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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앉은뱅이를 예배자로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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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뱅이를 예배자로 (행 3:1~10)

인생길에서 누구를 만나며 또 누구와 동행하느냐에 따라 사람은 결정적인 전기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작년 11월 4일 주일 설교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설교 제목은 “앉은뱅이가 예배자로”였습니다. 그 때 저는 하반신 장애인의 관점에서 설교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하반신 장애인에게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해준 베드로의 관점에서 설교될 겁니다. 그래서 설교제목도 “앉은뱅이가 예배자로”에서 “앉은뱅이를 예배자로”로 바꾸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저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특별한 여행을 떠납니다. 준비되었습니까? - 자, 도착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이렇게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 시각이 되면 예루살렘 근처 사람들은 기왕이면 성전을 찾습니다. 오후 3시가 다가오자 베드로도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올라갑니다. 저 멀리서 장엄하고 거대한 황동 미문 beautiful gate가 오후의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저 미문과는 참 대조되는 광경이 베드로의 시선을 끕니다. 하체를 전혀 쓰지 못하는 중년의 유대인이 눕다시피 하여 사람들의 동정을 구합니다. “한 푼만 줍쇼.” 그 구걸 소리에 어떤 이는 빤히 쳐다보며 구경하듯 지나갑니다. 어떤 이는 흘깃 쳐다보고는 정죄의 눈빛과 찌푸린 표정으로 지나갑니다. 어떤 이는 바쁘다는 듯이 아예 시선을 외면하고 종종 걸음으로 지나갑니다. 어떤 이는 귀찮다는 듯 동전 한 닢 휙 던지고 지나갑니다.

  베드로는 잠시 멈추어 생각합니다. 거절당할 때마다 저 손은 얼마나 부끄러울까? 예수님 없이 구걸로 연명해가는 저 영혼 얼마나 딱하며, 얼마나 텅 빈 인생일까? 싶습니다. 순간 베드로의 뇌리에는 약 3년 전 예수님을 처음 만난 이후 지금까지의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베드로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자신의 텅 빈 배 앞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저 멀리 어떤 사람이 에워싼 무리들에게 무슨 말을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평소 같으면 무슨 구경거리인가 하고 가보았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기력조차 없습니다. 온 밤을 새워 그물질했지만 한 마리도 잡질 못했기 때문입니다. 몸도 몸이지만 허탕 친 조업으로 마음은 더 지쳐있습니다. 식솔들의 끼니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가족 볼 면목도 없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질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애꿎은 그물만 씻고 또 씻고 그렇게 자꾸 씻는가 봅니다.

  힘없이 고개 떨어뜨리고 있는 베드로 앞에 무리에 싸여있던 바로 그 사람이 다가옵니다. 배에 잠시 올라도 되겠는지 베드로의 의향을 물어옵니다. 그 사람은 산간지방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흐름한 행색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있습니다. 많은 무리들도 함께 요청하는 눈길을 보내와 거절하기 어려운 분위기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특별한 만남과 동행은 그처럼 시작됩니다. 인생의 바닥을 치는 듯한 자리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르신 배는 어쩜 베드로라는 인생의 배를 가리키는 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아무 것도 잡아내지 못하여 텅 비어버린 빈 배 말입니다.   

  베드로의 배에 오른 나사렛 예수는 호숫가로부터 배를 조금 띄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무리들에게 계속 가르칩니다. 고리타분한 율법학자나 바리새인과 달리 그의 가르침은 어렵지 않았지만 권세 있습니다. 사람 끄는 힘이 대단합니다. 무언가 새 진리를 발견한 듯, 경청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은 하나같이 반짝입니다. 얼굴도 홍조와 생기를 띱니다. 베드로는 곁에서 듣고 있습니다.

  공중 설교를 마친 나사렛 예수는 이제 깊은데 가서 그물 던지라고 베드로에게 말을 건넵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자신의 딱한 사정을 잘 알고 있고, 또 그 사정을 해결해주겠다는 듯이 말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 나사렛 예수는 뜬 구름 잡는 소리로 허공을 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실제 삶 속에 뚜벅뚜벅 동행해 들어오시는 것이 감지됩니다. 

  하지만 아침에는 물고기들이 숨어버리기 때문에 조업하지 않는 것이 어부들의 불문율입니다. 그물도 손질을 끝낸 상태입니다. 장담할 수도 없는 결과를 위해 다시 그물질 하는 것처럼 귀찮고 손해 보는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나사렛 산간지방 출신이라는 예수는 어부로 잔뼈 굵어진 베드로에게 충고할만한 입장이 못 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반응은 의외입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물 내리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분명 늘 몰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초상식적이고 초이성적인 결단이 요청될 때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허탕치고 있는 자신의 생존전선 한 가운데로 도움 주려고 동행해 들어오는 그 나사렛 예수를 신뢰하며 마음 문 열어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 던지니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베드로에게 일어납니다. 그물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 잡힌 겁니다. 육지에 있는 친구까지 불러 함께 조업합니다. 친구도 만선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흡사 나사렛 예수를 영접한 베드로의 인생 자체가 차고 넘치게 되었고, 심지어 주변 사람들의 인생까지도 풍성케 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자신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어 놓는 비범한 사건을 경험한 베드로는 곧장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됩니다. 초자연적 능력자 나사렛 예수 앞에 경외심으로 엎드립니다. 그리고 선생으로 부르던 그 나사렛 예수를 베드로는 주여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죄인이니 떠나달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앞으로 사람 낚는 어부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베드로야! 지금까지는 네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목적도 없이 그럭저럭 살아왔겠으나 이제부터는 사람을 얻고 사람을 살려내는 일꾼 되어라. 너는 나를 따르기만 해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 생의 목적과 관련된 의미심장한 선언이요 도전입니다.

