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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형되신 예수 그리스도 (마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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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형되신 예수 그리스도 (마 17:1,2)

[마 17:1,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길로 들어가시기 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얼굴이 해같이 빛나신 일을 기념하며 지키는 산상 변모 주일이 왔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만을 데리고 한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 곳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거룩하시고 영광된 모습을 세 제자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장차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 갈 기둥 되는 세 제자에게 자신의 신성을 보이심으로 그들에게 확신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변형 사건이 갖는 의미는 여러 각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을 비롯한 공관복음의 모든 기록이 첫 번째의 수난 예고에 이어진 연결성을 보이고 있어 고난의 극심함과 영광의 찬란함을 대비시키려는 의도가 뚜렷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려는 교육적 목표도 함께 합니다.
엿새 후에는 마16:13-28과 새로 전개될 사건을 연결시키기 위한 시간적 설명입니다.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

(16:16)과 그의 수난 예고(16:21) 및 도래할 심판(16:28)에 대한 설명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난 지금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 및 신적 영광을 예고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셨습니다(J. P. Lange).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 이 세 사람은 전직 어부 출신들로서(눅 5:10) 예수께서 주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구별하여 동행하시던 자들입니다(26:37;막 5: 37;13:3;눅 8:51). 물론 이들의 선택은 그들 자신의 탁월성에 근거하였다기보다 근본적으로 예수의 절대적인 선택 의지에 따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영광스런 변화를 목격하는 특권을 허락하시는 동시에 그들 각자에게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전파할 책임과 의무를 맡기시었습니다.

이들 3인의 제자는 이제 12제자 중 에서도 핵심 구성원으로서 예수의 십자가 부활을 준비하며, 예수 이후의 교회를 이끌어 갈 영광스런 책임 사역자가 되고 있습니다.

높은산은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Hieronius, Cyril of Jerusalem, Jerome) '다볼산'이라고 하며 가버나움과 지리적으로 가가운 거리라는 점에서 '예벨에르묵'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W. Ewing).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와의 가까운 점을(16:13) 들어 일반적으로 '헬몬산'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Wyliffe, Clarke, Carr). 이 산은 갈릴리 호수 북방 안티레바논 산맥에 위치하며 스닐(신 3:8;대상 5:23), 시료(신 3:9)등으로도 불리워집니다. 해발 약 2,850m로 그 산 봉우리에는 항상 눈이 덮여있습니다. 이 산은 요단강을 통하여 이스라엘 지역에 물을 공급해 주는 산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시 133:3). 이 산은 구약에서는 '시온산'(신 4:48)으로, 베드로에 의해서는 '거룩한 산'(벧후 1:18)으로 불리워지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눅9:29)은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합니다
예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의 천상적 신분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해'는 하나님이나 천사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입니다(시 84:11;계 1:16;10:1).

또한 예수의 옷이 희어졌다고 합니다. 흰색은 하늘의 색깔, 천사들이 입는 옷의 색깔이며 평화와 순결과 사랑을 상징하는 색깔입니다(마 28:3;막 16:5;행 1:10;계 3:4,5;7:14). 이것 역시 예수의 천상적 신분을 밝혀줍니다.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변모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것 즉 그가 진정한 메시야라는 사실을(35절) 확증해 주며 장차 수난을 받는다 하더라도(22, 31절) 다시금 그의 영광을 회복하리라는 점(빌 2:8-11)을 암시하며 또한 천국에서 영광 중에 계실 예수의 모습과(롬8:34) 다시금 재림하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26절)을 보여줍니다.

  변형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 영광을 보여 주신 의미는 한번 주신 은혜를 다시금 확인시켜 거듭 응답해 주시는 데 있습니다.
앞장을 보면 제자 베드로가 (마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외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실 것을 가르치셨습니다(마16:21) 이 엄숙한 예고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변화하신 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미 시작된 구원의 길을 확인시켜 주시는 영광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고백한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변화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신성, 곧 그리스도 되심을 보았고 그와 아울러 하늘에서 들려오는 성부 하나님의 소리, 곧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거듭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내리십니다.

