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복을 나누어주는 인생 (창 39:1-6)

  • 잡초 잡초
  • 379
  • 0

첨부 1


복을 나누어주는 인생 (창 39:1-6)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원하신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작은 복’과 ‘큰 복’ 2가지가 있다. (창12: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고 하셨다. 이런 복이 작은 복이다. ‘작은 복’은 ‘받는 복’이요, 이 땅에서만 누리는 복이다. 

그러나 (창1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다. 이처럼 나눠주는 복이 ‘큰 복’으로, 하늘에서도 누릴 수 있는 복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작은 복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큰 복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복 받는 사람보다, 복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기 원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5,000명 분의 식량을, 혼자 먹는 복을 받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은 5,000명을 먹이는 복을 주고 싶어 하신다. 우리는 ‘주는 복’보다 ‘받는 복’을 더 좋아한다. 5,000명을 ‘먹이는 사람’보다, 5,000명 분의 양식을, ‘혼자 먹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복을 나누어주는 인생이 되도록, 편안히 두지 않고, 시련과 역경이 있는 광야로 인도하신다. 시련을 통해 복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이는 모세와 다윗, 엘리야, 사도바울의 생애를 통해서도 증명된다.


1.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복을 나누어 주는 인생이 되도록, 황량한 광야로 인도하시는가?

복을 나누어 주는 인생, 큰 복을 받은 사람이 되려면, 고난을 통과해야 한다. 하나님은 요셉이, 큰 복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시련의 광야로 인도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아무 어려움 없이 자라던 요셉에게, 어려움이 찾아온다. 형들의 의해서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 요셉은 애굽의 종으로 내려가서, 애굽 왕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리게 된다(1). 여기에 기막힌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복을 나누어 주는 자가 되라고 부르셨다.

  그래서 결국 신임을 얻어, 보디발 가정의 총무가 된다. 노예들 중에서 가장 높은 총무가 되었고, 요셉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는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다(5). 뿐만 아니라,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복을 받았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어 궁궐에 있을 때, 하나님의 복이 애굽 백성들 가운데 임함으로, 백성들이 기근을 당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 세상에 복을 주는 인생이어야 한다. 우리 때문에 축복이 있어야 한다.

믿지 않는 가정이지만, 믿는 나 때문에 잘되고, 복 받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직장에 들어감으로, 그 직장이 잘되고, 주님의 복이 임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백성들이, 나라와 민족 가운데 존재함으로, 나라와 민족이 잘 되고, 복 받아야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가 안 믿기 때문에, 우리 집안이 이 모양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해야 한다. (신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로 인하여, 우리 가정에 축복이 일어나는가? 우리가 가정에 있기에, 믿지 않는 내 아버지가, 어머니가 잘되고, 흥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로 말미암아, 땅 위에 있는 모든 민족들이, 복 받는 역사가 일어나야, 진정한 복이며, 이것이 큰 복이다.

믿는 백성이든, 안 믿는 백성이든 상관없이, 믿는 백성이 그 모임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그 곳에 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위하여 보디발의 집을 축복하셨는가? 요셉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 복을 주신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국회로 들어가면, 그 국회가 변화되고, 백성들의 눈물이 닦여지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제인들이 있을 때, 그 나라 경제가 변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임해야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자리가 어디든지, 하나님의 복이 임해야 된다.


2.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복을 나누어 주는 인생이 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

(1)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아야 한다(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요셉이 끌려와 애굽에 있었지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 이는 훈련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종으로 있는 애굽에도, 함께하셨다. 그 이유는 부르심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도록 부르셨다.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 종이 되도록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복을 나눠주는 인생은, 하나님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백성이다. 다시 말해서, 나를 행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 때, 그 인생이 복을 주는 인생이 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믿는 가정에만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 따라서 신앙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 때, 인생은 바뀌게 되어 있다. 75세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임하니까 평범한 인생에서 위대한 인생으로 변화되었다.

