 믿음의 길이라는 것은 잘 되면 좋고 안 되면 할 수 없지. 이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잘 되면 물론 좋은데 안 되면 때로는 큰 사건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웬만한 확신 가지고는 우리는 어떤 일을 믿음의 이름으로 실행할 수가 없단 말이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그 순간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나사렛 예수이름으로 일어나라" 라고 얘기하려고 하는데 '안 되면 어떻게 하지?' 이 생각이 들었을까요?
물론 병원에서 사진 찍는 것처럼 단층으로 편편히 잘라서 보면 그 마음속에 이런 갈등도 있었고, 갈등을 극복하는 마음도 있었고, 확신하는 마음도 있었고, 이런 과정을 거쳐서 어떤 마음에 확신이 들었겠지만 일단 모든 것이 신속히 정리돼서 그 마음에 그 순간 있었던 것은 '못 일어나면 어떻게 되지?' 하는 마음은 이미 사라졌던 것입니다.
그 마음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말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마음이 솟구쳐 올라와서 그는 담대하게 그도 모르게 외친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성령 충만의 상태라고 합니다.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들 수 없는 이와 같은 극적인, 내 마음의 뜨거운 열정이 솟구쳐 오르는 이와 같은 뜨거운 열정의 믿음의 상태, 절대적인 믿음, 절대적인 확신의 상태-바로 이런 상태가 성령 충만의 상태입니다.

여러분 골리앗을 향해 달려가는 다윗의 모습을 봅시다.
골리앗의 우렁우렁함에 이스라엘 백성들, 군사들이 다 엎드려 있어요. 그런데 이 다윗은 담대히 나아갑니다. 너는 창과 검으로 나에게 오지만 나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노라
그런데 그냥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달려 나갔어요. 달려서 가속도를 붙여서 가속도 붙인데다 또 물맷돌을 돌려서 그 가속도를 더해서 골리앗의 이마에 정조준 했단 말입니다.
또 생각해 봅시다. 던지려고 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나면 어떻게 합니까?
'만약에 못 맞으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 어떻게 했겠느냔 말입니다. 못 맞히면 저 거인 골리앗에게 나는 단칼에 죽어버릴 텐데. 나 죽는 것은 뭐 어쩔 수 없어. 그렇지만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왔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내 백성은 또 어떻게 되나? 라고 생각해 보면 이것은 하늘이 노랗게 보일 겁니다. 그런데 그 순간 다윗에게는 내가 저 머리를 못 맞추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단번에 맞출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서서 맞추기도 어려운데 달려가면서 맞힌다는 것은 이것은 대단한 확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 순간 다윗의 마음에는 무엇이 보였겠습니까? 아마 하나님의 은혜로 골리앗의 이마가 하늘만 하게 보였을 겁니다. 아무데나 던져도 다 맞을 것 같은 이와 같은 그의 목표가 너무나 커 보였을 겁니다. 그게 뭐죠? 확신입니다. 주님이 주신 확신이지요. 이거 안 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마음이 조금도 안 일어난단 말입니다. 일어났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것을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 절대적인 확신이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상태는 순간적으로 잊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볼까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바로에게 달려가는 모세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바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모세는 히브리 백성을 괴롭히는 애굽사람 한 사람을 죽여서 살인자로 자기가 죽음을 당할까봐 왕궁을 도망쳐 나와서 미디안 광야에 숨어서 40년을 양치기했습니다. 모세의 이전 능력은 아닙니다. 40년 전의 능력이 무슨 능력입니까? 모세는 그냥 양치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어요. 그랬더니 그는 도망쳐 나온 바로의 궁으로 가서 바로에게 담대히 외칩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단호한 외침이었습니다.
도대체 모세의 마음에 바로를 피해서 도망쳐 나왔는데 그 바로 앞에 가서 담대히 얘기했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분명히 그 마음속에 담대한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일을 이루시리라
모세는 바로를 보고 얘기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뒤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시켰으니까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바로에게 그 말을 한 겁니다.

모세를 봅시다. 뒤에서는 바로의 마병이 따라와요. 그냥 출애굽 시킨 것 분해서 죽이려고 따라오고 있습니다. 바로 코앞에 닥쳤지요. 그런데 앞은 홍해입니다. 백성들은 거기서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가지고 가르치면서 홍해를 가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아, 하나님 저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생각했지만 순간, 안 갈라지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났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럼 주춤거렸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단번에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지팡이를 가지고 갈랐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면 그 순간, 그 순간의 마음의 심적 상태를 따질 때 이게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절대적인 확신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셨으니 나는 한다. 그 이유는 반드시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된다라는 뜻이지요.
이런 절대적인 믿음, 절대적인 확신입니다.

