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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로운 생활(3) (잠 15:16-17, 잠 30: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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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생활(3) (잠 15:16-17, 잠 30:24-25)

(잠15:16-17, 30:24-25)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30:24-25)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1. 맑은 밤하늘에 보석을 뿌려놓은 것처럼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마당에 나와서 그 아름다운 별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별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100까지밖에 셀 줄을 모릅니다. 할아버지는 50까지밖에 셀 줄 모릅니다. 별을 쳐다보던 할머니가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감, 하늘에 별이 저렇게 많네요. 100개도 넘겠어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보기에는 50개도 더 되겠소.”

논리에 의하면 작은 것은 자신보다 큰 것을 담을 수 없습니다. 두 되짜리 그릇에 한 되짜리 그릇을 담을 수는 있지만, 한 되짜리에 두 되짜리를 담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벼룩이 아무리 날고뛴다 해도 개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벼룩이 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만큼 커지고 지능도 높아져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개가 아무리 영리하고 똑똑해도 사람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개와 사람의 차이는 결코 메울 수 없을 만큼 큽니다. 개가 그 차이를 극복하고 인간만큼 지능이 높아진다면 인간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무리 지혜롭다 한들 하나님의 지혜를 다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자를 파악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시계 수리공은 시계의 구조와 기능을 이해하지만, 시계는 시계수리공의 기술과 능력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람과 개의 차이가 크지만, 그 차이는 피조물간의 차이입니다. 그렇게 피조물간의 차이도 극복할 수 없을 만큼 큰데,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피조물 인간의 지혜는 그 차이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사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한 것”(고전1:25)을 체험하고 지혜롭고 강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생활을 위해서는

첫째, 물질이나 사람보다 하나님을 우선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겠습니다. “(잠15:16)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즉 많은 물질보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생활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왕은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세 사람의 유태인이 예루살렘에 찾아왔습니다. 당시에는 은행이란 것이 없어서 세 사람은 가지고 있던 돈을 함께 땅에 묻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몰래 땅 속에 묻어 놓은 돈을 몽땅 꺼내갔습니다. 이튿날 세 사람은 지혜의 왕 솔로몬을 찾아가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그 돈을 훔쳐 갔는지를 가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솔로몬 왕은 ‘너희들 세 사람은 아주 현명하니, 우선 내가 판결에 곤란을 겪고 있는 어려운 문제를 먼저 풀어주면 너희들 문제는 내가 해결해 주겠다.’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떤 처녀가 한 젊은이와 혼인하기로 약속했다네. 그런데 그 처녀는 얼마 후 다른 남자와 사랑하게 되어 약혼자를 찾아가 헤어지자고 했다네. 그 처녀는 약혼자에게 위자료를 지불하겠다고 자청했는데, 젊은이는 위자료는 필요 없다면서 처녀와의 약혼을 즉시 취소해 주었다네. 그런데, 그 아가씨는 돈이 많은 탓에 어떤 노인한테 유괴당했지. 처녀는 노인에게, ‘나는 약혼했던 남자한테 파혼을 요청하자 그 남자는 위자료도 받지 않고 나의 부탁을 들어 주었어요. 노인장께서도 그 사람처럼 나를 자유롭게 풀어 주세요.’ 라고 말했다네. 그랬더니 노인은 그녀의 말대로 몸값을 받지 않고 처녀를 풀어 주었지. 이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칭찬받을 만한 행동을 한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첫째 사나이가 대답했습니다. “처녀가 약혼까지 했으면서도 파혼을 요청하자 위자료도 받지 않고 허락해준 남자가 칭찬을 받아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처녀의 의사를 무시하면서까지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고, 게다가 위자료도 받지 않았으니 남자가 칭찬을 받아 마땅합니다.”

두 번째 사나이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그 처녀야말로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약혼자에게 파혼을 요구했고,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칭찬을 받아 마땅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 번째 사나이가 말했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뒤죽박죽이어서, 저는 통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처녀를 납치한 노인은 돈 때문에 그 처녀를 납치했는데, 돈도 받지 않고서 풀어 주다니, 이야기의 줄거리를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솔로몬 왕은 갑자기 호통을 치며 세 번째 사나이에게 말했습니다. “이놈! 네가 바로 돈을 훔친 놈이다. 다른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사랑이나 처녀와 약혼자 사이의 인간관계와 그 사이에 얽혀진 긴장된 감정에 마음을 쏟았는데, 네 놈은 돈밖에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틀림없이 네가 범인이다!” 물질보다 사랑, 그리고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시는 마음의 지혜로 진범을 가려내는 솔로몬의 지혜를 보여준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이 솔로몬 시대의 부귀영화를 재건하고자 경제성장을 위해 아합 왕의 아들 아하시야 왕과 경제동맹을 맺고 거대한 무역선박을 공동 건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배를 파선시켜버려 북 이스라엘과의 경제동맹을 무산시켜버렸습니다.

