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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백성과 죄 (창 36~3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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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과 죄 (창 36~37장)

야곱은 가나안에 돌아와 그 아버지 이삭이 거주하던 땅에 정착했습니다(37:1). 이제 야곱의 하나님께서 다음 계승자로 누구를 선택하실지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선택하던 방법 대신에 야곱의 열 두 아들 전체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된 ‘부족’이 ‘큰 민족’으로 자라도록 섭리하심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말씀을 단계적으로 성취해가셨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과정에서 중요한 도구들로 쓰임 받은 요셉과 유다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라는 말을 들으면 상당히 크고 거창한 어떤 것을 연상하게 되고, 그 역사에 쓰임 받는 사람은 대단한 인물들일 것 같이 생각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상상하기 어려운 어떤 놀라운 기적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과 유다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평범한 개인들의 사소한 일상적 삶 속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요셉과 유다는 하나님께서 방치해 두셨더라면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허물과 죄악들 속에서 살아가다가 멸망당했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며 이를 위해 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요셉과 유다의 이야기 역시 다른 본문을 대할 때처럼,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들 이면에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주인공이심을 염두에 두면서 말씀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37장에서 먼저 요셉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요셉의 나이가 17세이면 대략 야곱은 108세, 이삭은 168세 때의 일입니다. 당시 요셉은 형들에게 세 가지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요셉이 형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일러바쳤기 때문이고(2), 둘째는 야곱이 요셉을 편애했기 때문이었습니다(4). 마지막 이유는 요셉의 꿈 이야기를 떠벌림으로 인한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11).

형들이 범한 “과실”이란 ‘악행’이라는 뜻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형들의 악행에 가담하지 않고 정직하게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형들의 입장에는 얄미운 고자질쟁이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야곱은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전적으로 사랑했다는 의미인데 유독 요셉에게만 귀족들이 입는 “채색옷”을 입혀 노골적으로 애정을 표시했습니다(3). 야곱이 다른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여” 그에게 곱게 말하지 않았습니다(4). 요셉이 꿈을 말함으로 인해 형들은 “그를 더욱 미워하였”습니다(5). 형들에게 절 받는 일을 즐거운 듯 말하는 요셉을 보면서 형들은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했습니다(8). 형들이 싫어하면 더 이상 이야기 하지 말아야 되는데 요셉은 또 꿈 이야기를 했고, 형들은 이를 “시기”했습니다(11). ‘시기’란 매우 강한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인데, 상대가 없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실 야곱 가정에서 발생한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네 삶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요소들입니다. 부모님께 야단맞을 짓을 몰래하는 악행, 이에 대한 순진한 고자질, 부모의 공평하지 못한 편애, 부모 사랑을 등에 업고 얄밉게 행동하는 것, 부모의 사랑을 더 받는 형제를 점점 더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 등은 흔히들 순진무구하다고 표현되는 어린 아이들 사회에서도 흔히 반복됩니다. 이러한 일들이 간과됨으로 인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가해자가 되고, 동시에 모두가 상처 입은 피해자가 됩니다.

요셉을 시기하던 형들은 적절한 기회가 되자 요셉을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18). 르우벤의 반대로 죽이지 못하고 구덩이에 던져뒀다가(21-22), 유다의 제안으로 은 이십 개를 받고 노예로 팔았습니다(26-27). 죽이는 대신 그들의 눈앞에서 요셉을 아주 없애버린 셈입니다(12-28). 형들은 편애의 상징물이었던 요셉의 채색옷에 숫염소 피를 묻혀서 야곱에게 보였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은 줄로 알고 오래도록 위로도 거절한 채 애통했습니다(31-35).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야곱은 39세의 요셉을 다시 만나기까지 23년 동안 자식들에게 감쪽같이 속아서 슬퍼하게 됩니다. 결국 야곱의 편애로 인해 상처받은 형들로 인해 요셉도 상처를 받은 것이고 야곱 역시 크나큰 상처를 받게 되었습니다.

