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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혹받은 꿈 (창 3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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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받은 꿈(창 39:1~10)
 
  어떤 학교에서 시험문제에 이런 문제가 나왔더랍니다. 흥부전에 보면 흥부가 형님인 놀부의 집에 찾아갔다가 놀부의 부인인 형수님한테 밥주걱으로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흥부가 놀부의 부인인 형수님에게 밥주걱으로 귀싸데기를 얻어 맞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A라는 학생은 답안지에 (흥부가 얼굴에 밥풀 붙여서 자식들에게 밥알이라도 먹이고 싶어서)라고 썼고, B라는 학생은 (형수의 심보가 더러워서), C라는 학생은 (시동생의 거지꼴의 모습이 꼴 보기 싫어서),  D라는 학생은 (자꾸 보채서 사람을 피곤하게 하니까).............
  그런데 어떤 학생은 답안지에 다음과 같이 썼더랍니다.("형수님 저, 흥분돼(데)요, 형수님 저 흥분돼(데)요"하는 말에  당황한 놀부 마누라가 밥주걱을 가지고 귀싸대기를 올린 것)이라고 썼더랍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학생을 불러다 놓고 이 답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그 학생왈 "흥부가 자식들이 배가 고파하는 것을 참아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찾아간 놀부형님댁 집 부억에서 놀부의 마누라가 밥을 짓고 있었는데, 현대부엌이 아닌 전통부엌에 한복을 입고 밥을 짓고 있었던 것이지요. 전통부엌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가마솥에서 밥이 익어가고 밥주걱으로 밥이 뜸이 잘 들도록 이리 저리 주걱질을 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부억에서 밥짓는 아낙네의 자세와 옷 메무세가 뻔하지 않습니까? 이 때 흥부가 부엌문을 들어서면 자신이 왔음을 알린 것입니다. "형수님 저, 흥분돼(데)요, 형수님 저 흥분돼(데)요" 하자 당황한 놀부 마누라가 밥 뜸들이던 밥주걱을 가지고 귀싸대기를 올리고 만 것이라."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입니다만 사전에서 유혹이란 말을 찾아보면 "1, 꾀어서 정신을 혼미하게 하거나 좋지 아니한 길로 이끔, 2, 성적인 목적을 갖고 이성을 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혹은 인생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기 위하여 정신이나 감정이나 육체를  흥분시켜 꾐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유혹받은 꿈"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구덩이에 빠진 꿈을 하나님께서 꺼내셔서 무대를 가나안 땅에서 애굽땅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더 넓은 땅으로 옮겨졌던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꿈이 구덩이에 빠졌던 것이 기회가 되어서 더 넓은 곳으로 옮겨지거나 전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새로운 세계로의 인도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꿈의 말살이 아니라 꿈을 이루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이끄심이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옮겨진 그 곳에서 세 가지 중요한 훈련을 받게 됩니다. 이 훈련은 요셉이 꿈을 이루는데 절대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로 그는 봉사훈련을 받았습니다. 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총무로 주인의 재산을 모두 관리함으로써 미래에 총리로서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은 주인의 일을 항상 자기 일처럼 성실하고 정성스럽게 처리했기 때문에 주인에게서 모든 것을 위임받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요셉은 절제훈련을 받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동침하기를 청하였을 때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도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이 자기를 희롱하고,겁간하려고 하였다고 모함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절제를 하지 못해서 실패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봅니다. 절제란 바로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요셉은 젊은 청년으로서 정말 절제하기 힘든 정욕을 제어하는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셋째로 요셉은 고난훈련을 받았습니다. 요셉이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혀 많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요셉은 정치범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정치 경제 사회 등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모든 상황을 배움의 기회로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삶의 현장을 학교로 생각해야 합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이렇게 부딪치며 배우는 세상이 더 크고 더 높은 학교라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학문은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배우려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꿈에는 유혹이 따릅니다. 꿈꾸는 자는 유혹을 받습니다. 유혹없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꿈이 유혹을 받았을 때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이기면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계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하셨고, [계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하셨으며, [계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계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하셨으며 [계21:7]에서는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하셨습니다. 유혹은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시험과 시련은 반드시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엡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하셨습니다. 혹시 지금 꿈이 구덩이에 빠져서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더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는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 꿈이 유혹을 받고 있어서 망설이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유혹의 길은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가 있음을 기억하고 유혹의 욕심을 버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내가 원치 않는 자리로 옮겨질지라도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내가 원치 않는 곳에 자리를 펴고 있을 때 우리는 "이 곳은 내 자리가 아니야 그러니 대충살아도 돼"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아까운 시간만 보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 가든, 어떤 상황이 되든지 하나님 앞에서의 삶(Coram DEO)은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왜 내 자리에 있지 않고 이런 곳에 있게 되었나? 하고 괴로워할수도 있고, 힘들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충, 시간이나 보내고 세월을 허송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악한 마귀 사단은 유혹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가는 길을 주께서 아시니 한 순간도 헛된 것이 없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가야할 길로 있어야 할 곳으로 인도하심인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어느곳에 가든지 요동하지 않음은 주의 팔을 의지함이라" 찬464장,

