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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약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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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약 2:1-13)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당시 영어 참고서의 대명사와도 같았던 것이 '정통종합영어'라는 책이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매 과마다 유명 인사들의 글이나 연설문이 지문(至文)으로 실려 있었는데, 그 중에 제게 아주 인상 깊었던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인권옹호가로 유명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연설이었습니다.
  그 글은 인종차별이란 것이 실제로 피부로 느끼는 당사자에게는 그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생생하게 전해 주는 것이었는데, 그 제목은 "왜 우리는 기다릴 수 없는가(Why We Can't Wait)"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감동적인 연설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인종차별의 날카로운 화살을 느껴 보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기다려라.'고 말하기가 쉬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악독한 폭도들이 당신의 부모를 마음대로 린치하고 당신의 형제자매를 기분 내키는 대로 물에 빠뜨리는 것을 당신이 보았을 때, 증오심으로 가득 찬 경찰관들이 당신의 흑인 형제자매를 욕하고 발길로 차고 짐승처럼 취급하고 심지어 죽이는 것을 당신이 보았을 때, 당신의 여섯 살 난 딸에게 방금 텔레비전 광고에 나온 공공 유원지 공원에 왜 갈 수 없는지를 설명해주려고 애쓰다가 당신의 혀가 뒤틀리고 말이 더듬어지는 것을 느끼게 될 때, 그리고 흑인 아이들은 놀이공원에 입장금지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당신의 귀여운 딸의 작은 두 눈에서 눈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볼 때, 그리고 당신의 딸의 어린 마음의 하늘에 열등의식의 침울한 구름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을 볼 때, 백인에 대한 원한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면서 그 어린 마음이 비뚤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될 때, 해가 뜨나 해가 지나 '백인'과 '유색인'이라고 쓰인 그 괴로운 간판들을 보면서 당신이 마음에 굴욕을 느낄 때, 그리고 당신은 항상 발돋움을 한 불안한 자세로 사는 검둥이라는 사실에 낮에도 어쩔 줄 모르고 밤에 꿈속에서도 시달림을 당할 때, '나는 아무 것도 아닌 놈'이라는 타락감과 영원히 싸워야만 할 때 - 그때면 당신은 왜 우리들이 더 기다릴 수는 없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글이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처음으로 읽게 되었을 때에 순간 제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축축해졌던 순간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인종차별' - 말이 간단해서 그렇지 그것을 직접 자기 피부로 체험해 본 사람에게는 정말 쓰디쓴, 정말 아픈 고통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피부색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한 경우이지만, 이 인간사회에는 그런 인종차별 말고도 온갖 종류의 사람차별이 예로부터 지금까지 존재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 안에서는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말씀입니다.
  1하반절에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했으며, 또 두 번째 문단이 시작되는 9절에도 역시 "만일 너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람을 외모로 취하다'라고 번역된 말은 영어 성경에 보면 'favoritism'(편애) 혹은 'partiality'(차별)와 같은 단어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문자적으로 '얼굴을 받다(receive the face)'라는 말로서 우리나라말 번역에 '사람을 외모로 취하다'라는 것은 원문을 거의 직역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람차별이란 얼굴 따위의 외모나, 사회적 지위, 혹은 인종 등 사람의 겉만 보고 판단을 내리고 그 사람을 대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주신 말씀을 통하여 적어도 신자라는 사람이 특히 교회 안에서 그 어떤 사람차별도 결코 해서는 아니 될 이유 두 가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사람을 차별대우하는 것은 신자가 본받아야 할 주님의 성품과는 정반대로 거슬리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1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을 차별해서는 절대로 아니 될 제일의 근거는 바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요 삶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수식하는 말들 중에 특히 "영광의 주"라는 표현이 의미가 있습니다.
  마땅히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 할 존귀하신 주님을 위로 받들어 모시는 자라면 그 분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누구는 받들어 모시고 누구는 낮추어보는 따위의 차별행위를 결코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바로 골로새서 3장 11절에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고 말씀하신 그대로인 것입니다.