죄의 속성은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죄의 속성은 어린 아이들부터 노인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습니다. 어린 아이의 싸움이든 부부 싸움이든 전쟁이든 가만히 파헤쳐보면 결국 남보다 조금 덜 사랑받은 것 같다는 이유나 자존심 상한다는 이유와 같이 사소한 문제에서 시작됩니다. 너무나 사소해 보이는 이것을 방치하기 때문에 큰 문제로 자랍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죄라는 것이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인간 스스로는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막아보려고 할수록 죄는 자라고 강성해져서 마침내 개인을 삼키고 공동체를 삼킵니다. 한 번 죄가 파고들면 피를 나눈 형제간에도 피 튀기는 공방전이 벌어지고 한 몸 같던 잉꼬부부가 법정 소송을 벌입니다. 사랑이 뜨겁던 공동체도 죄가 파고들면 서로 잡아먹을 것 같이 증오하게 되고 상처와 분열을 남기게 됩니다.

죄는 아무리 작아보여도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공동체라고 해서 죄가 침투하지 않거나 자라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요일 3:15)로 규정하며,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 2:9-11)고 지적했습니다. 작은 죄의 요소를 덮어두면 점점 심각하게 자랍니다. 그러므로 작아 보이는 죄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죄의 문제는 아담이 살던 시대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은혜로만 해결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속성이 변함없는 것처럼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변함이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이처럼 인간 군상들의 죄악 속에서도 합력하여 당신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형들에 의해 팔려간 요셉을 통해 장차 야곱 부족이 7년 기근 속에서도 애굽에 거주하여 살아남도록 하셨을 뿐만 아니라 큰 민족을 형성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통해서도 신실하게 당신님의 약속을 성취해 가셨습니다. 허물 많은 공동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영광을 그들로 인해 빼앗기지 않으셨습니다.

38장은 유다의 가정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유다는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결혼하여 3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38:2). 야곱과 라반의 계약으로 더 이상 하란으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가나안 여인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때부터 유다 가정에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유다의 장남 엘은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셨습니다(7). 차남인 오난은 죽은 형의 아내를 취하여 대를 이어야 할 본분을 행해야 할 때, 형수에게 들어갈 때마다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했습니다.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셨습니다(10). 하지만 유다는 이 사건을 보면서 며느리인 다말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막내인 셀라도 죽을까하여 다말에게 주지 않고 다말을 친정에 보내버렸습니다(11). 그리고 얼마 후 유다의 아내도 죽었습니다(12).

유다가 탈상 후에 딤나의 양털 깎는 축제에 참석했을 때, 다말이 과부 의복을 벗고 얼굴을 가린 채 야곱을 유혹하려는 계획을 실행합니다. 이는 셋째인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4). 유다는 변장한 며느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창녀로 여겨 다말이 요구한 약조물을 주고 동침합니다(18). 이 일로 다말은 시아버지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석 달 후 유다는 다말이 행음하여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말을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했습니다(24). 다말은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놓으며 그 물건의 주인으로 말미암아 잉태했다고 밝힙니다(25). 유다는 그것들이 자기의 것임을 보고는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고 한 후에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했습니다(26). 다말의 행위는 분명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다만 고대 셈족 사회에서 결혼한 일종의 계약이었고 여자는 아들을 낳아 남편의 대를 잇게 해주는 것이 의무였는데, 다말이 그 계약에 충실하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유다보다 옳았다는 의미입니다.

유다 가정의 이야기는 말로 옮기기도 민망합니다. 충격적인 성적인 범죄들만 골라서 기술한 듯 보이기도 합니다. 성경이 단지 윤리적 교훈을 위해서 기록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유다의 이야기는 문란한 가나안의 성문화가 유다의 가정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유다의 아들들뿐만 아니라 유다 자신도 창기와의 성관계는 죄로 생각하지 않았고(20), 다만 소문나면 부끄러운 일 정도로 여겼습니다(23). 이것이 가나안 땅에 사는 동안 그 사회에 급속히 동화되어가고 있는 야곱 아들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35장 22절을 보면 장자 르우벤도 가나안 땅에서 서모 빌하와 통간했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야곱의 아들들이 하나님 백성으로 자라가기에는 너무 부적절한 환경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저항력이 약한 그들은 그 땅의 죄로부터 격리 되어 보호받으면서 자라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결국 요셉의 이야기와 유다의 이야기는 가나안 땅에 정착했던 야곱 부족이 어떻게 그리고 왜 애굽으로 내려가서 출애굽하기까지 4대를 머물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요셉을 크게 사용하시고 유다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도록 하신 이유가 그들이게 그럴만한 도덕적 탁월성이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악과 더불어 살고 있었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었습니다(롬 3:10). 하나님은 모든 입으로 자기 공로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드러내셨습니다. 택하신 하나님 백성들의 삶이 도무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우리 공동체와도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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