(왕상22:48-49)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척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취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의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호사밧 왕이 북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경제 동맹을 맺고 무역선을 공동 건조하려는 것에 대해 경고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 경고의 중요한 이유는 아하시야 왕과 교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하20:37)  마레사 사람 도다와후의 아들 엘리에셀이 여호사밧을 향하여 예언하여 가로되 왕이 아하시야와 교제하는 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지은 것을 파하시리라 하더니 이에 그 배가 파상하여 다시스로 가지 못하였더라

아하시야 왕은 이스라엘 역대 왕 중 우상숭배를 전국적으로 퍼트린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 왕의 아들입니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 역시 부왕과 다를 바 없는 아주 악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여호사밧 왕이 아합과 동맹군 형성하여 아람과의 전쟁에 나갔을 때부터 좋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전쟁에서 두 왕 모두 죽여 버리고자 하셨지만, 여호사밧 왕은 그래도 하나님 앞에 다윗 왕처럼 정직하고 진실하며 철저히 우상숭배를 타파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 생명만큼은 보존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호사밧 왕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을 때, 선견자 예후를 통해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대하19:1-3) 유다 왕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 궁으로 들어가니라.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가로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그러나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이는 왕이 아세라 목상들을 이 땅에서 없이하고 마음을 오로지하여 하나님을 찾음이니이다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우상숭배를 조장하며,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핍박하거나 죽이는 악한 아합을 도와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행위가 과연 옳은 것이냐는 준엄한 책망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생활은 물질이나 사람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살피는 것입니다. 물질관계보다, 인간관계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먼저 살피는 것이 지혜로운 생활인 것입니다. 이를 무시하는 생활은 애써 건조한 무역선을 하나님께서 파선시켜 침몰시킨 것처럼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물질이나 사람보다 하나님을 우선하는 가치관,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신앙생활로 지혜로운 성도의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둘째로, 지혜로운 생활은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 중 그 첫 번째는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라고 했습니다. 개미하면 떠오르는 이솝의 우화, <개미와 베짱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태가 변해서 이 우화가 여러 가지로 각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옛날 한 동네에 개미 부자와 베짱이가 살았습니다. 무더운 어느 날 개미는 열심히 일하고 베짱이는 노래하며 놀았습니다. 아기개미는 베짱이가 부러웠습니다.
“아빠 우리도 일 그만하고 베짱이처럼 노래하고 놀아요.”
“아빠도 놀고 싶지만 지금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겨울엔 굶어죽고 만단다.”
“겨울은 아직 한참 남았는걸요.”
“겨울은 금방 온단다. 얘야, 우리 조금만 참고 일하자꾸나.”
“네..아빠..”

이윽고 찬바람이 쌩쌩 부는 추운 겨울이 됐습니다.
“그때 아빠 말씀 듣기를 잘했어 만약 베짱이처럼 놀기만 했다면 지금쯤 굶어죽고 말았을꺼야.”
“베짱이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착한 아기개미는 베짱이가 걱정됐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싸들고 베짱이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베짱이는 여름철에 발표한 음반이 대박 터져 돈방석에 앉아 스키장에 가고 없었습니다.

요즘 세태를 반영하는 한탕주의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개미에게서 배울 수 있는 지혜는 준비성과 근면성입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이 주는 지혜는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의 준비성입니다. 성도들이 반드시 준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보겠습니다.

