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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퇴보냐? 진보냐? (딤전 4: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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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보냐? 진보냐? (딤전 4:6~16)

괄목상대

삼국지(三國志)는 중국의 위, 촉, 오, 세 나라가 서로 대립하며 세력을 다투던 시대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우리에게는 유비, 관우, 장비 세 의형제와 제갈공명, 조조 등의 등장인물로 더 알려져 있는데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으며, 지금도 시중에 나가보면 여러 사람이 번역한 삼국지뿐 아니라 <삼국지의 처세술> <삼국지 경영학> 등 삼국지를 인용한 많은 책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영원한 베스트셀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삼국지가 더 유명한 이유는 그 속에 유명한 고사성어(故事成語)가 많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나 '읍참마속'(泣斬馬謖), '계륵'(鷄肋) 등은 지금도 사람들이 많이 인용하는 아주 유명한 고사성어인데 나는 오늘 이런 말 처음 들어본다는 분들은 공부를 좀 하셔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 삼국지에 나오는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고사성어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괄목상대란 눈을 비비고 다시 본다는 뜻으로 이런 유래가 있습니다. 오나라의 왕 손권이 여몽(呂夢)이라는 장수를 평가하면서 무술에는 뛰어나지만 학문에는 너무 약하다고 야단을 쳤답니다. 그래서 여몽은 이때부터 열심히 학문을 닦아 나중에 노숙(魯肅)이 찾아가 보았을 때는 정말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야 할 정도로 학문이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학문이나 실력이 껑충 뛰는 것을 "괄목할 성장을 보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괄목상대

제가 어렸을 때 이 삼국지를 여러 번 읽으며 '괄목상대'라는 말을 보았을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괄목상대했다는 말을 들어야겠다"고 말입니다. "나도 남들이 안 보는 동안 부쩍 성장해서 남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키는 별로 안 컸습니다. 그렇다고 성적이 월등 높아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남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큰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앙입니다. 제가 처음 교회를 나간 것은 고 1때입니다. 다른 친구들보다 많이 늦었습니다. 처음 친구의 전도를 받아 교회를 가보니 이미 교회에는 모태신앙을 가진 아이들이나, 아주 어렸을 때 교회학교부터 다닌 아이들이 많았고 모두가 성경도 잘 알고, 기도도 잘 하고, 찬송도 잘 부르는 것을 보니 아무 것도 모르는 제가 너무 부끄럽게 생각되었습니다. 성경도 너무 모르고, 기도도 못 하고, 찬송가도 모릅니다. 주기도문도 못 외웁니다. 게다가 워낙 오래 교회를 같이 다니다보니 자기네끼리 얼마나 친한지 모릅니다. 중간에 들어온 저는 마치 이방인처럼, 물과 기름처럼 좀처럼 섞이기가 어려웠고 아는 척은 해주어도 자기들 그룹에 껴줄 생각을 잘 안 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럴 때 대개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뭐 이래? 재미없다, 나는 아는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나한테 아는 척 해주는 사람도 별로 없고... 에이 그만 두자."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떠난 사람도 꽤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배우자. 더 열심히 신앙생활 하자. 남들보다 더 잘 믿어서 빨리 믿음이 자라야겠다"며 더 열심히 교회 다닙니다. 저는 어느 쪽을 선택했겠습니까?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으니 지금 목사가 되어 이 자리에 있는 것이지요. 삼국지의 여몽도 왕에게 야단맞고 "장수가 싸움만 잘 하면 됐지, 공부를 뭐하러 하나?" 생각했다면 늘 그 수준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을 텐데 야단맞고 나서 정신 바짝 차리고 정말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래서 정말 사람들이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정도의 능력을 갖추어 나중에는 결국 오나라의 전군을 지휘하는 최고사령관이 됩니다.