오늘 백부장에게는 그와 같은 마음의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모든 상태는 순간 보이지 않고 주님만 확대되어 보인 것입니다.
구조적인 순차로 따지고 보면 갈등도 있고, 극복도 있고, 그 가운데 또다시 일어나는 과정이 있겠지만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한꺼번에 뭉뚱그려져 그 마음속에 뜨거운 열정과 열기로 달아오른 겁니다. 그저 모든 곁길이 순간 다 없어져버리고 마음이 뚜렷한 한 가지 길만 보여서 내가 달려갈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게 우리들에게 있어서 절대 믿음, 절대 확신의 순간입니다.
이때가 바로 성령 충만한 순간이고, 이때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주의 역사를 이루는 순간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자들의 뜨거운 열정을 생각합니다. 마음의 기대가 그로 하여금 어떤 행동도 불사하게 하고, 어떠한 대가도 치르게 하고, 어떠한 순간도 기쁘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희,노,애,락 정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이루어지는 뜨거운 열정의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대를 품고 주님 앞에 나아와 결국은 공개적인 상황 속에서 마침내 자기 자신을 잊은 상태에서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담대히 간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께 간절히 고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그러시냐면 "가서 내가 고쳐 주리라"
예수님이 그 사람을 보니까 참 범상치 않아요. 자기 종의 병 때문에 자기의 직책을 내려두고 예수님 앞에 와서 이렇게 정말 간절히 구하는 것을 볼 때-공개된 장소에서 구하는 것을 볼 때-예수님께서 첫째, 저 사람은 참 자비가 많구나! 라고 생각하고 또 나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을 보니까 믿음도 많구나! 라고 생각하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그랬더니 뭐라고 얘기하지요?"주여 내 집에 들어옴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삽나이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8장 9절>을 보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하면 오고 내가 종더러 이것을 하라하면 하나이다" 이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백부장이 예수님께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자, 저를 보세요.
나도 남의 수하에 있고 내 수하에도 여러 종졸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하라고 하면 합니다. 절대적인 권한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는 절대적인 권한이 있는 겁니다. 무슨 얘기지요?

예수님은 온 세상의 만물을 통제하는 권한이 있는 분으로 나는 확신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되실 겁니다. 라는 것을 믿고 있는 상태입니다. 즉 예수님께 대한 인식자체가 바로 절대적인 구주로서 예수님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내 집에 오는 것을 저는 감당하지 못합니다. 말씀 한 마디만 해 주셔도 다 됩니다. 이게 뭐죠?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만 먹어도 나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라는 마음과 똑같은 겁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의 은혜를 분명히 파악했기에 자신의 누추함을 여실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겸허해지고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큰 은혜 앞에 우리 자신의 누추함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누추함은 우리로 하여금 좌절과 낙심을 하게 하는 누추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게 하는-기대하게 하는 이와 같은 우리 자신에 대한 깨달음의 누추함이요, 회개에 이르게 하는 누추함입니다.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겸손에 이르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큰 역사를 이루게 합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권능에 대하여 분명히 알고 이해하고 확신을 가졌던 겁니다.
마치 내가 내 종졸에게 가라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는 것처럼, 또 내 위에 있는 사람이 내게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것처럼 주님께서 모든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주님의 뜻대로 된다는 겁니다. 확실하게 알고 믿었던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나 여건 때문이 아니라 어떤 상태에서도 예수님 말씀 한마디만 하면, 의도만 가지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절대 믿음, 절대 확신이지요.
우리 삶에서 과연 상황을 능가하는, 내 상황은 너무 작아 보이고 주님의 은혜가 확대되어 보이는 순간, 그것이 바로 주님이 나타나시는 은혜의 순간이지요.
여러분 우리의 기도의 체험이 언제 나타납니까? 정말 기도하다 기도하다보니까 어느 날 문득 다른 모든 상황들이 작아 보이고 그거 아니네, 별거 아니네, 그리고 주님의 은혜가 내 마음속에 뜨겁게 와 닿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 '아,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시는구나!' 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겁니다.
주님의 은혜의 역사는 결국 내적 투쟁을 거쳐 외적 실제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오늘의 문제는 하인이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얘기가 무엇이냐면 백부장의 믿음이 주님 앞에 칭찬을 받았다는 사건입니다.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내적으로 여러 투쟁이 있었겠지요. 이 백부장의 믿음이 그냥 있었겠습니까? 하늘에서 뚝 떨어졌겠습니까? 이 백부장도 예수님을 이때 만나기는 했겠지만 그도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고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보고 나름대로 그 믿음을 키워 왔던 것입니다. 백부장이 그냥 이런 믿음을 가지지 않고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또한 백부장의 믿음이 크다는 것이 거론되는 것을 보니 우리는 정말 우리들에게 있어서 믿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앙은 체험적 확신이 필요합니다. 삶의 실제에서 검증된 믿음의 역사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여러분 한 번 봅시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하고 그 시로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을 고쳐주신 겁니다.
백부장의 믿음 때문에 병이 고쳐졌겠습니까?
예수님의 능력 때문에 병이 고쳐졌겠습니까?
우리는 정확히 파악해야 됩니다. 자, 이렇게 설명 드릴게요.
내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내가 기도해서 응답을 받은 겁니까?
주님의 사랑과 자비 때문에 응답을 받은 것입니까?
만약에 내가 기도해서 그 기도의 대가로, 기도의 공력으로 내 마음의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졌다면 이것은 공력사상, 공로사상입니다. 내가 이만큼 기도했으니 그만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셔서 나에게 이와 같은 일을 이루어주셨으니 이것은 기도가 공력이 되고 공로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내가 정말 간절히 기도했지만 기도한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였고,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셔서 기도하게 한 것이었고,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자비로 나를 고쳐주시고 해결해 주셨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에 대한 우리 신뢰입니다.

