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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탕자 이야기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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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 이야기 (눅 15:11-24)

어느 정신병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치료 프로그램 중에 책을 읽는 시간이 있었는데 한 구석에서 몇몇 환자들이 커다란 책을 한권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한 환자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책을 펼쳐 보이며 “이 책은 너무 나열식이야.. ” 라고 말하자 다른 환자가 “게다가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서 내용이 아주 산만해”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환자가 “도대체 이 두꺼운 책을 어떻게 읽으라는 거야” 라고 불평을 늘어놨습니다.
환자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했습니다. 그래서 토론이 한참 열기를 더해가고 있는데 간호사가 그 방에 들어오면서 말했습니다. “누구 전화 번호부 가져간 사람”

웃기라고 한 얘긴데 안 웃는 사람은 듣긴 들었는데 무슨 내용인지 이해를 못하는 사람이거나 정서가 불안하거나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져서 돌 같이 된 사람입니다. 또는 생각을 딴 데 두고 있어서 제대로 못들은 사람도 안웃었습니다. 아니 못 들었으니까 못 웃은 거겠지요?

마음을 열어놓고 말씀을 듣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에 핵심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존전에 서는 것입니다. 즉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허물과 부족을 깨닫고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서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나아가 그 앞에서 서는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에 관해서 히브리서 4:16절에 잘 표현해주었습니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은혜의 보좌 앞에 서서 모든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예배자로 서서 수 없이 설교를 듣고 또 들어도 마치 전화번호부를 놓고 독서 논쟁을 하는 정신 병동의 환자들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그저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영양가 없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 그것이 예배입니다.
이 시간에도 은혜의 보좌 앞에 서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예배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본문은 우리가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등장인물이 세 명이 나옵니다. 첫째는 탕자로 표현되는 둘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아버지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큰아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셋 중에서 어떤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설명하느냐에 따라서 이 비유의 해석이 달라 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재산을 다 가지고 가서 허랑 방탕한 둘째 아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탕자의 모습 속에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그 말씀을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떠난 홀로서기는 위험합니다.

첫째는 인생 길에 있어서 하나님을 떠나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탕자는 즉 둘째 아들은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의 독립, 즉 자유를 선언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 즉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한 것입니다.
(눅 15: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하는 것은 홀로 서기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신앙생활에 있어서 대단히 위험합니다. 우리 인간을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붙어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15:4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가지는 줄기에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습니다. 이것은 생명, 즉 생존의 문제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수 22:5절에 보면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라고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에게 친근히 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친근히 한다는 말은 원어로 “다바크” 라는 말인데 “꼭 달라 붙어있다“ 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우리가 영원한 삶을 누리려면 하나님께 꼭 달라붙어 있어야 합니다. 홀로 서기 또는 독립선언은 안됩니다. 주님을 붙들고 서야 합니다. 사단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시도하고 있고 인간들은 언제나 사단의 그 계략에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하나님 의존적이 됩니다.

유명한 mbc 탈렌트 한인수씨는 자신을 소개하는 명함에다 다음과 같은 문구를 넣어서 사용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만난 후 당신이 나를 잊는다 해도 당신은 잃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후 그 분을 잊는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한 인수씨는 자신의 명함을 건네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기 보다 예수님을 더 기억하게 하게하는 일에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을 그의 믿음이며 그의 체험에서 나온 말일 것 입니다. 자신이 예수안에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떤 축복이며 행복인지를 알기에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명함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철저히 하나님 의존적인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때 존재 가치가 들어나고 주시는 힘으로 세상을 이길수가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없는 내 계획은 허무합니다.

둘째로 이 탕자 이야기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 없이 세운 나의 계획은 무가치하고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탕자가 처음부터 아무런 계획이 없거나 또는 허랑 방탕하기로 작정하고 재산을 달라고 했다면 아버지는 절대로 재산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의 형도 반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가 아버지에게 재산을 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나 그 형이 안 된다고 반대한 흔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나름대로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을 어떻게 투자하여 얼마만큼의 이익을 얻겠다는 완벽한 사업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아버지와 형은 그를 믿고 그가 받을 상속 재산을 미리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사업 계획 속에 아버지의 존재가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머릿속엔 아버지의 존재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아버지에게서 독립하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13절입니다.
그는 “먼 나라”에 갔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먼 나라의 기준이 어디일까요? 어디서부터 계산하여 먼나라 일까요? 그것은 아버지에게서 “먼 나라”입니다. 완전히 아버지의 간섭과 보호의 틀에서 벗어난 것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계획 속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우리의 의식속에 하나님이 없다면 그는 먼 나라에 와있는 것입니다. 잠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먼 나라에 계시지 않습니까?
사 29:13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호11:2 에서도 호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습니다. 이 같이 멀리 떠난 자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돌아오라 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사 31:6, 사 44:22, 사 55:7,렘 3:12) 대하 30: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저가 너희 남은 자 곧 앗수르 왕의 손에서 벗어난 자에게로 돌아오시리라

특히 행 14:15절에 보면 바울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바로 헛된 우상을 섬기던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그러므로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엡 2:13절에서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3. 돌아온 탕자는 더 이상의 탕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번 탕자라도 돌아오면 더 이상 탕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탕자는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아버지와 먼 나라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돌아왔을 때는 잃었던 모든 것을 다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에 받지 못했던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뜨겁게 느꼈다는 것입니다.

22절-24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하나님은 사람을 고쳐서 쓰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한번 탕자는 영원한 탕자로 인식합니다.

전주 교도소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모범수로 출소하고 나서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서 다시 범죄하고 감옥에 오는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한번 탕자는 영원한 탕자라고 생각하고 저 사람은 다시 죄를 지을 것이라는 선입관념에 사로잡혀서 취직도 안 되고 사람들이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기 때문에 모범수로 출소하고서도 다시 범죄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그런 일 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이 한 번 실수와 잘못으로 크게 어려움을 겪으나 하나님이 그들을 고쳐서 쓰셨습니다. 호 14:4절에 보면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출 15:11절에서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 고 했습니다.

육신의 질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혼의 질병입니다. 하나님은 패역을 고쳐서 사랑 하신다고 했습니다. 패역이란 타락하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영적 행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육신의 질병보다 더 무서운 영적 질병 패역을 고쳐서 사랑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풍성한 은혜입니까?

육신의 질병 때문에 지옥 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교만과 패역은 지옥가게 하는 영적 질병입니다. 그 패역 영적 질병을 고쳐주신다고 했습니다. 그 뿐입니까? 즐거이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치료와 돌보심이 일회적이 아니라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 우리의 잘못을 고쳐서 사랑하시고 쓰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관점으로는 한 번 탕자가 영원한 탕자가 아닙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는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빗나가고 잘 못 가던 길에서 하나님께로 유턴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회복시켜서 쓰십니다. 복을 주십니다.
새롭게 하셔서 쓰시는 하나님께 붙들리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제는 용서받음에 합당하게 주님을 위해 삽시다. 주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은총을 노래하며 받은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삽시다.

하나님을 떠나 나 홀로서기는 위험합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계획은 무너집니다.
회개한 탕자는 더 이상의 탕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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