혹시 이 가운데 제가 처음 교회 나갔을 때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이 계십니까? 교회가 서먹서먹합니까? 아직 신앙생활이 어색하기만 합니까? 오래 다닌 사람들이 저희들끼리만 친하게 지내고 나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생각됩니까? 그래서 교회 다니기가 좀 불편하고 아직 어색하시다고요? 속도 좀 상하시다고요? 그래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포기하면 평생 믿음은 안 자랍니다. 저처럼 여몽처럼 괄목상대하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남들보다 늦었으니 더 열심히 믿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 하십시오. 처음부터 하나하나 배워가고 차근차근 신앙이 커 가면 언젠가 정말 온 성도가 눈을 비비고 여러분을 다시 봐야할 때가 올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태신앙이든 교회를 수십 년 다닌 사람이든 하나도 안 부럽게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도 더 기특하고 기쁘실 것입니다. "넌 남들보다 훨씬 늦었는데 훨씬 믿음이 빨리 커서 지금은 정말 믿음이 좋구나. 오래 다닌 사람보다 모태신앙보다 더 좋구나" 하고 말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시작이 빨랐어도, 그래서 모태신앙으로 어머니 뱃속부터 교회를 다니고, 30년, 40년을 교회 다녀도 우리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면 큰일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신앙은 시간 순이 아닙니다. 교회 오래 다닌다고 믿음이 더 좋으라는 법 결코 없습니다. 내가 전도한 사람이 어느새 나보다 더 열심히 믿어 신앙이 더 자라는 것도 보고 심지어 나보다 먼저 집사 되고 직분 받는 것도 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물론 그 사람이 늦었지만 정말 열심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열심히 믿었다고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도 그 사람처럼 열심히 믿었거나 최소한 조금씩이라도 신앙이 성장하면 절대 이런 일이 안 생깁니다. 100미터 달리기 할 때 한 사람은 출발점에 서고 또 한 사람은 50미터 앞에 세워서 출발해보세요. 뒷사람이 아무리 빨라도 앞사람은 워낙 앞서 있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뒷사람이 좀처럼 따라잡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앞사람이 이만치 앞서 있다고 자만하고 멈추어 있거나 뒤로 물러나면 반드시 따라잡힙니다. 토끼와 거북이처럼 말입니다. 그러다보면 신앙생활에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마 19:30)일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중에 교회 오래 다닌 분들일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오래 다녔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오히려 세월이 갈수록 뒤로 퇴보하면 언제 뒤따라 온 사람들이 나보다 더 높은 신앙의 반열에 올라갈지 모릅니다. 얼마든지 나보다 더 빨리 직분도 얻고 교회에서 더 귀하게 쓰임 받을 지도 모릅니다. 그 때 "아, 내가 너무 자만해서 게을러서 신앙이 안 자랐구나." 하고 후회하지 않기 바랍니다. 심지어 억울해 하며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고 불평이나 늘어놓는 불행한 성도 안 되려면 우리도 자라야 합니다. 반드시 우리 신앙이 자라고 성장해야지 제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퇴보하면 안 됩니다.

디모데의 진보

오늘 본문에는 디모데라는 젊은 목회자가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선교 동역자요 또 믿음 안에서 아들처럼 아끼던 디모데를 자신이 개척해서 2년 6개월 동안 목회한 에베소교회의 2대 담임목사로 파송합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무슨 인격적인 문제가 능력문제가 아니라 우선 나이가 참 젊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라고 나와 있듯이 이 때 디모데의 나이가 아직 40대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젊은 20~30대였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처음 우리교회 부임한 것이 만 39살일 때인데 여러분 보시기에 얼마나 젊어 보였겠습니까? 젊다 못해 어려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도 나이 때문에 때로는 업신여김을 당할 때도 있었던 모양이지요?

또 한 가지, 이 본문에는 안 나오지만 디모데는 아주 소심한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디모데전서 5:23에 보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위장병을 위해 포도주를 약으로 조금씩 쓰라고 권합니다. 모든 목회자가 거의 소화불량을 가지고 있지만 이 두 구절을 묶어 생각해 보면 특히 디모데는 상당히 소심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만성소화불량과 위장병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 생각해 봅시다. 나이도 어립니다. 성격도 소심합니다. 어쩌면 담임목사로서는 자격미달일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전임자가 누굽니까? 그 위대한 사도 바울선생이니 이런 분 후임으로 가면 스트레스가 더 커집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을 몇 번이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수 1:6, 7 등). 여호수아도 디모데도 다 전임자가 워낙 대단해서 받는 스트레스가 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여러 면에서 불리한 조건을 가진 디모데인데 과연 바울 선생의 뒤를 이어 에베소교회를 잘 목회해 나갈 수가 있을까요? 성도들도 걱정하고 누구보다 디모데 자신이 가장 걱정이 컸을 것입니다. 성격 상 잠도 못자고 고민하고 그래서 위장병이 걸렸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또 한 사람, 이런 디모데를 걱정한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아들처럼 아끼는 디모데가 목회가 어려울까봐 노심초사 걱정한 것입니다. 안 그래도 어른들이 보면 젊은 친구들 일 하는 것이 신통치 않아 보이고 걱정되게 마련인데 바울의 마음이야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기도 끝에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힘들지만, 안 좋은 조건도 많지만 디모데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에게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요? 아닙니다. 남들과 다른 어떤 숨은 재능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바울이 믿은 것은 디모데의 자세였습니다. 디모데는 남들보다 특출한 능력이나 재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맡은 일에 전심전력하여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처음에 더베와 루스드라에서 선교할 때 디모데를 처음 보고 그를 선교 동역자로 삼은 이유도 물론 이 청년이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서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우고 믿음으로 자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좋은 자세를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젊다 못해 어린 디모데를 마음 놓고 에베소교회에 담임목사로 파송한 것입니다.

그 증거들이 오늘 본문에 많이 나옵니다. 우선 7절에 보면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는 권면이 나오는데 이는 디모데가 경건 훈련을 잘 안 해서 잘 하라고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가 그런 경건훈련을 잘 하는 목회자이기에 더욱 열심히 하가고 격려한 것입니다. 따라서 디모데는 누구보다 경건의 훈련을 부지런히 쌓은 목회자였던 것 같습니다.

