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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말 죽었습니까? (롬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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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죽었습니까? (롬 6:1-11) 

저는 진해에서 목회를 할 때 한 때 의사의 처방만 믿고 약을 먹었다가 아주 큰 낭패를 본 적이 있습니다.
편두통으로 인해 고생을 하던 때 편두통 치료제였던 cafergot 라는 약물을 주기적으로 복용을 했습니다.
편두통이 완화가 되어 많은 도움을 얻게 되었는데 이제 그 약을 끊을 수가 없을 정도로 의존을 하게 된 것입니다.
동시에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니까 약물에 대한 효능도 삭감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신경과 전문의 집사님에게 상담을 하게 되었고 두통이 오더라도 2주 동안 참고 견디라는 말을 듣고 이 약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2주일 동안 정말로 지옥을 갔다가 올 정도의 고통을 인내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신경과 전문의 집사님이 약속한 대로 2주 정도 약을 끊고 견디다 보니 정말로 그 약을 복용하지 않고도 편두통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저는 그 때 처음으로 약물중독이라는 말을 실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약을 많이 먹는 것을 약물남용이라고 합니다.
‘남용(濫用)’이라는 말의 국어사전적인 의미는 이렇습니다.
“함부로 쓴다.”

이와 비슷한 단어로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오용(誤用)’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말 그대로 잘못 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공익광고협의회의 공익 광고의 문구 중에 약물의 남용이나 오용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진 홍보문구가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남용, 오용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바로 잡을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나쁜 단어가 있습니다.
‘악용(惡用)’이라는 단어입니다.
악용이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악하게 이용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많이 이 단어가 쓰이는 용도가 법조계 쪽인 것 같습니다.
법의 빈틈을 이용하여 자신에게는 엄청난 불의 이익을 챙기면서 타인에게는 중대한 해를 입히는 아주 질 나쁜 사람들이 이 땅에는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자면 인터넷 상에서는 자유롭게 자신의 글들을 익명으로 개진할 수 있다는 빈틈을 이용하여 선한 사람들을 공격하고 괴롭히는 일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어떠한 이야기를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에 대하여 악용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설교의 서두에 왜 악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까?
오늘 본문이 바로 말씀에 대한 악용에 대하여 경고하는 바울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로마서 5장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① 성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있었기 때문임을 선포했습니다.
② 성자 예수님의 특별한 순종하심이 있었기 때문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5:20절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율법이 들어 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말씀의 은혜는 정말로 엄청난 은혜입니다.
이 부분을 원어성경에는 ‘uperperisseuw’ (휘펠페리스슈오) 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원어의 뜻은 엄청나게 많이 있다, 지나치게 풍부하다, 풍요하다, 흘러넘치다, 풍성하게 즐기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문장을 웹스터 영어성경에 보면 ‘grace did abound more exceedingly’라고 표현했습니다.
직역하면 ‘은혜가 초과적으로 많이 풍부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영어 성경에는 'overflowing' 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모두가 ‘흘러넘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로마서 5:20절의 바울의 말씀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적어도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수많은 죄를 저질러서 감히 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닌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드디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돌아와 보니 나 같은 놈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기적이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달았는데 뒤돌아보니 그 은혜가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다가 주인께 돌아온 사람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강조하는 바울의 독특한 어법이었습니다.
설명하는데 약간의 어패가 있는데 이 설명이면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서울의 연동교회를 시무하는 목사님이 이성희 목사님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박사과정 마지막 코스워크를 가잘 때 ‘목회행정학’을 강의하셨기에 그 때 개인적으로 교제를 쌓았습니다.
여러 성도님들은 우리 교회에서 전도부 세미나를 2년 전에 가질 때 강사로 오셔서 친분이 있으신 목사님이십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소개되었지만 많은 목회자들에게 이성희목사하면 이상근박사의 아들 목사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대구제일교회 목사이면서 이상근주석의 주인공이기도 한 이상근목사의 아들로 유명한 인지도를 갖고 있는 분입니다.
그 분이 한 번 이런 이야기를 강의 중에 했습니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목사가 되는 것에 대하여 갈등을 해 본적이 없었다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당연히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그것 때문에 몸살을 앓은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모든 목사가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고 오후 9시 이전에는 반드시 자는 사람인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를 보면서 한 번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없고 본인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또 한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사가입니다.
노예 상인으로 살던 인간 백정이었던 존 뉴턴은 술을 즐기고 폭력을 일삼으며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잔악한 방법으로 노예장사를 해서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한 번은 런던에 갔다가 술에 취해 장난삼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예배드리고 있는 한 교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뉴톤은 예배당의 맨 뒤 한쪽 구석에 앉아 무심코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 어느 누구보다 완악하고 무서운 것이 없었던 그가 숙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마침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흐느껴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그가 들은 설교는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였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말씀이 그의 심령에 부딪혀 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악독한 죄인을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자기의 죄를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그는 성령의 거듭남을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날 이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성희 목사에게 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뉴턴에게 오신 하나님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아주 모범적으로, 아주 평탄하게 신앙생활을 한 성도가 느끼는 하나님께 대한 감동과 뉴턴과도 같은 사람이 만난 하나님의 감동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은혜의 감동의 정도는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로마서 5:20절은 바로 이런 의미를 갖고 있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그런데 이러한 은혜의 말씀을 은혜로 받지 못하고 말씀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서를 쓰고 있는 당시의 로마교회와 율법적인 체계를 포기하지 않고 예수를 믿으려는 사람들이 말씀을 율법적으로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악용합니까?
오늘 본문 1절이 암시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진정한 복음을 왜곡하고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던 사람들이 앞에서 전술한 20절의 말씀을 이렇게 왜곡합니다.
본말을 전도시켜 말씀을 왜곡하며 악용하였습니다.