요셉이 그렇게 고난당할 이유가 없는데, 왜 그렇게 고난을 당했는가?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그를 연단하사 키워주시어, 애굽의 총리가 되도록 하셨다. 애굽에 유학 간들, 그가 13년 만에 어떻게 총리가 되겠는가? 정치계에 투신한들, 13년 만에 어떻게 총리가 되겠는가?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어서, 성령님께서 이끌고 가시고자 하는 곳까지 끌고 가신다. 거기에는 뜻이 있고 목적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앞에서, 위대한 인생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삶에 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하시기 바란다. 고난에 숨어 있는 부르심을 깨닫기 바란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기 시작할 때, 인생은 고난을 이기고, 오히려 고난을 통해서 더욱 강해진다. (벧후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지금 우리 가정이 눈물의 가정인가? 남편이 매일 술 먹고 들어와, 아내와 싸우고, 빚에 쪼들리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나요? 이럴 때 우리 안에 원망이 있을 수 있다. 내가 왜 이런 남편을 만났나? 나는 왜 이런 아내를 만났나? 하필 이런 부모가 내 부모인가? 이런 원망과 서러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눈물과 고통 가운데도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고, 지금도 함께 하심을 믿는다.”는 고백이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 그런 백성이 바로 복을 나눠주는 인생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가정이 어떻고, 환경이 어떻든, 그것은 중요하지도,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가난하고, 못 배웠어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가정에 인도하셨고, 지금 나와 함께하신다고 고백할 때, 역전시키는 인생이 될 수 있다. 부르심을 알게 되면, 열등감을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지 못하면, 열등감에 빠지게 된다.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들어간 학생이 있었다. 그런데 그 학생은, 법대에 못 들어갔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조금 더 맞았으면 법대에 들어갔을 텐데…하며, 성적에 맞춰서 대학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나를 경영 대학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를 이 대학에, 이 가정에, 이 교회에, 이 환경 가운데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기 시작한다면, 열등감에 빠질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느 장소에 있든지, 그 장소가 하나님께서 부르신 장소라고 확신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가정 가운데, 학교 가운데, 직장 가운데, 이 교회 가운데 불러주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우리는 우연을 믿지 않는다. 운명도 믿지 않는다. 우리가 믿는 한 가지는, 하나님의 섭리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찾아오든, 그 장소가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장소임을 깨달으시기 바란다. 우리의 상황과 주변 조건이 어떻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줄 알고, 그 곳에 영향을 주는 인생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 곳에 부르신 줄 알고, 그 곳에 영향을 주면서 변화시켜야 한다. 잘못 선택했다고 운이 없다고 말하지 마시기 바란다. 특히 결혼하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그의 삶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 눈을 삐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할 때, 가정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내가 선택을 잘못 했구나” 그것은 결혼 전에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 때,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아름답다.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고 하였다. 보디발조차도 요셉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사람이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인생이구나, 그것을 보디발이 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증거 해야 한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증거 하는 귀한 인생들이 되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하나님의 섭리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함께하심을 고백하는 백성들이, 복을 주는 인생들이 될 수 있다. 

(2)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섬기는 자가 복을 주는 인생이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섬길 수 있어야, 국무총리로서 백성을 섬길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섬겨야 하는가?
 
①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섬겨야 한다.

요셉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섬겼다. 그의 섬김은 공동체를 위한 삶이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섬길 때, 그 공동체가 복을 받게 된다. 

우리 성도들은 자신이 속한 모든 공동체를 섬겨야 한다. 그럴 때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 우리 가정이 어렵고 복잡한가? 집안일을 통해 가정을 섬겨라.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서, 가정을 섬기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가정에 복을 주신다.

직장이 힘들고 어려운가? 열심히 일하고 섬길 때, 직장이 복을 받는다. 교회가 힘들고 어려운가? 우리가 교회를 섬기고, 각 기관을 섬길 때, 우리로 인하여 교회가 복 받고, 각 기관이 복을 받는다. 우리는 복을 몰고 다니는 존재다. 복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섬길 때, 하나님께서 복 주신다. 우리가 속한 곳에서, 맡은 직분을 주안에서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은혜가 없고, 복이 없고, 감사가 없는가? 우리의 공동체를 위한 섬김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은 공동체적인가, 개인적인가?

②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도 섬겨라.

요셉의 상전이 보디발인데, 보디발(태양신 레가 준 자)라는 뜻이다. 상관들이 믿지 않아도, 섬김으로 하나님을 증거 해야 된다. 

우리는 세상을 뒤집어엎는 백성들이 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뒤집어지고, 불붙이는 것도 중요 하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서, 나의 가정에서, 직장과 학교에서, 섬김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섬김으로, 나라가 변화고 시대가 변해야 된다.

가정을 섬기고, 직장을 섬기고, 민족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이다. 세상 가운데서 섬기는 자가 될 때, 바로 복을 주는 인생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교회에서 밤새워 기도하고 일하고, 직장에 가서는 늘 피곤해서 졸고 있다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섬김은, 교회 안에서 청소하고, 밥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섬기는 것이다. 안 믿는 남편이라고 할지라도 섬겨야 한다. 남편을 섬기고, 내가 있는 곳에서 섬기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 시작한다.