  어느 곳에 가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이 함께 하심인줄로 믿고 요동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뢰를 주는 일관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위기의 순간에도 건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꿈꾸는 자에게는 유혹이 있습니다. 꿈을 속히 이룰 수 있다는 지름길의 유혹이 있습니다. 꿈을 쉽게 이룰 수 있다는 유혹이 있습니다. 옳지 않지만 빠른길로 가도록 하는 유혹입니다. 그리고 꿈을 포기하도록 하는 유혹도 있을 수 있습니다. 유혹은 때때로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합니다. 내가 뿌리치기 힘들도록 강력합니다. 그래서 많은 꿈꾸는 사람들이 유혹에 넘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꿈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2. 유혹은 우리의 약한 부분으로도 오지만 그보다 더 우리의 강점을 통해 들어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생각할 때 하인 하나쯤, 종놈 하나쯤 내 마음대로 못하겠나 하는 마음으로 유혹했을 수도 있습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종이라는 신분은 약점이었습니다. 이처럼 약점을 통해서 유혹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강점을 통해서 유혹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용모가 흠모할만한 것이 없어도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했을까요? 요셉이 현명하지도 않고 정말 정내미 떨어질 만큼 그런 낮은 사고력을 가지고 미련스럽게 보였는데도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요셉의 빼어난 용모는 유혹의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지혜롭고 현명하고 곧고 아름다운 성품이 유혹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꼭 약하기 때문에 시험을 당하고 유혹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점에 대해서 칭찬받고 싶고, 내세우고 싶고 또 강점을 부추기면 자신도 모른 사이에 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강점을 가지고 교만하지 말고 늘 겸손히 하나님이 주신 강점을 하나님을 위해서 쓸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내 강점이 유혹을 만날 때 능히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강점이 죄 짓는데 쓰이지 않기를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강점으로 주의 일해야 합니다. 강점을 가지고 꿈을 이루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유혹인가 아닌가를 구별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나의 신앙이 영구적으로 계속 성장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목적에 부합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3. 유혹을 기회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은 정말 끈질기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힘든 유혹이었습니다. 이런 유혹을 호사가들은 생각할 때 기회로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것을 기회로 생각합니다. 죄 지을 기회도 기회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유혹은 기회가 아닌 것입니다. 유혹은 우리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대상이며 끝까지 뿌리쳐야 할 독약인 것입니다. 벗어나야 할 함정인 것입니다. 요셉은 유혹을 받았을 때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8,9절에서는 거절하기도하고 타일러 보기도했습니다. 10절에서는 "동침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함께 있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12절에서는 "뿌리치고 도망갔습니다"
  문이 열려 있다고 들어가면 안됩니다. 그것도 도적이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요셉은 여자가 마음을 열어주었다고 해서 그것을 기회로 삼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거절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어쩌면 '우리 딱 한번 만,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을테니 딱 한번만 동침하자'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딱 한번만"이라는 유혹의 말은 사단이 처음 세상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사용하는 가장 강력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흔한 유혹인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셉도 사람입니다. 그도 외로웠을 것입니다. 집 떠나온지 오래되었고 먼 땅에 팔려와서 살아가는 인생살이입니다. 유혹을 기회로 삼고 인생을 쉽게 살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외로움을 핑계 삼아서 유혹을 기회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결코 쉽게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유혹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도 자기 나름대로는 이유가 있고 변명이 있고 합리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유를 대고 변명을 하고 합리화를 시켜도 유혹을 기회로 삼아서 범죄한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뿌린 것은 언젠가는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유혹을 기회로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유혹을 기회 삼지 않기를 바랍니다. 유혹은 기회가 아니라 무서운 함정인 것입니다. 절대로 아름다운 유혹은 없는 것입니다.


  4. 요셉이 유혹을 뿌리치다가 당한 고소와 고발에서 건짐을 받았던 이유, 보디발이 요셉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무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이 점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보디발이 왜 요셉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고대 노예 사회에서는 주인이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부인을 욕보이려고 한 노예를 죽이지 않고, 감옥에 보낸 것일까요?  그것은 보디발의 상황분석력의 결과입니다. 보디발은 아내도 알고 요셉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평소에도 멋진 남자만 보면 꼬리를 치는 여자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정직한 사람이며 자기 것이 아니면 무엇이든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자신의 집이 복을 받게 된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은 요셉의 결백을 믿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보디발이 이러한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요셉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고 감옥에 집어넣어버렸을까요? 그것은 다만 체면과 부끄러움 때문에 아내의 잘못을 폭로하지 않고, 요셉을 감옥으로 보낸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감옥에 가서도 보디발은 요셉의 후원자가 되어주었습니다. 창 40:4절에 보면 "시위대장이 요셉으로 그들에게 수종하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고 했는데, 창39장과 창40장 사이에 바로의 시위대장이 바뀌었다는 특별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창40장에 나오는 시위대장은 보디발입니다. 그 보디발이 술맡은 관원이나 떡 맡은 관원이 들어가는 특별 감옥에 요셉을 집어 넣어 거기서도 역할을 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제 보디발이 요셉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명확해집니다. 보디발 조차 요셉의 결백을 믿을 정도로 요셉의 평상시의 삶은 신실했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이 감옥으로 갔다는 사실 자체가 간증이요  승리입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감옥은 낮아짐이 아니라 승리의 장소였습니다. 장차 하나님이 높이시기 위한 자궁이요 모판이었습니다.

  요셉의 꿈처럼 꿈이 유혹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꿈꾸는 자에게는 유혹이 찾아옵니다. 유혹을 기회로 생각하지 말고 생명 걸고 유혹을 이기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야 꿈을 이루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 33:15~17을 함께 찾아 읽고 마칩시다. "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네 눈은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 광활한 땅을 눈으로 보겠고"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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