누가복음16:1-13입니다.
어떤 부자가 자기 집 관리를 위해 청지기를 두었습니다. 청지기는 집주인의 식사 시중에서부터 그 집의 모든 종들에 대한 관리 감독, 모든 재물 관리 등의 업무를 관장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청지기가 재산을 유용하게 관리하지 못하고 허비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 회계 감사를 실시했습니다. 소문대로 불법이 많았고 재정적자가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주인은 불가피하게 청지기에 대해 해고를 통보했습니다. 당장 일자리를 잃게 될 청지기는 자신의 앞날을 생각해보니 나이 늙어 땅을 파자니 힘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거리에 나가 빌어먹을 것을 생각하니 부끄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살아갈 대책을 세운 것이 채권 위조였습니다. 황급히 집주인의 채무자들을 불렀습니다. 1천 만원 차용증서는 5백 만원으로, 2천 만원 차용증서는 1천 5백 만원으로 각각 바꿔 주었습니다. 청지기가 이렇게 집주인의 채무자들에게 선심을 쓴 이유는 자신이 해고된 후에 채무자들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채권 위조마저 들통이 나서 주인에게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청지기는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의외로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불의한 일에 대해 고소 고발은 커녕 칭찬이라니 참으로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주인이 칭찬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자기 집 재산을 채권 위조라는 부정한 방법으로 축내었지만 그 재물로 친구를 만들어 앞으로 살아갈 궁리를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내일,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를 칭찬받은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은 결코 청지기의 불의한 사기행각을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청지기가 칭찬 받은 지혜는 아주 약삭빠르고 타산적이지만 자신의 미래를 준비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누구나 청지기와 같습니다. 인간은 그 모든 소유나 재능, 그리고 지혜와 능력, 건강 등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살지만 사실 자기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생명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제 아무리 뛰어난 능력과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 해도, 또 아무리 많은 재산과 튼튼한 건강을 소유하고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 ‘오늘밤 여러분의 영혼을 도로 찾으시면 여러분이 예비한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습니까?’(누가복음 12:16-21)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소유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것일 뿐입니다.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밤 청지기된 여러분의 인생을 정리 해고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불의한 청지기처럼 여러분의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시기 바랍니다.”(9절)