내가 기도할 수 있었던 조차도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리고 나는 기도한 것에 대해서 내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순전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로 내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해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상적인 믿음과 겸손한 삶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내 공력으로 어떤 일을 이루었다고 하면 우리는 은혜 받을수록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공력 때문이니까. 내 노력 때문이니까.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역사와 사랑이, 은혜가 위치할 곳이 없지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서 크게 확대경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병을 고쳐주시면서 표현을 하시기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믿음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또한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너무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의 길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해서 병이 나은 것은 아닙니다. 내가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셔서 내 병을 낫게 해 주신 겁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간절한 믿음으로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입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기도는 공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자비요, 은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와 같은 믿음이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겁니다. 절대적인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삶의 상황이라는 것은 수시로 달라집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던가요?
거의 그런 일은 적고 정말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짐으로 과거의 어떤 어려움을 해결해주시는 것이 일반적인 성경의 기술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은 결국은 우리들에게 최종적인 결과를 승리로 이루게 하는 겁니다.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어려움도 있으나 극복하게 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이제 웬만한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여기지 않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바라보며 씩씩하게 달려가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적거인들이 되는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그 믿음, 즉 절대적인 확신을 보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주님입니다.
오늘 <13절>을 보니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그 하인이 나으니라"
자, 우리 따라서 합시다.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저는 이 말씀이 너무너무 좋아요.
제가 한 이십년쯤 전에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했는데 여러 번 제가 설교한 것 같아요.
제가 거의 다른데 설교하러 갈 기회도 없고 가지도 않지만 어디 가서 설교할 기회가 있으면 제가 이 구절은 꼭 말씀을 드려요.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이 무슨 축복이지요? 믿음의 축복입니다.
예수 믿어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축복은 값없이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받은 자들이 우리의 생활 속에 주님의 믿음을 실현하고 적용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은 바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믿음의 큰 축복의 역사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생각속의 믿음이 손과 발의 믿음으로 바뀌어지게 하기 위해서 실현하는 것이지요.
늘 말씀드리지요.

우리는 선언하는 교회가 아니라 실천하는 교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선언하는 교인들이 아니라 실천하는 교인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관념적인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행동하는 실천하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믿은 대로 될찌어다
믿은 대로 행동하고, 믿은 대로 이루어지고, 마침내 주님께서 과정을 거쳐서 아름다운 결과를 주시는 것이지요.
주님은 오늘 믿은 대로 되리라 말씀하심으로 우리의 믿음에 강조성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믿음은 믿음의 사람에게 가장 확실한 자산이요, 은혜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 한 순간에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너희가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어도 때때로 그것이 헛되도다 라고 말씀하잖아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그렇게 원해도 안 되는 때 있고, 그렇게 노력해도 안 되는 때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겁니다.