어떻게 악용합니까?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면 그러면 우리는 죄를 할 수만 있으면 더 지어야하지 않겠느냐는 딴지걸기로 말씀을 악용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죄를 더 지어야겠다는 말도 안 되는 이론으로 말씀을 악용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악용에 대하여 바울은 단호하게 이러한 악용을 하지 못하게 못을 박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럴 수 없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왜 그럴 수 없습니까?
왜 우리는 은혜를 더 많이 받기 위해 죄를 짓는 일을 하겠다는 궤변을 인정할 수 없습니까?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1. 죄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첫 번째의 요지는 접근하기 쉽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적인 정체성을 줄 수 있는 요지이기에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본문 3-4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한 눈에 확 들어오게 정리하면 이렇게 단순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나도 그 때 같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의 죄도 완전히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다시 부활하실 때 나의 죄는 완전히 죽고 나는 새사람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단어로 우리가 이미 3장에서 살펴 본 ‘칭의(justification)’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5절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저는 이 신비로운 연합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이 은혜를 더욱 받기 위하여 죄를 지을 수 없는 가장 분명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진정한 접붙임을 당한 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나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셨기에 우리들이 지을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질문은 이제부터입니다.

교우 여러분!
지을 죄가 없는데 나는 현실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데 질문하신다면 제가 오늘 본문의 바울의 말씀에 의지하여 드릴 수 있는 답은 이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성도들이 죄를 계속해서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죄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의 수준을 조금 더 높이겠습니다.
위에서 말한 죄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가 갖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 이후에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단계라고 해서 ‘성화’(sanctification) 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바울의 표현은 이제 우리가 완벽하게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엄습해도 그 죄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인해 죄에 대하여 정말로 죽었다면 그것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이제 당연히 그 죄를 지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6-7절을 감동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우리가 적어도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이전에는 죄라고 하는 절대적인 폭군의 휘하에서 맥을 못 추고 주저 않아 죄의 종노릇하였지만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인해 죄가 완전히 죽었다고 확신하는 칭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그 죄를 단호하게 거부하며 그 죄를 떨게 하는 지배함이 휘감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화의 단계를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에게 로마서를 연구할 때 접할 수 있는 성화(sanctification)라는 흔치않은 대목이 나왔기에 아주 쉬운 성경적인 예를 들면서 이해를 구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누기복음 15장의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를 너무나 잘 압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재산의 절반을 아버지에게 요구하고 그것을 가지고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거지가 되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기사를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때 무슨 마음을 갖고 왔습니다.