또 12절에서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권하는데 이것을 봐도 디모데가 젊은 나이와 다르게 성도들에게 모든 면에서 신앙과 삶에서 모두 좋은 본이 되어 진심으로 존경 받은 목회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13절에는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하는데 이 역시 디모데가 다른 무엇보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잘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한 목회자였다는 뜻입니다. 14절에 보니 디모데는 예언의 은사도 받은 사람이었고, 16절에 보면 현재 자신이 목회하는 것에 자만하지 않고 늘 자신과 그 가르침(요즈음 말로 바꾸면 설교와 성경공부 등)을 살피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내가 지금 목회 제대로 하고 있나, 내 설교가 어떤가?" 하면서 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가는 그런 목회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15절입니다. 다함께 읽습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이 개역개정판에는 '너의 성숙함'이라고 번역했지만 오히려 옛날 보던 개역성경에 '너의 진보'라고 번역한 것이 더 좋은 번역인 것 같습니다. 표준새번역도 "그대가 발전하는 모습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게 하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도 "그대가 발전하고 있음을 모든 사람이 보고 알 수 있게 하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야, 네가 타고난 능력도 있고 또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서 믿음으로 자란 것도 장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타고난 능력이나 오래 믿은 것을 자랑하고 자만하고 거기에 머물면 너는 끝이다. 더 이상 어떤 진보도 발전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끊임없는 경건훈련과 노력으로 항상 신앙의 진보를 이루어야 한다. 믿음도 자라고 인격도 자라고 모든 것이 자라야 정말 존경받는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있는 법이고 그래야 누구도 너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퇴보, 우리의 진보

사람에게 진보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살아있는 사람이 자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키도 자라고 인격도 성장해야 합니다. 사람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나무는 언뜻 보면 자라는지 안 자라는지 잘 모르지만 세월이 지나면 엄청나게 성장한 것을 알게 됩니다. 나무가 성장을 안 한다면 죽은 것이지요. (강단의 꽃을 가르치며) 여기 이 꽃은 아름다워 보여도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 밖에 있는 나무는 살아있습니다. 비록 눈에 분명히 보이지는 않지만 성장하고 살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나이를 먹어도 성장하지 못한다면 그건 곧 죽은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영적으로는 어떨까요? 육체적인 성장은 언젠가는 멈추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도 적당한 나이가 되면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포가 늙어가고 점점 죽어갑니다. 나무도 오랜 세월이 흐르면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성장은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아니,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세계에는 이런 말은 없습니다. "이만 하면 됐다, 이 정도면 다 컸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런 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신앙세계에서는 계속해서 커야 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세월이 흐르는데도 교회 다닌 지 오래 되었는데도 신앙이 제자리걸음이거나 오히려 뒤로 퇴보한다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죽은 것입니다. 안 자라면 죽은 것입니다. 우리 영도 성장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살아있다면, 건강하다면 반드시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아져야 합니다. 작년에 비해 올해가 더 진보가 있어야 하고, 내년에는 더욱 성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따라잡히고 영적인 세계에서 연수만 자랑하지 영적으로는 완전히 뒤떨어진 낙오자가 되고 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발전, 성장하는 교회들 가운데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보다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교회들이 훨씬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래 된 교회들이 긴 역사만 자랑하며 "우리가 누군데,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인데" 하며 자기가 지금까지 가지고 누려온 것에 대한 자랑과 자만에 사로잡혀 새로워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퇴보냐? 제자리걸음이냐? 아니면 진보냐? 우리는 지금 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내가 어떤 신앙인이 될 것이며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결단하십시오. 내 조건과 환경이 안 좋다 해도 내 마음에 열망이 있으면 가능합니다. 부지런히 경건훈련을 쌓고 변화의 몸부림을 쳐보십시오. "나도 언젠가 사람들이 눈을 비비고 다시 볼 정도로 믿음이 부쩍 자라야지." 하는 거룩한 욕심을 가져 보십시오. 그러면 자랍니다. 나도 신앙의 큰 거목이 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거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완성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완성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부족합니다. 다만 지금도 꾸준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성장하는(엡 4:13)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하셨습니다. 내가 다 성장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더 이상 배우고 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절대 안 쓰십니다. 그래서 그 대단한 사도 바울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너의 진보)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여기서 본(本)이 되라는 것은 모델(model)이 되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오래 믿으면 적어도 남들에게, 특히 신앙생활 처음 시작하는 분들에게 "나도 저분처럼 믿으면 되겠구나. 말이나 행동이나 믿음이나 사랑이나 봉사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저 분처럼만 하면 내 믿음이 크겠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의 긍정적인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지요. 이 말씀은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올해뿐 아니라 평생토록 마음에 새기고 이루어가야 할 평생의 목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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