여기 예수께서 “불의한 재물”이라고 표현한 것은 재물 자체를 불의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주신 것은 거룩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그 재물을 불의하다 한 것은 주인의 뜻대로 그 재물을 사용하지 못하고, 자기의 뜻과 욕심에 따라 그 재물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 재물은 불의한 재물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어지지 아니하는 삶은 불의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건강, 지식, 재물, 심지어 여러분들에게 있는 모든 지혜와 기능, 가정, 생명,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사용하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것입니다. 경제 위기와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는 잘도 대처하여 살면서 자신의 인생의 영원한 미래를 대비하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여러분,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야 할 일을 망각한 채 하루하루 허송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의한 청지기도 자기의 현실 문제를 파악하여 자기의 다가올 미래를 대처하였듯이 영원한 내일,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사람이 나무를 하기 위해서 함께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잠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나무를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달랐습니다. 중간에 잠시 쉬어가면서 일을 했습니다. 하루의 일과가 다 끝났습니다. 누가 더 많은 나무를 했을 것 같습니까? 뜻밖에도 중간에 쉬어가면서 일했던 사람이 계속해서 일한 사람보다 해놓은 나무가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죽어라고 일만 한 사람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여보게, 틀림없이 내가 자네보다 더 열심히 일한 것 같은데 어떻게 자네가 나보다 더 많은 나무를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친구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당연하지. 나는 쉬는 동안 부지런히 도끼날을 갈았다네.” 쉬는 동안 도끼날을 가는 그 준비성이 바로 지혜인 것입니다. 지혜로운 청지기는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돌아오신다는 사실을 알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주인을 맞을 준비를 다 하고 있다.”(마24:42-51)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고자 하면 인생의 주인 되시는 예수께서 언제 다시 오실까? 보다는 예수는 반드시 다시 오신다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언제 죽을까 보다는 나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언제까지나 주인 행세하는 청지기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해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 청지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지혜로운 생활은 셋째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전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멸망으로 가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인생들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답고 기뻐하시며 영광스럽게 여기시는 지혜로운 생활입니다. 욥기 39:13-18을 보겠습니다.
타조는 웅장하게 날개를 치지마는 그 깃과 털에서 어미의 사랑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것은 알을 땅에 그대로 버려 두어 땅의 열로 더워지게 하고 누가 발로 밟아 그것을 깨뜨리거나 들짐승이 해칠 것을 생각지 못하며 자기 새끼도 마치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무정하게 대하고 수고하고 애쓴 보람이 없어져도 그것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것은 내가 타조를 어리석게 하고 지혜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조가 날개를 펼치고 뛰어갈 때는 말과 기수를 우습게 본다. 타조는 목이 길고, 다리가 아주 튼튼합니다. 평소 걸을 때는 시속 4㎞ 정도이나 적이 가까이 오면 시속 90㎞ 이상 속도를 낸다고 합니다. 타조의 날개 짓은 마치 바람을 낼 것처럼 엄청나게 강합니다. 그러나 정작 타조 자신은 날지를 못합니다. 날개 짓은 그처럼 웅장할지라도 그 깃과 털에서 어미의 사랑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타조는 땅에 알을 낳고 모래로 그것을 따뜻하게 덮지만 그 덮은 알을 까맣게 잊고 그 알이 깨질지도 모르는데 발로 그 위를 밟고 다닙니다. 자기가 낳은 알 걱정을 전혀 안하며 깨지던 말던 까맣게 잊고 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많은 알을 낳아 모래로 완전히 덮지 못했을 경우 타조 알은 광야를 여행하는 사람에게 밟혀 깨어지기 일쑤이고, 또한 다른 짐승들의 먹이가 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타조는 인정 없는 동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를 예레미야 애가 4:3에 “승냥이들도 가슴을 헤쳐 제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건만 내 딸 백성은 사막의 타조처럼 매정하게 되어 버렸구나!”라고 표현했습니다. 구로(?勞), 자식을 애써 낳아 어떠한 수고도 마다하지 아니하고 새끼를 아끼고 사랑하면서 기르고자 하는 것이 어미의 당연지사이거늘 타조는 마치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새끼에 대하여 무정합니다. 다른 새들은 어떻게 해서든 알을 부화시키고자 하는 모성애를 가졌는데 타조는 그렇지 못한 이유를 아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타조를 어리석게 하고 지혜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잘 달리는 말과 그 기수를 우습게 여길 정도로 날개를 힘차게 치며 달리기가 아무리 뛰어나면 무엇하겠습니까? “그 깃과 털에서 어미의 사랑을 찾아 볼 수가 없는데 그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느냐?” 그 날개로는 알을 품지 못하고, 그 깃털로는 새끼를 돌보지 못하는 것은 아무런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보다 빨리 달려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타조의 날개와 다리는 생명과 전혀 상관 없는 일을 하기 때문에 아무 값어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롭고 총명하며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이겠습니까? 바로 생명을 낳고 양육하는 사람입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칭찬과 축복을 받은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녀는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와 불륜의 관계를 맺은 여자로, 도덕적으로 보면 추하고 더러운 여자요, 천하에 몹쓸 여자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면에서 보면 참으로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자입니다. 다말은  남편 엘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자 이스라엘의 풍습과 율법대로 남편의 동생 오난을 통해 생명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오난이 이를 거절하므로 여호와의 진노를 사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말은 다시 그의 동생 셀라를 통해 자식을 얻고자 했는데, 시아버지 유다가 셀라도 그 형들과 같이 죽을 것을 염려하여 차일피일 미루며 허락지 않았습니다. 셀라가 어리다는 핑계를 내세우며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다말은 여자로서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셀라를 기다렸지만, 유다는 셀라가 장성했어도 그를 다말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하여 동침함으로써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음욕에 불타서 그렇게 행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최선의 방법을 택했던 것입니다. 타조와 달리 다말은 그 날개로 알을 품기 원했고, 그 깃털로 새끼를 돌보기 원했던 것입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다말을 위해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기꺼이 생명의 증인이 되어주고 다말을 이렇게 극구 칭찬하고 생명을 잉태한 다말을 축복했습니다.

“(룻4:11-12)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육신적인 눈으로는 다말이 형편없는 여자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는 참으로 이스라엘에서 칭찬받고 축복받은 여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족보에 그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의 믿음과 아름다움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부끄러운 여인과 같이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타조와 같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웅장하게 날개 짓하며 뛰어갈 때 달리는 말과 그 기수를 우습게 볼 정도로 달리기를 잘하면 무엇하겠습니까? 그 깃과 털에서 어미의 사랑을 찾아 볼 수가 없으면 지혜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생명에 대한 소중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그 생명을 잉태하고 돌보며 섬기는 사랑이 없다면 타조와 같이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한 생명,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세상에 가장 낮고 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희생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선한 목자로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아낌없이 버리셨습니다.(요10:10-15)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리고 복음을 전도할 뿐만 아니라 전도를 통해 구원받은 성도들이 잘 성장하기까지 마치 여인이 해산하는 것처럼 그 수고를 아끼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이러한 바울의 전도에 대한 마음과 생활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결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사람의 지혜보다 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전도를 통해 한 사람의 생명을 잉태하고 그 생명을 사랑의 깃털로 양육하는 지혜가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을 깨닫고 사는 지혜, 영원한 내일을 준비하는 지혜, 그리고 천하보다 한 생명을 소중히 여겨 사랑의 깃털로 전도의 열매를 맺는 지혜가 충만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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