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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의 하나님 (눅 1:6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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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하나님 (눅 1:67~80)

미국 워싱턴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 엘리자베스 로터스는 심리실험 몇 가지를 하였습니다. 그 중 한 가지가 사람들에게 먼저 빨간색 신호등을 보여준 후 “아까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었던 색이 노란색이 아니었던가요?” 라고 묻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방금 전에 살짝 지나가면서 틀림없이 빨간색을 보았음에도 그 힌트 때문에 노란색으로 기억하였습니다. 그래서 로터스 교수는 우리 인간의 기억력은 아주 작고 미묘한 힌트에 의해서 손쉽게 오염되고 왜곡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광고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 많은 돈을 들여서 신문이나 TV에 광고를 하고 차를 타고 다니면서 슬쩍 스쳐 지나 0.1초도 보지 못하는 거대한 광고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효과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 두려운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효과가 우리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작용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아닌 것을 가지고 기독교라고 말하고 교회가 아닌 것을 두고 이것이 교회라고 되풀이해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어느 덧 어느 때가 되면 그것이 기독교인가부다 저것이 교회인가부다 라고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역사가 중세의 기독교와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중세의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기독교도 아닌 것, 교회도 아닌 것을 계속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저런 것이 기독교이구나, 교회구나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여행하면서 보는 유럽의 대단한 성당건물들이 사실 어떤 사람들이 낸 돈에 의해서 지어졌는지 아십니까?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교회를 짓는데 돈을 얼마만큼 내면 지금까지 지은 죄가 다 사해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더 극명하게 이야기한 예를 보면 헌금함에 돈을 넣었을 때 돈봉투가 밑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그 사람은 위로 올라간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믿지 못할 이야기이지만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믿었습니다. 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군 전쟁에서 그것이 과연 옳은 전쟁인지 생각하지 못하고 무작정 사람들을 죽고 죽였습니다. 이 시대를 기독교의 암흑기(Dark age)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가능성은 지금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오늘날의 기독교 또 오늘날의 교회가 또 다시 기독교의 암흑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또 다시 종교개혁을 필요로 하게 될 가능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런 오염과 왜곡에서 벗어나 바른 길로 갈 수 있으며 바른 기독교, 바른 교회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흔들리지 아니하고 왜곡되지 아니하고 오염되지 아니하는 확실한 기준과 지표가 있어야합니다. 종교개혁 당시 종교개혁자들은 그것을 성경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때 나온 이야기가 'Sola Scriptura' 라는 이야기입니다. 오직 성경으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위치에 있는 종교지도자의 말이라도 또 아무리 오래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받들고 있는 교회의 전통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교회의 지표, 기독교의 기준이 될 수 없고 기준은 단 하나 성경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또 다시 종교개혁을 필요로 하는 일이 있기 전에 또 다시 교회가 오염되고 왜곡되고 기독교가 잘못되는 길로 가기 전에 그 어떤 것보다 거듭 성경을 상고해야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쓴 책인 누가복음 첫 장은 상당한 분량을 세례요한에게 할애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부모인 사가랴와 그의 아내는 나이 많도록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의 아버지 사가랴가 제사장으로 성전봉사를 하고 있을 때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 당신이 조금 있으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에게 또 예수의 어머니에게 했던 이야기를 똑 같이 하고 있으므로 그만큼 비중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또 아이를 낳으면 아들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사갸라는 나이가 많은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라고 말했는데 그 때 천사는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예수님에 대해서 할애했던 분량만큼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너는 그것 때문에 아이를 낳을 때 까지 말 못할 벙어리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고 실제로 아이를 낳을 때까지 입을 열지 못합니다. 아기를 갖지 못하던 엘리자벳이 잉태하게 되었고 세례요한을 잉태한 엘리자벳을 성자님을 잉태한 성모마리아가 찾아오게 됩니다. 이런 영광을 성경은 부여하였습니다. 드디어 엘리자벳이 아이를 낳았고 열 달 동안 말을 하지 못하던 사가랴가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입을 열게 된 사가랴가 출생한 자기 아들 세례요한을 두고 긴긴 찬양을 하였는데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를 말씀하시는 누가복음 첫머리에 이것을 말씀하셨는데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일까요? 세례요한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귀한 사람으로 집중부각 시키고 그 아버지, 어머니도 무대중앙으로 모셔놓고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주는가? 이것을 보아야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기 위해서 성경의 다른 경우를 보겠습니다. 먼저 모세를 봅니다. 모세는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운데 이분보다 위대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집트 왕 바로를 제압하였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로부터 해방시킨 위대한 장군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친히 부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친히 대면하지 않으신데 모세는 친구처럼 대면해서 이야기하던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사십 년 동안 히브리 민족 약 이백만 명을 성공적으로 잘 인도한 대단한 민족의 영도자였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일백이십 세로 죽을 때 눈이 흐려지지 아니하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한 사람이 바로 모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왜 그렇게 높이셨을까요? 모세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도리어 모세는 그럴만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 노예를 왕자로 앉혀주셨는데 그 자리를 챙기지 못하고 혈기로,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해보려고 하다 왕자자리까지 잃어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멀리 도망가다 목동이 되었습니다. 당시 목동은 참으로 초라한 직업이었습니다. 그리고 오갈 데 없어 처가살이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모세였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위대하고 대단한 인물로 부각시켜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서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할 사람이라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세는 틀림없이 하나님 뜻을 이룰 것이고 하나님 뜻을 이루는 것을 자기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을 사람이라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이렇게 위대하게 해주셨습니다. 단지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또 요셉을 보겠습니다. 그의 꿈해석 능력은 대단했습니다. 감옥 속에서, 바로 앞에서 꿈해석을 했습니다. 얼마나 지혜가 좋았습니까? 그리고 감옥살이를 하던 노예 요셉을 하루아침에 이집트의 제 2인자가 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던 노예 요셉 앞에 이집트 전국민이 무릎을 꿇도록 만들어주셨고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곡식을 사겠다고 그 앞에서 허리를 굽혔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왜 그렇게 복을 내려주셨을까요? 