  중국북경한인교회 이영혜 전도사님은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가기는 했지만 형식적인 신앙인이었다가 불교 집안으로 시집을 가고 보니 교회와는 자연히 더 멀어지게 되어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불신앙에 잡혀 오히려 교회에 다니는 동서를 핍박하는 사람으로 변해있었고, 삶은 점점 더 곤고 해져 가던 어느 날 우울한 마음으로 명동 쪽으로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귀에 익은 찬송소리가 들려왔고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 ‘왜 내가 하나님을 떠나 이렇게 방황하고 있는가?’하고 그때부터 나는 남편 몰래 구역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다합니다. 그 즈음 신문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남편은 회사의 배려로 일본 동경대학에서 1년 동안 공부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고 셋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몸무게가 38kg밖에 안 나갈 정도로 쇠약해져 몸을 지탱하기조차 어려워 결국 7달만에 심한 임신중독에 걸리게 되어 몸이 너무 붓고 혈압이 최고로 높아져서 병원에서는 아기를 낳을 수 없다고 했다 합니다. 하는 수 없이 7개월만에 제왕절개수술로 1.5kg밖에 안 되는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만 크고 몸은 뼈와 가죽만 남은 모습이었다합니다. 아기는 울지도 않고 꼭 죽은 아이 같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기도했다합니다. “하나님, 저 아이가 정상적인 아이만 된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저는 어떤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3일 동안 깨어나지 않는 아이를 병원에 남겨둔 채 퇴원을 해서 그때부터 새벽기도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니며 아이를 위해서 기도했다합니다. 아이는 서서히 회복되었고 두 달 반만에 2㎏가 늘게 되어 겨우 퇴원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님의 전적인 은혜였고 이 아이를 통해 하나님과 만나는 귀중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합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를 구약의 율법을 예표 한다면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를 예표 합니다. 율법과 선지를 구약의 예표로 본다면 예수님은 신약입니다. 변화산 꼭대기에서 구약과 신약이 만났습니다. 산상회담을 합니다. 그 회담의 주제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죽으실 일을 논의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십자가를 주제로 의논했다는 말입니다.

(눅9:30,31)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합니다.

구전에 의하면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로마 사람들이 주문하는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 목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에 아버지 요셉을 도와 열심히 목수의 일을 하셨으므로 예수님도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가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가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전문가이셔서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한 십자가를 친히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유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합니다.“만일 어떤 주인에게 두 마리의 소가 있는데 한 마리는 약하고 힘이 없고 또 한 마리는 강하고 힘이 세다면 어느 소에 무거운 짐을 지울까요” 물론 강하고 힘이 센 소에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나의 십자가가 유난히 무겁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질 만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십자가를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별세'라는 말이 헬라어 원어로는 '출애굽' 혹은 '탈출'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탈출하듯이 이세상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포로였던 이스라엘을 자유케 하셨듯이, 그리스도는 이 세상 죄를 모두 지고 가시므로 세상사람 모두를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십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출애굽'의 뜻을 갖는다 하겠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속박에서 자유를 얻었듯이,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죄의 속박에서 자유를 얻어 영원한 본향, 자유와 기쁨만이 있고 걱정, 근심, 고통이 전혀 없는 하늘나라의 영광으로 찬란히 빛나는 영원한 우리의 휴식처로 떠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죽음은 정말로 비참합니다. 그들의 죽음은 곧 영원한 고통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이 영원한 기쁨이 시작임을 생각해 볼 때 너무나도 대조적인 죽음입니다. 이 세상을 떠난다는 의미에서 그 죽음은 같을 수도 있지만 그 영혼이 가는 곳은 완전히 반대되는 곳입니다. 성도는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쳔국의 영광에 이릅니다. 시련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고난은 아름다운 삶을 만드는 최상의 재료입니다.

시드니 올림픽 여자 다이빙에서 우승한 미국의 로라 윌킨슨은 그녀가 오른쪽 다리 골절상을 당하자 코치는 윌킨슨을 향해 ‘올림픽 출전불가’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루에 수십번씩 한 성경구절을 묵상하며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올림픽에서 아무도 예상 못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윌킨슨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던 성구는 빌4: 13 이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희망적인 성구 하나가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기 직전의 운동선수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육상 여자 800m 금메달 수상자인 모잠비크의 무톨라는 그녀는 포연이 걷히지 않는 전장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녀는 마땅한 놀이가 없어 남자 아이들과 축구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녀는 굶주림과 고독을 재료로 삼아 세계 최고의 육상선수로 우뚝 섰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보자  인간적인 생각에 빠져 산 위에서 경험한 영광에 취하여 베드로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4절).

예수가 이 땅에서는 영광 가운데 계실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예수가 변화 산에서 영광을 입은 채로 계실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배후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며 안위할 것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가 인류를 위해 죽고 그의 제자들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받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도 그 뜻은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말에 대답하시는 대신 구름 속의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아들의 존재를 확증하셨습니다.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합니다.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던 그 말씀은 (마 3:17)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말씀과 똑같았습니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내린 하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벧후 1:16-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고 다시 확인 합니다.

이 광경 앞에 엎드려졌전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산에서 내려옵니다(마17:7-9)
이 영광은 현실에서는 오래 취해 있을 수 없고, 다시 삶으로 돌아가야 함을 교훈 합니다. 그토록 좋은 영광이 계속되었으면 했을텐데,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참 아쉬웠을 것이나 주님을 따라 산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예배 후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비록 성소가 좋다고 할지라도 모든 삶을 포기하고 그곳에 있으면서 초막을 짓겠다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허락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세상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아가야 할 책임이 예배를 드린 사람 모두에게 부여되어 있습니다.