직장 생활하시는 분들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 오는 일 때문에, 직장 생활을 게을리 한다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교회에서 열심인 만큼, 우리가 활동 하는 경제계에서도, 정치계에서도, 연예계에서도 열심히 섬겨야 된다.

성도는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살고 있기에, 더욱 부지런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이 붙는 그 순간부터,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하기에, 그 순간부터 두 세계에서, 샌드위치처럼 끼어서 살아가는 삶의 고민이 생기게 된다. 천국의 시민이라지만 지상세계에서 살아야 된다.

의로운 삶을 갈구하지만, 죄악의 현장을 벗어날 수가 없다.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신이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과 현실, 믿음과 생활, 교회와 직장, 교회와 가정, 이 두 세계 사이에서 번민하고 있다. 한 번은 하나님 편에 서야하고, 또 한 번은 세상 편에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번민이 있다.

죄를 몰랐을 때는 갈등이 없었다. 이제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삶인지 깨닫고 난 다음부터, 오히려 고민이 생기게 되었다. 섬기기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이 먼저 힘을 얻고, 그리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교회에 모여서 은혜 받고, 흩어져서 전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3) 평강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6).

경찰관은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직업을 대략 알 수 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분위기나, 그 사람이 늘 생각하는 것들이, 은연중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가는 성도, 하나님께 늘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성도의 얼굴에는, 성도만이 지닐 수 있는 경건함과 온화함이 그의 외모에 배여 있기 때문이다.

요셉의 모습이 그와 같았다. 요셉의 신분은 노예인데, 다른 노예들처럼 천박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경건했고, 남다른 온화한 인품이, 그의 모습에 배여 있었다. 요셉은 힘들고 험한 세월을 살아왔지만, 그의 얼굴은 험악하지 않았다.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스데반이라는 집사님이 있었다. 스데반 집사님의 모습에 대해 기록하기를 (행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했다. 스데반 집사님의 깊은 신앙은,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천사의 모습을 느끼게 했다.

얼굴이 험악하게 생기고, 성격이 비뚤어진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은 아름답고 순결한 아가씨에게 청혼을 했다. 그러나 “당신처럼 험악하게 생긴 사람의 아내가 될 수 없다.”는 말로, 거절당했다. 이 청년은 인자하게 생긴 가면을 쓰고, 다시 청혼을 했다.

드디어 그 아가씨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내에게, 한 사람이 찾아와서, 남편의 과거와 가면을 폭로했다. 놀란 아내는 당장 남편의 가면을 벗겼다. 그러나 거기에는 험악한 얼굴이 아닌, 인자한 모습으로 변한 얼굴 모습만 있었다.

막비 비어 봄의 “행복한 위선자”라는 소설의 내용이다. 사람은 마음에 담고 있는 것에 따라, 얼굴표정이 변한다. 일반적으로 험한 세월을 산 사람은, 얼굴에 표가 나지만, 요셉은 평강을 유지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요셉은 평안했다. 하나님과 함께 했던 다윗에게서, 이 평안을 발견할 수 있다.

다윗은 (시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며,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자신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도 두렵지 않다고 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평안은 강한 데서 생기는가? 약한 데서 생기는가? 평안은 강할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약하면 불안하다. 동물의 왕국이란 TV 프로에서, 배부른 사자의 잠자는 모습을 보았다. 먹이를 잡아먹고, 배가 부른 사자가 네 다리를 쭉 뻗고, 두려움이 없기에, 24시간 만사태평하게 자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양은 어떤가? 양은 바스락 소리만 나도 놀란다. 약한 동물들, 사슴이나 토끼, 노루를 보라. 주변에 이상한 기운만 돌아도, 모든 일을 제치고, 도망부터 간다. 무슨 일이 났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무조건 뛰기 시작한다. 그들은 늘 두려워하고 있다. 평안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심각한 병이 있다.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는 죽음의 치명적인 원인이 된다. 스트레스의 원인이 무엇인가? 불안함이다. 불안하기 때문에 긴장하고, 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렇지만 믿음은 평안을 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성도들도 주님처럼, 평안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연약한 자이지만, 하나님은 강한 분이다. 그분은 내 편이 되신다. 이 사실을 믿으면 평안해 질 수 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내 영혼 평안해!’하며 외칠 수 있다.

우리는 영혼이 잘 된 자들이다. 힘들고 어렵지만 복을 나누어주는 자로 부르셨음 깨닫기 바란다. 부르심의 의미를 알고, 사명을 잘 감당할 때, 우리가 속한 곳이 복을 받게 된다. 우리 공동체를 잘 섬김으로, 우리가 있는 곳마다,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축원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