  이어지는 2절과 3절에 보면 "2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예를 들고 있는 상황의 무대는 "회당"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당시 이방 지역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배드리기 위해 모였던 장소를 가리킵니다.
  그 예배당에 두 사람의 방문객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테면 예배당 입구에서 안내하던 교인이 그 두 사람의 옷차림을 보고 한 명은 부자이고 한 명은 가난뱅이인 것을 단박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좋은 자리로 공손히 안내하고 가난한 사람더러는 "당신은 그냥 서 있든지 정 앉고 싶다면 땅바닥에나 앉으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야고보는 실제로 그런 일을 목격하거나 들었다기보다는 그런 극단적인 경우를 가정적으로 예를 들어 하는 말일 것이며, 그래서 약간의 과장법을 가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신자라 하는 자가 바로 그와 같은 식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경우가 생길 때 그것을 두고 야고보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이어지는 4절로 7절의 말씀에 "4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6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했읍니다.

  여기서 6절과 7절에 기록된 부자들의 압제와 훼방은 초대교회 당시 실제적인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때 즈음 로마사회에서 지배층에 속하는 계급들 중 특별히 소수의 대 상인들과 토지 소유주들은 더 많은 재산과 힘을 계속 불려나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조금 가지고 있던 논밭을 빚 때문에 저당 잡히고 결국은 넘겨주고 나중에는 자기 몸까지 팔리고 하는, 소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여기 '법정으로 끌고 가다'는 말이 바로 그와 같은 재산축적 과정에 생기는 소송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또한 그와 같은 부유층들은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는 자들, 즉 세력 있는 유대인들과 결탁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훼방하고 신자들을 박해하는 무리이기도 했습니다.
  야고보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부자라는 사실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로 직결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경고하신 말씀은 그 당시 다수의 부자들에게 분명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던 것도 현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시절에 교회 안에서는 부자 교인을 무조건 중히 여기고 가난한 교인을 멸시하는 빈부의 차별대우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런 모습을 두고 말하기를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즉 서로가 서로를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 즉 불신자들이 사람 보는 식을 그대로 본떠서 사람 판단을 내리는 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도 신자는 자기를 택하여 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깨닫는다면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본문 5절에서 간곡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자를 불러 주셨을 때에는 결코 사람의 능력이나 외모를 가지고 판단 내리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가난한 자라고 무조건 구원받게 되었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비록 사람에게는 멸시받는 가난한 자라 할지라도 오히려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한 "약속하신 나라의 유업"까지 풍성하게 내리심으로써 세상의 부요하다고 자만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성품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사람들의 입장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께 조금이라도 사람차별하는 것이 있으셨다면, 우리 주님께서 조금이라도 그 얼굴이나 사는 모습이나 그 생의 배경을 두고 그 사람 대하는 태도를 달리하셨다면, 그 주님 앞에 그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다 감동받고 주님을 사랑하고 믿게 되는 역사가 과연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전 민족이 다 혐오하는 세리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도 우리 주님은 조금도 그를 싫어하거나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삭개오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해 주셨을 때, 삭개오는 자기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온 동네가 다 멸시하는 창녀가 당신의 발밑에 엎드렸을 때 우리 주님은 그녀를 외모로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함을 많이 얻은 자가 더 많이 사랑하느니라"고 그 여인의 중심을 100퍼센트 이해해 주시면서 완전히 포용해 주셨습니다.
  온 유대 사람들이 다 증오하는 로마군대 백부장이 찾아왔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사회적 배경, 정치적 입장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라고 그의 믿음만 극구 칭찬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 역시 예수님 앞에서 무슨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만일 우리의 외모나 재력이나 학력이나 인격이나 덕의 정도를 가지고 판단하셨다면 우리 가운데 이 자리에 앉아 있을만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꼭 같이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기보다 조금 열등하다 싶은 교인을 향하여 차별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이야말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돌아서서 일백 달란트 빚진 동관을 감옥에 집어넣는 행위와 꼭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신자는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특히 적어도 교회 안에서 만나는 성도들을 대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그 고마우신 성품을 기억하면서 바로 그 방식 그대로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본받아 살고자 하는 믿음을 가진 신자답게 그 주님께서 나를 영접해 주신 그대로 이웃과 교우들을 대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사람을 차별대우하는 것은 신자에게 내려주신 가장 큰 계명을 정면으로 불순종하는 죄입니다.

