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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경건에 붙잡혀 사는 사람 (행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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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에 붙잡혀 사는 사람 (행 10:1-8)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던 중년 남자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깜짝 놀란 아내가 황급히 의사를 불렀고 의사는 도착하자마자 부인에게 절대로 들어오면 안 된다는 주의와 함께 방문을 닫았습니다. 1분이 지나자 의사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와 부인에게 펜치를 갖다달라고 합니다. 부인은 서둘러 펜치를 찾아 의사에게 갖다 주었고 들어간 지 5분이 지나 의사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다시 나오며 드라이버랑 망치도 갖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무슨 큰 병인가 싶어 걱정하며 연장들을 챙겨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또 5분이 지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의사가 문밖으로 나오며 톱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아내가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방안으로 달려 들어가며 도대체 무슨 병이냐고, 죽을병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의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부인 진료 가방이 안 열려요!"하며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 있습니다. 이리 저리 진료를 마친 뒤 하루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 했다는 의사의 말에 부인이 무슨 중한 병이라도 되는 줄 알고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의사 왈"그게 아니라 제 말은 하루만 늦게 왔어도 남편의 병이 다 나아 버릴 뻔했다 이겁니다."하더랍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가만히 보면 때로는 본질적인 것은 놓치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논쟁하거나 고민하거나 갈등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사실 처음부터 본질 적인 문제를 인정하고 생각했더라면 아무 것도 아닐 수가 있는데 괜히 비본질적인 것을 가지고 빙빙 돌다가 정작 핵심은 잃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런데 종교에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 심각합니다. 신앙 생활하는데 있어서도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한다는 말 자체가 월권입니다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제도적인 문제로 한 사람의 신앙을 판단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그 사람의 신앙의 본질을 어디에다 두는 것이 맞습니까? 교회 다닌 햇수가 그의 신앙을 말해줍니까? 아니면 그 직분이 그 기준입니까? 학력입니까? 출신성분입니까? 외모입니까? 재력입니까? 이 모든 것들은 모두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것들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신앙적 경건의 모습입니다.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신앙하는 자세가 어떠한가, 또한 실제적인 생활 속에서의 신앙의 모습은 어떠한가가 본질적인 경건의 문제입니다. 물론 이 경건이라는 말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의 신앙의 모습들이 담겨 있습니다. 성품과 인격에서부터 순종과 헌신, 말과 행동까지를 포함한 신앙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신앙 생활하는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어지는 참모습이 경건이라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경건하게 살았다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원래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사람이었습니다. 즉 신앙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서 신앙을 받아들였고 뿐만 아니라 신앙의 그 형식만 가지고 산 것이 아니라 진정한 신앙의 내용까지도 갖추고 살았던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의 정확한 신분은 로마 사람 백부장이었는데 그의 신분이 어쩌면 예수를 믿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예수를 믿은 겁니다. 그는 가이샤라를 점령한 군인이요, 아쉬울 게 없는 부자요, 이방인인데 이 사람이 예수를 믿고 경건하게 살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나 당시 정황으로나 특이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사실 앞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특별히 경건이 과연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서 생각해봅니다. 오늘 이 사람은 로마 사람입니다. 정치적으로는 당당한 로마 군인이요. 문화적으로는 헬라 철학에 도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종교적으로는 피지배계급인 점령지에 사는 그 나라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 자체가 가지는 의미는 대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보면 참 어렵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기 시작한데는 눈물 나는 이야기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예수 믿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믿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을 보면 정말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 반면에 가만히 보면 정말 조그마한 것이거나 또 별것도 아닌 것을 극복하지 못해서 예수 못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내가 명색이 그래도 사회에서는 인지도가 있는데 교회 나가서 젊은 사람들 뒤에 서서 따라가게 생겼느냐'고...'내가 세상을 살아도 한참을 더 살았는데 교회 나가서 젊은 목사가 하는 설교나 듣게 생겼냐'고...어떤 사람은 부인이 집사인데'이제 나가서 예수 믿기 시작하면 마누라 치마꼬리 붙잡고 따라 다니는 것 같아서'못간데요. 그러면서 장로 시켜 주면 나가겠답니다. 별것도 아닌 자존심 때문에 예수 못 믿는 참 답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에 그까짓 자존심이 문제입니까? 그 시각으로 오늘 성경을 보면 로마 군인이 점령지에 와서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참 어려운 겁니다. 