눅 15:18-19절입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그래도 지은 죄를 알고 그렇게 회개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종놈의 하나라도 되겠다는 의지를 갖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예상치 못한 후의와 환대로 둘째 아들을 반겼습니다.

눅 15:22-24절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말 그대로 해피엔딩입니다.

자 이제부터 더욱 주목하십시다.
둘째 아들이 다시 아들의 권위를 회복했습니다.
종 놈 중의 하나라도 되겠다는 마음으로 돌아왔는데 아들의 지위를 다시 회복했습니다.
성경은 그 다음의 후속 편을 기록하고 있지 않아서 잘을 모르겠지만 이제 둘째 아들이 집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죽도록 효도하는 것입니다.
왜요?
아버지의 전적인 은혜 때문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 보셨습니까?
만약에 아들이 이런 은혜를 받고도 효도를 아버지에게 하지 않았다면 아들은 두 가지 중의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 둘째 아들의 회개는 거짓이었다.
ⓑ 이미 양심이 마비된 화인 맞은 양심이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죄인이었던 신분이 의인이라는 신분으로 칭의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칭의의 주인공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성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화의 삶을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칭의의 은혜가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롬 6:1-2절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이 은혜가 흘러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죄와 싸워 이길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8-11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두 번째의 도전은 이제 죽음이 아니라 부활로 옮겨가는 것을 봅니다.
바울이 무엇이라고 천명합니까?
예수와 함께 우리들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장사 지낸 바 되었다는 것을 믿는 자는 두 번째의 은혜를 확신하게 되는 데 그것은 죄와 함께 죽은 뒤에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들도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게 된다는 은혜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곱씹습니다.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8절)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9절)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10절)
‘산 자로 여길지어다’(11절)

우리 주님은 죽은 자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탄의 대승리를 엿보는 것 같은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주님의 승리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신학적인 의미로 사탄의 세력과 싸워 이기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기 위하여 죄를 짓겠다는 식의 궤변론적인 발상을 도저히 할 수 없는 두 번째의 이유는 우리들은 죄와 싸워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가 싸우면 백전백패합니다.
우리가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은 내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를 지배할 수 는 능력을 주신 주님이 대신 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이 누구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의 승리를 이미 경험하시고 그 승리의 바턴을 넘겨 주신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들이 죄에서 싸워 능히 이기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시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시에서 전도를 하면서 사역을 감당하는 장면을 만납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하면서 주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행 17:3을 보니까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께서 다시 부활하셨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 졌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좆으나”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자 능력이 일어났습니다.
영혼구원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영혼구원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자 바울의 무리를 경계하던 무리들이 이렇게 외칩니다.

행 17:6절 후반절입니다.
“소리 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에도 이르렀도다”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영적인 흥분됨이 있습니다.
왜입니까?
성령의 능력은 세상을 뒤집어 업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권능이 임하면 우리는 죄와 싸워 이기며 세상을 뒤집어 업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교우들이 죄와 싸워 이기는 성령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런 글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변화는 발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수준이 낮은 것에서 높은 것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변화는 본질의 변화이다. 본질이 달라진 사람, 이 사람을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인’,‘새 사람’이라고 한다.”

저는 이 말에 200%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 갈파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러한 새 사람, 그리스도인이 탄생하는 유일한 통로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정말로 죄와 함께 죽는 것이다.”
 
교우 여러분!
정말로 죽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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