  사람을 조금 차별하는 것은 무슨 살인이나 혹은 배교 따위에 비하면 별 대단치 않은 죄인 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바로 본문 8절과 9절에 "8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사람 차별의 죄를 두고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신 이 유명한, '크고 첫째 되는 계명과 꼭 같은 둘째 계명'을 지키는 것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이 둘째 계명은 여기서 밝힌 그대로 율법 중에서도 "최고의 법(the royal law)"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면 이 최고의 법을 지키는 것이며 잘하는 것이지만, 만일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바로 이 율법에 거치는 죄를 짓는 것이며 바로 이 율법에 의하여 "범죄자"로 낙인을 찍힐 수밖에 없다는 단언입니다.

  이어지는 10절과 11절에 보면 "10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간음이나 살인이라는 것은 그 행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적극적인 범죄'인 까닭에 그것이 죄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 어느 사람에게도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죄'는 '무엇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죄'인 까닭에 상대적으로 '좀 덜 중한 죄'처럼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우리가 빠지기 쉬운 맹점이 있다고 본문이 지적해 줍니다.
  야고보가 여기서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라고 이 제 6계명을 인용하는 것은, 사람을 차별대우하는 것은 형제를 미워하는 살인죄나 꼭 마찬가지로 명백한 죄이며 또한 중범죄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율법의 말씀 중 다른 것 다 지키고 어느 것 하나만 범하더라도 역시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하물며 그 율법 중에서도 가장 큰 두 가지 계명들 중에 하나인 이웃사랑의 계명을 어겼을 때야 오죽하겠느냐 하는 것이 이 구절들이 강조하는 요점인 것입니다.

  그리고 12절과 13절에서 결론적으로 말씀하기를 "12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자유의 율법"이란 표현은 1장 25절에도 나오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 율법, 즉 복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주님에 의하여 선포된 복음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심판받을 위치에 있는 것을 상기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말과 행동을 심판하게 될 그 "자유의 율법" 즉 우리 주님의 복음은 어떤 심판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긍휼 없는 심판과 긍휼 있는 심판"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 이하 35절의 말씀에 보면, 아까 인용했던 악한 종,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옥에 가둔 그 종에 관한 비유의 결론 말씀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주인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은 것처럼 자기 동관을 꼭 같이 '불쌍히 여길' 줄 모르는 종은 결국에 가서는 그 자신도 역시 주인으로부터 꼭 같은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형제를 외모로 판단하고 차별하는 것은 곧 이웃사랑의 법을 어기는 죄이며, 그처럼 사랑이 결핍된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행치 아니하는 그 죄로 인하여 자기 자신도 긍휼 없는 심판을 당하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가 아니겠습니까?