언젠가 병원에 심방간 적이 있어요. 여기 가까운 삼성병원에 심방간 적이 있는데, 나오는데 그 현관이 있는데서 당시에 늘 신문에도 나오고 사회에 아주 유익한 일을 하던 이런 사람이 있는데 제가 얼굴을 알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의젓하게 걸어 들어가더라고요. '저분도 병원에 올 일이 있나보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디 아프신가? 아니면 검진이라도 받으러 왔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일 년쯤 뒤에 그 분 사진을 신문에서 봤습니다. 투병 중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이와 같은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 때 그 일 년 전에 봤던 그 분 모습이 생각이 났어요.
아, 그래서 이렇게 병원에 출입을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더 오래 있었으면 많은 사람에게 좀 더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참 유능하고 또 열심히 사는 사람이 안타깝게 먼저 갔구나!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우리 맘대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열심히 살아보려고 해도, 또 무엇인가 누리려고 해도, 그것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보장받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느 날 문득 '후' 하고 불면 우리의 호흡도 사라집니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느 날 문득 '후' 하고 바람 불면 모든 것이 그야말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날개 달고 날아가는 것과 같은데 새에게 재앙의 그물이 덮침과 같이 홀연히 임한다고 했는데 도대체 우리의 삶이 무엇을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루하루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연명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먹고 연명하는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조금 더 좋은 여건이면 감사하고, 어려운 여건이면 더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주어진 여건 속에 애를 쓰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그 가운데서도 믿은 대로 됩니다.
내 삶이 어떻게 될까? 믿은 대로 됩니다.
우리 성도님들, 따라서 한 번 합시다.
"믿음의 끈을 놓지 맙시다."
"어떤 경우에도 확신의 끈을 놓지 맙시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 어깨를 잡고 막 흔들면서라도 정말 믿은 대로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한 번 그래볼까요? 옆에 있는 사람 서로 어깨를 한 번 붙잡고.
정말 믿은 대로 됩니다.