  베드로는 인생 목적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사람 얻고, 사람 살려가는 것이 자신이 살아가는 참 목적과 이유라는 것을 깨닫자 다른 것은 버릴 수도 있게 됩니다. 생계유지에 필수 수단이 되어 준 그물과 배, 그렇게 잡기 소원했던 만선의 물고기들은 이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동행하기 시작합니다. 바야흐로 텅 비어 버린 자신의 인생 여정 속에 동행해 들어온 예수님과 함께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 동행해주려는 겁니다.

  베드로는 3년여의 세월을 예수님과 동행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합니다. 열심히 전도하여 회심의 열매를 얻기도 합니다. 병자를 위해 기도하니 병자가 즉각 고침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헤어질 때가 가까웠다고 말씀하실 때, 만류하다 호되게 야단맞기도 합니다. 동행해주시는 예수님 떠나는 것이 싫었던 겁니다. 다른 제자가 다 스승님 버릴 찌라도 자신은 끝까지 동행하겠다고 큰소리치는 베드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두려워 숨습니다. 대제사장 집 어린 여종께 들키자, 즉각적으로 예수님 모른다고 맹세코 부인하며 도망칩니다. 닭 울기 전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이 생각나 닭 울음소리에 그만 통곡합니다. 의협심 강한 베드로는 주님과 동행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배반까지 한 자신을 용서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주님과 동행하겠다고 나섰지만, 주님 마음 아프게 해드린 베드로는 바로 첫 사랑 식어진 우리 자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처형되자, 베드로는 모든 것이 끝났다며 낙향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의 꿈을 접고, 생계 염려하는 어부로 되돌아가버립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베드로를 찾아 갈릴리로 오십니다. 첫 만남의 장소이지요. 그 때처럼 베드로와 몇 제자들은 밤새 한 마리도 얻지 못합니다. 마치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인생이 헛그물질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새벽 미명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짐작도 못합니다. 그런데 그물을 들지 못할 정도로 물고기를 잡게 되자 그제야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자신만이 경험한 그 첫 만남이 기억났겠지요. 베드로답게 예수님께로 달려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세 번 반복되는 질문을 받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해버린 베드로가 회복되도록 배려하려는 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는 목양 사명도 받습니다. 사람 살려내는 목양 사명은 의협심이 아니라 예수님 사랑함으로 감당되는 것임을 일깨워 주려는 듯이 말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제 2의 기회가 베드로에게 주어진 겁니다.     

  베드로는 부활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합니다. 사람 살려내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 받으라는 예수님의 부탁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성령 받기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침내 오순절 날 약속된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임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대신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달라집니다. 더 이상 두려워 도망치는 베드로가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더욱 담대하여 군중들 앞에서 설교까지 할 수 있는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3천명 5천명을 얻는 어부가 됩니다.

  성전 미문을 향하던 베드로의 멈춘 발걸음이 다시 계속됩니다. 머리 숙인 채 구걸의 손 내민 앉은뱅이를 베드로와 요한은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앉은뱅이를 향해 정확하게 다가갑니다. 베드로가 텅 빈 배 앞에서 머리 숙여 그물 씻을 때 다가가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쳐다보라고 요청합니다. 뜻밖의 요청에 움찔하며,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을 올려다봅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칩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은 그 영혼을 따스하게 바라봅니다. 신체장애자, 억눌리기 쉬운 정서의 소유자, 구걸해야만 하는 경제 빈민, 도움 되기는커녕 신세 져야하는 전 사회의 기피대상! 이 모든 처지를 관통하고 뛰어넘어 그 사람 속 존귀한 영혼을 주목합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텅 빈 생애 속에 그렇게 발을 들여놓기 시작합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강한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선생님께서 요구하시는 은과 금은 죄송하지만 지금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더 좋은 것을 드리겠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오.” 그 순간 상상할 수 없는 이적이 일어납니다. 베드로는 동행하고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는 것을 봅니다. 가늘어진 발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입니다. 비틀 비틀 일어섭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딥니다. 차츰 걷기도 하고 기뻐 뛰기도 합니다. 성전 안으로 따라 들어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합니다. 텅 비어온 앉은뱅이의 인생 배가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 모시고 동행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 겁니다. 우리의 여행은 여기까지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텅 빈 것 같은 순간을 맞이한 적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때 우리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우리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때론 베드로처럼 주님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적 있지만, 주님께선 우리를 회복시키셨고 지금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모심으로써 그 인생이 풍성해지도록 그들과 동행해줄 것을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3월 30일 동행축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텅 빈 인생을 살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님 모시도록 동행해주실 분은 없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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