  반면에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행동은 바로 주님께서 자신을 택하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신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그런 참된 신행일치의 신앙은 사람을 영벌에 빠뜨릴 심판마저 이기고 자랑할 수 있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사람차별은 이처럼, 우리가 언뜻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중한 계명과 그대로 직결되어 있으며 각 신자는 바로 이 계명의 순종 여부에 대하여 장차 주님 앞에서 심판받게 될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결코 이 이웃사랑의 계명에 걸리는 죄를 함부로 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쉽게 기억하고 반드시 실천하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계명들을 이 하나로 요약정리해 주신 것입니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이 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첫째 계명을 이미 지키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동시에 성도로서 마땅해 행해야 할 다른 모든 봉사와 충성의 삶을 향한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십계명은 잘 외우지만 이 예수님의 '새 계명,' 딱 한 가지로 요약해 주신 이 계명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아니하는 버릇을 잘 고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십계명에 나오는 이웃사랑의 계명들은 '다른 사람에게 이런저런 악을 행치 말라'는 부정명령들이 대부분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라'는 긍정명령 하나로 통일시켜 주심으로써 그저 남에게 나쁜 짓 하지 않는다고 다 된 줄로 착각하지 말고 보다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교우라도 결코 차별대우하지 말고 오직 늘 자신부터 낮추고 먼저 대접함으로써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교회생활의 제1조'에 해당되는 이 새 계명의 법부터 꼭 지키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차별은 인간사회에서 당하게 될 때에도, 아까 마틴 루터 킹의 말대로 정말 '한시라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하물며 그런 일을 누가 모처럼 교회에 찾아왔을 때 어떤 모양으로든지 느끼게 되든지 당하게 된다면 그 기분이 어떠하겠습니까?
  사람차별 그 자체만 해도 지극히 악한 행위이지만 더구나 그것이 "너희 회당에" 즉 '교회 안에서' 벌어지게 될 때에는 더욱 최악의 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 안에서 아름다운 옷 입은 사람과 더러운 옷 입은 사람을 두고 차별하는 일은 없을지 모릅니다.
  헌금 많이 하는 사람과 적게 하는 사람을 두고 차별하는 그런 유치한 차별은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교회의 교인들 중에서 내가 차별을 두고 사랑하고 차별을 두고 교제하는 일들은 정말 없겠습니까?
  신앙생활 잘하고 자기에게 점잖게 대해 주는 교인에게만 마음이 끌리고, 교회생활에 문제를 일으키는 교인들을 심방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등한해지는 교역자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사람차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전도회나 같은 구역 안에서도 나와 말 잘 통하는 사람하고만 가까이 지내고 그렇지 못한 교인하고는 그저 어색한 인사만 슬쩍 하고 돌아서 버리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이미 차별대우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 좋고 싫은 사람 싫은 것은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되십니까?
  그렇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것은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지극히 큰 계명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불러 주신 그 무조건적인 사랑의 성품을 전혀 깨닫지도 감사할 줄도 모르고 있으며 그 주님을 본받고자 하는 노력을 조금도 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혹 조금이라도 대하기 어려운 성도를 만나면, 좀 거북한 상대를 무슨 곤란한 상황에서 대하게 될 때면, 저 유명한 표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라면 이런 경우에 이런 사람을 어떤 식으로 대해 주셨을까?' 하고, 우리 영광의 주 그리스도의 성품을 상기하고 닮아가려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적어도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함으로써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잘못을 막을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습관만 들일 수 있다면, 잘만 하면 구원할 수 있었던 한 영혼을 나의 편애와 차별로 인하여 완전히 놓쳐 버리는 엄청난 과오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잘 알려진 유명한 예화입니다.
  백인들만 모이는 어느 미국 교회가 있었습니다.
  한 흑인 아이가 그 교회에 들어가려 하다가 입구에서 제지를 당하여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교회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엎드려 울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얘야, 너는 왜 거기서 울고 있니?"라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저 교회에 들어가고 싶은데 못 들어오게 해서 그래요."라고 그 흑인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아이를 안고 쓰다듬으시면서 "괜찮다. 울지 말아라. 나도 그 교회에는 들어가지 못했단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약하고 가난하고 못난 사람이라고 차별하고 멸시하는 교회는 그 약하고 가난하고 못난 사람의 친구 되시고 주님 되신 예수님을 문전박대하는 교회입니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고 마지막 날에 책망 받을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가벼이 대할 때 바로 우리는 예수님을 그처럼 홀대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 하나님께서 못난 우리를 택하실 때 보여 주신 그 성품을 기억하고 장차 우리가 판단 받게 될 새 계명의 법을 상기하면서, 이 교회를 통하여 모든 성도들 사이에서 실로 조건 없는 사랑, 차별 없는 교제를 나누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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