고로 로마 군인 고넬료가 여기서 그 피지배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경건하게 살았다는 것은 대단히 크게 평가해야 되는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든지 이미 오랜 전부터 믿었든지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내 체면이나 내 자존심 따위는 접어 두어야합니다. 교회 안에는 누구든지 봉사자요, 헌신자의 모습으로 서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장관도 안내자요, 사장도 봉사자입니다.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만 대통령에 당선 된 이명박 당선인도 장로님인 걸 모르는 분이 없을 텐데 이 분은 대그룹 사장 시절 때도 교회에서 주차 관리 하셨지 않습니까? 장로가 되기 전부터 된 이후에도 한결같이 봉사자의 모습으로 섰을 때에 하나님이 높여 주셨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고넬료라는 군대장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에 그의 직책이 명예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정말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부분이 성경에 나오는데 2절입니다."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하는 부분입니다. 얼마나 부럽습니까? 아마 오랫동안 교회 나오면서도 혼자 와서 예배드리는 분들이 참으로 부러운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람은 자기가 믿고 귀한 신앙이기 때문에 온 친척, 온 집으로 더불어 믿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올 해 여러분의 신앙 목표도 가정을 인도하고, 자녀들을 인도하고, 친척을 인도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경건한 생활을 하는 목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이 사람의 신앙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경에"항상 기도했다."그랬습니다. '항상'이라는 말에는 일상적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신앙 생활하는 우리들을 가만히 보면 병들면 기도하고, 실패하면 기도하고, 억울하면 기도하고, 꼭 기도할 때가 따로 있거든요. 그러나 이것은 옳은 경건이 아닙니다. 경건은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이 있건 없건 항상 기도하는 것이 경건의 습관입니다. 그러니 고넬료가 항상 시간을 따라서 온 집으로 더불어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특별기도 열심히 하는 것 보다 온 집으로 더불어 항상 하나님 앞에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 기뻐하시고 바라는 경건의 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그의 경건의 모습을"구제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신앙이 생활화되면서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정복자로서 그 약소민족에 속한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비참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권력자가 피지배자의 형편을 돌아보는 그런 마음을 가졌고 나은 자가 못한 자의 아픔을 헤아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대단히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경건한 자의 모습입니다.

특별히 오늘 성경말씀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부분은"내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했다."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구제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한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바 된다는데 놀라운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정성껏 하는 일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구체적인 기도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욥바에 있는 시몬을 데려 오라"그럽니다. 순종합니다. 주시는 말씀에 대한 순종, 이것이 경건입니다.

그 다음에는 영접하는 모습을 보세요. 온 집으로 더불어 꿇어 엎드리고 정성껏 절을 합니다. 베드로는 초라한 갈릴리 어부입니다. 고넬료는 군대장입니다. 그리고 같이 있는 사람들도 장교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 절하듯 깍듯이 하니까 베드로가 민망해서 일으키면서"나도 사람이요."할 정도로 얼마나 진실하고 경건했던가를 말해주는 겁니다. 그뿐 아니라 모두가 함께 얘기합니다."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말씀을 듣기 위하여 우리가 다 여기 있습니다."베드로 앞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는 신앙적으로 하나님 앞에 있다고 대답합니다. 이래서 큰 역사가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도 이 장면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라는 사람을 본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한 것입니다. 여기에 경건의 모습이 있습니다. 예배의 경건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경건이 있었습니다. 큰 역사가 나타나고 마침내 고넬료의 가족이 다 세례를 받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들은 로마로 돌아가서 교회를 세우는 하나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일꾼이 됩니다. 너무너무 귀한 일 아닙니까? 그는 귀족 의식이나 계급의식이나 자존심이나 자기 명예를 다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영접하면서 하나님 앞에 있는 그 말씀을 듣는 복음적 경건이 있었기에 이방사람으로서 온 가족이 구원을 받는 첫 번 열매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소중하게 쓰여 지는 자가 됩니다. 오늘 우리들도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이 놀라운 경건의 능력을 가진다면 내가 변하는 역사, 교회가 달라지는 역사, 하나님의 나라가 넓혀지는 역사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의 신앙 속에서 우리의 경건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봅시다. 그리고 경건의 모양뿐만이 아니라 진정한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보며 얼마나<경건에 붙잡혀 살아가는 나>인지를 깊이 생각함으로 남에게 보이는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는 경건의 능력을 소유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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