그의 삶이 괜찮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요셉은 아버지의 편애를 받아 형제간의 우애를 다 깨뜨린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을 상처입은 형들로 만들었던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요셉은 아무리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틀림없이 나를 이해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무슨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것을 요셉에게서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요셉은 화가 나고 형들에게 이런 저런 말을 다 하고 싶어도 형님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형님들의 마음속을 주장하셔서 나를 먼저 이집트로 보내주신 것이고 형님들은 하나님의 도구노릇을 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을 드러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요셉은 자기를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에게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득죄할 수 있습니까?’ 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여호와라는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던 보디발의 아내에게 이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감옥 속에서 절절 메고 있었을지라도 꿈에 대해서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합니까?’ 라고 하나님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신 것입니다. 감옥 속에서 꿈을 해석해준 술맡은 관원장도 요셉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을 때 이집트 왕 바로가 불렀을 때 자신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여호와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주실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를 세우신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도 모세도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앞으로 그렇게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어떤 사람이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입니다. 지금의 내 나이, 내 직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그가 무엇을 할 것인가? 과연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드러낼 것인가?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다른 사람이 예수를 알게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것을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서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으며 얼마나 대단한 사람으로 만드셨습니까? 엘리야는 당시 서슬이 시퍼렇던 아합 왕 앞에서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통해서 먹을 것을 공급해주셨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움을 당할 때 까마귀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한 과부가 목숨만큼 귀한 양식으로 자기와 자기 아들을 뒤로 한 채 엘리야를 섬기자 그 집 양식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자 죽은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바알신 450명이 아무리 기도해도 하늘에서 응답이 없었지만 엘리야 한 사람이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응답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엘리야가 기도했더니 삼년 반 동안의 가뭄이 끝이 나고 장대같은 비가 쏟아졌고, 엘리야가 맨발로 뛰어나가자 왕의 마차보다 더 빨리 나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엘리야는 이렇게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도 엘리야처럼 이렇게 위대한 사람으로 만드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합이라는 왕 때문에 온 국민들도 똑같이 죄를 짓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생길 때 자기를 돌보지 아니하고 하나님 당신의 일을 할 사람을 찾다가 디셉에서 엘리야라는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얼마나 기쁘셨는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그가 잘한 일이 하나도 없어도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증거할 것이며 내 일을 충성스럽게 하고 순종할 것이라는 것을 보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런 것을 보십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어떤 귀한 일을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아합왕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못해 실망하셨습니다. 그래서 삼년 반동안 비 한 방울 오지 않을 때 아합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처럼 착각하고 호령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엘리야를 가리키면서 당신과 함께 하고 당신에게 순종하고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생명을 아끼지 아니할 때 그처럼 위대하게 해주신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엘리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지학교 생도미망인이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엘리사는 빈그릇을 가려오라고 하여 한정없이 채워주었습니다. 엘리사도 마찬가지로 죽은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자 아이가 살아났고 이스라엘을 침공하려고 하는 강대국이 침략하려는 작전계획을 세울 때마다 세우는 즉시 엘리사는 다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를 찾아가서 병을 낫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엘리사는 요단강물에 일곱 번 목욕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시키는 대로 목욕하자 문둥병살이 다 없어지고 어린아이 새살처럼 되었습니다. 이런 일을 한 사람이 바로 엘리사입니다. 심지어 나중에 엘리사가 죽어 다 말라 시체밖에 없었을 때 어떤 사람들이 장례를 하다 위급한 일이 있어 장례를 하던 시체를 엘리사가 있던 무덤에 던져버리고 갔습니다. 죽은 시체가 다 말라버린 엘리사의 마른 뼈에 부딪치자 살아났습니다. 엘리사는 위대한 스승 엘리야를 코흘리개 아이처럼 따라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도 그 위대한 스승보다도 더 위대하게 할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미련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나라가 이렇게 어려울 때 그 하나님을 두고 어디에 의지하고 있습니까? 가정에 힘이 들고 어려운데 마른 뼈로 죽은 사람을 살릴 수 하나님을 두고 어디에 의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드러내고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당신이 엘리야에게 주었던, 엘리사에게 주었던 그 능력과 요셉과 모세에게 주었던 그 위대함을 줄 수 있었을 텐데 어디 가서 그렇게 초라한 모습을 연출하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요한은 잘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을 한없이 높이고 세례요한 때문에 그 아버지 어머니를 높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이 세례요한은 이제 뒤에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예비할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자기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기 이름, 자기 얼굴을 내지 않고 오로지 예수를 드러낼 사람이고 충성스러운 종이 될 것이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들에게 자기는 뒤에 오실 분의 신발 끈도 메고 풀 정도도 되지 못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오로지 예수만 이야기하고 예수만 높였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위대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럴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을 위대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선포하고 예수를 드러내고 하나님 뜻을 이룰 자에게는 위대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이 되십시오. 내 소원을 뒤로 두십시오. 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결단하십시오.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하나님을 선포하고 예수를 증거하는, 하나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결단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을 위대하게 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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