여러분, 무슨 한이 있어도 믿은 대로 됩니다. 이건 잊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어떤 순간에도 잊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우리 성가대가 제일 액티브하십니다.
여러분 이것 잊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믿은 대로 됩니다.
마음을 지켜야 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내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거기서 난다고 말씀했거든요.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구원을 주셨으니, 나를 사랑함이 변치 않으시니, 결국 나에게 가장 최종적인 아름다운 결과를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가장 큰 자산을 쌓는 것은 믿음을 키우는 일입니다.
분명한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노력은 아니나 우리가 애써야 될 부분도 있어야 합니다. 내 삶의 근거가 믿음에서 우러나는가?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가장 큰 자산인 믿음을 위해 우리는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훈련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서 실천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우리가 힘에 지나도록 애를 쓸 때 우리 믿음이 크는 겁니다.
체육관에 나아가 봤더니 무거운 것 이렇게 드는 것 있잖아요? 정말 더 들 수 없을 때 마지막 한 번 드는 그 순간 그것이 힘으로 자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내가 내 믿음에서는 요기밖에 못해요. 그런데 애를 써서 다음단계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믿음의 진보입니다.
믿음이 있어서 실천을 하지만 때로는 실천을 통해서 믿음이 자라기도 합니다.
믿음이 있어서 헌신도 하지만 헌신해 보니까 그 믿음이 더 자란단 말입니다.
제가 요즘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저희 교회 이제까지 한 번도 봉사하지 않으신 분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봉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남을 돕는 일에 너무 분주해서 하시지 못하는 분들, 어떻게 해서든지 분주한 가운데서도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돕고 애써보세요.
도저히 나하나 살기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내 손과 발로 실천해 보세요.
그럼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의 세계가 훨씬 더 넓혀져 가는 것을 봅니다.
힘도 써야 자랍니다.
믿음도 실천해 봄으로 말미암아 더욱 더 나아가게 됩니다.
헌신도 실행을 통해서 더욱 더 큰 믿음의 자리에 나아가게 됩니다.
믿음의 상태라는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한참 보석같이 빛나는 사람들도 또 내려가기도 하고 또 올라가기도 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주님의 자비와 은혜를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제가 이 말씀을 드리고 말씀을 맺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저희 교회 권사님 한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손주도 계시고 연세도 꽤 드신 권사님인데, 저에게 오신 이유는 기도제목 부탁하고 기도하기 위한 것이지요. 물론.
저보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목사님, 오늘 제가 아주 예쁘게 하고 왔습니다. 한 번 봐 주세요." 그러시더라고요.
나이도 많으신 권사님이 얼마나 예쁘게 하고 오셨나? 해서 제가 또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예, 권사님 오늘 정말 예쁘시네요." 그랬더니 제게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제가 오늘 이 모습이 마지막일지 몰라서 목사님께 꼭 예쁜 모습으로 보여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수술할 날짜를 잡았는데 안면부위에 암세포가 퍼져서 수술을 하셔야 되는데 내가 수술을 하고 나면 내 모습이 어떨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어서 목사님께 지금의 모습을 다시 보여드릴 수 없을 것 같아서 제가 오늘 이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제가 예쁘게 꾸미고 왔습니다." 권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참 한 치를 내다보지 못합니다. 제가 그렇잖아도 몇 주 전에 우리 남자집사님 한 분이 똑같은 그런 경우였습니다. 아직 수술은 하지 않고 있는데 정말 하나님 앞에 마음 아프게 기도하시면서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계셔서 그렇잖아도 제 마음이 쓸리면서 기도하고 있는데 똑같은 경우를 보고 이 분은 또 수술날짜를 잡았다고 하시니까 그 권사님 너무너무 마음이 찌르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믿음을 가졌어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내 믿음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 아니고 내가 또 어떤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의연한 믿음을 봅니다. 비록 내가 내 안면, 이 얼굴의 윤곽자체를 유지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이 와도 그래도 나는 예수님 믿고 주님께서 나를 인도하셨다는 것을 믿고 살아갈 겁니다. 그러나 내가 다시는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없고 사람 앞에 때로는 나서기 힘든 내가 난처한 지경이 될지 몰라도 그래도 이 모습 목사님 앞에 한 번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그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그 권사님 수술하셨으니까 이제 붕대 풀고 하면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할 것 같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내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내게 주어진 상태 속에서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 상태 속에서 내가 주님 앞에 최고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최선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내가 할 수 있을 때 헌신하고 내가 주님 앞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있을 수 있을 때 그 모습으로 아름답게 주님 앞에 보여드리고 드려질 수 있는 것, 이것이 우리 아름다운 믿음이지요. 그리고 내가 어떤 어려운 상태에 빠지면 그 상태 속에서라도 내가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내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은혜의 확신을 가지고 그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시간이 됐는데 권사님이 한 번 가시면서 늘 일찍 예배를 드리시는 권사님이신데
"목사님 저를 위해서 좀 기도를 해 주세요." 그러시더라요. 그래서 여기 서서 제가 1부예배때에는 저기 뒤에서 인사를 하잖아요. 저는 피부암이라는 것을 처음 봤습니다. 여기에 암세포가 퍼져서 그 주일에 손을 절단하러 수술하러 가신데요. 그래서 목사님 기도해달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이 손만 절단하면 된다고 합니다. 하면서 굉장히 소망에 차계시더라고요.
저는 마음이 아프잖아요. 멀쩡한 권사님이 갑자기 손가락을 절단해야 한다고 하니까 정말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또 마침 저희 교회에 피부과하시는 선생님이 계셔서 제가 여쭤봤더니 그건 정말 잘된 경우라고 하시더라고요. 조금 더 지나면 손목을 절단해야 된데요. 이게 퍼지면. 조금 더 가면 팔 자체를 절단해야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권사님이 오늘도 1부 예배에 나오셔서 제가 나갈 때 손을 만져드렸는데요 수술하고 오셔서 그렇게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기뻐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셔서 내가 이렇게 잘 활동할 수 있고 요 손가락 하나만 절단해서.
오늘도 제가 이 뭉툭한 손가락을 제가 만져드렸습니다.
늘 아침에 일찍 오시는데 나가실 때 제가 늘 악수하면서 그 손가락 뭉툭한 부분을 만져드려요.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것 늘 가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문득 내 곁에 있던 모든 것들이 하나 둘 떠나가 버릴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언제 어떤 때에 그런 상황이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언제 어떤 때에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내게 주어진 현재것가지고 내가 하나님 앞에 최고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내게 주어진 어떤 여건이 되면 그 가운데 나로서 할 수 있는 또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뻐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절대 확신, 절대기대 믿음을 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는 소원을 안 들어 주셨다고 마음 상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기뻐하며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고 그리고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들을 마음에 확신하며 그대로 나아가는 겁니다.

우리 올해 '잡석이 보석되자.' 라고 생각하고 '일 년이면 충분하다.' 라고 생각하고 우리 출발했습니다. 한 달 지난 지금 우리 성도들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에이, 뭐 내가 그렇지. 뭐. 삶이라는 것이 그렇지. 뭐. 뭐 그렇게 특별히 달라지겠어?"
우리 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믿은 대로 될찌어다. 라고 생각하며 끝까지 우리 자신을 덮쳐오는 모든 세상의 파도와 내 자신을 낙심시키는 생각의 파도들에 대해서 끝까지 저항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대로 나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백성의 합당한 자세입니다.

저는 오늘도 주를 바라보는 믿음의 백성들의 마음에 이런 마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올 한해 내내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붙잡고 흔들리지 말고 주의 역사를 이루시기를 간절히 소원 드립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