이번 주는 산상 변모 주일이라는 교회력에 이어, 생활의 달력이 조상 대대로의 명절인 설 곧 음력 정월 초하루가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해처럼 찬란하게 온 땅을 비치듯이 설날을 맞은 한국 땅 곳곳에 기쁨과 평안이 임하기를 원하는 기도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 땅에 다시 한 번 성령님의 불길이 내리기를 간구하는 회개의 움직임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하겠고, 북녘 땅에서 전쟁을 준비하는 핵무기 제조 계획들이 완전히 사라져, 그리스도의 평화가 세상을 덮는 그날이 어서 오기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나라 전체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던 대통령 선거가 끝났지만, 국회의원을 뽑는 또 한 차례의 선거가 어려운 과제 처럼 우리 앞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어려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어찌하여 양력설, 음력설이 거듭되는지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생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한 방편으로써 거듭 출발을 명하시는 하나님의 배려로 이해하면 은혜가 됩니다.
벌써 2008년의 계획들이 물거품으로 변해 버린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주일을 거룩히 지키자는 약속은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 예배도 나가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자는 계획은 어떠 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담배와 술을 끊고 기호성 음료를 과하게 마시지 말자는 자기와의 약속을 가장 많이 한다고 합니다. 한 달이 조금 지난 지금, 그 모든 것들을 어김없이 지키고 있습니까? 의지가 약하여 벌써 무너지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거듭 시작하는 기회를 얻고 있습니다.

설 연휴를 끝내면 그리스도의 정신을 갖고 세상의 일로 복귀해야 합니다. 설날에 얻은 새로운 힘으로 삶을 변화시킬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작은 우리에게도 놀라운 영광을 보여 주시고 기쁨을 선물해 주십니다.
금주는 세상의 일들에서 잠시 쉬게 하시며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끄시는 은총의 기간입니다. 아직 새해의 계획을 시작하지 못했거나 벌써 지친 사람들에게 거듭 시작하도록 촉구하십니다.
고난의 길을 앞둔 사람에게“너는 잘할 수 있다. 내가 함께 하마”하시며 꿈을 갖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려는 일이 비록 작을지라도 큰 결실을 얻을 수 있게 예비하여 주시고, 이 쉼이 끝나 세상으로 나아갈 때 긍정적인 힘을 주셔서 그 발길에 힘이 실리도록 격려를 베푸십니다.

최낙중 목사님이 캐나다 가든교회 목사님과 함께 노루우드라고 하는 지역에 사는 한 성도를 같이 심방한 일이 있었답니다. 두 시간이상 걸리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주유소와 함께 슈퍼마켓을 경영하는 김집사님네를 방문한 것입니다. 십일조와 선교헌금을 많이 해서 교회에 크게 도움을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아들은 의대에서 전액 장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은 집사님에게 늘 고마운 마음이 있다고 하며 오늘의 집사님이 있기까지는 그동안에 그가 복 받을 일을 했다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16년 전 가든교회가 월 500달러의 월세를 내고 교회를 시작했는데 교인수가 늘어나면서 보다 큰 장소로 이전하게 되었고 월 3,000달러의 월세를 내게 되자 목사님은 너무 욕심을 부린다며 매주 2,3백달러씩 십일조를 내던 두가정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김집사님은 초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형편이 되지 않아도 매주 500달러씩 헌금을 해서 교회 월세를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그 500달러는 작은 가게를 하면서 들어오는 돈의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님은 뜨거운 심정을 가지고 그를 축복했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후에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서 헌금을 또 작정했는데 그 김집사님이 1만달러를 작정했답니다. 그리고 삼천달러까지 헌금을 하고 가게도 어려움을 당하고 해서 결국은 미국으로 개인택시 기사를 하겠다고 떠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게에서 뺀 돈 나머지 7,000불을 다 바치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 후 3년동안 미국에서 택시기사를 하면서 돈을 벌어 다시 토론토에 돌아와 작은 가게를 오픈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가게 물건이 잘 팔리게 된 것은 그 동네 주민들이 그 가게만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가게에서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식품을 파는데 비디오를 대여하기도 하고 팔기도 하는 그런 가게였답니다. 그런데 가게를 오픈하던 날 동네 대표가 찾아와서 우리 마을애는 두 개의 교회가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이니 성인용, 그리고 청소년 음란비디오는 취급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했을 때, 그렇지 않아도 김집사님 마음속에 그것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주민대표의 말을 받아들이고 음란비디오를 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마켓을 하던 한인 두분이 교회를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음란비디오를 대여하고 판매하는 그 가게는 주민들이 단합을 하여 물건을 팔지 않아서 결국 가게 문을 닫게 되었고 음란비디오를 팔지 않는 이 집사님의 집에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이제는 주유소도 하고 슈퍼마켓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얼굴 표정에는 언제나 기쁨이 충만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영적으로 잘된 사람은 하나님은 봉사도 잘되게 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합니다.
성도는 변형되신 주님을 만나 뵙고 세상에 나가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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