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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에 붙잡혀 사는 사람 (마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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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붙잡혀 사는 사람 (마 6:33)

어떤 집사님이 희한한 전도지를 들고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도지에는<지옥에 가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지를 주면서"그 뒤를 보십시오."라고만 말합니다. 그런데 그 전도지의 뒤에는 큰 글씨로"아무 것도  없다"라고만 씌어 있었습니다. 이 전도지의 의미는 지옥을 가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간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결단이 없고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오는 사건이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하면 지옥은 저절로 가게 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무관심 속에서 지옥을 향해 걷고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흥미 있는 사실은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도 사람들이 간간히 지옥이란 단어를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명한 기독교 심리학자는"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 어쩌면 내가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무의식과 잠재의식의 공포가 그 영혼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플라톤]은"누가 감옥이 없기를 제일 바라겠는가. 그것은 거기에 가야 할 사람들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지옥이 없기를 제일 바라겠습니까? 지옥에 가야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무관심 하면서도 의식 밑바닥에 남아있는 지옥의 개념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은 이미 믿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지만 왠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것은 내 행위가 부끄럽고 내 삶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라고 하지만 관심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를 장담하지 못할 만큼 잘못된 신앙이라면 얼른 관심부터 바꿔야합니다.

심리학자들이 사람의 심리상태를 점검하는 방법 가운데 일정한 시간의 연설이나 대화 또는 일정한 길이의 문장에서‘나’라는 단어를 얼마나 자주 쓰는가를 조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물론‘나’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심리상태는 건전하지 못하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1940년 미국의 한 언어학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히틀러]는‘나’라는 단어를 53단어에 한 번씩 썼고[뭇솔리니]는 83단어에 한 번씩 썼다고 합니다. 눅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나'라는 말을 6번이나 사용했습니다. 결국 자기중심적인 관심이 자기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나라와 이웃을 위하여 사신 분입니다. 여기에서 기독교인이 가져야할 관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H. 그룸(Thomas H. Groome)]이라고 하는 미국의 교육학자는 세 가지 자유의 유형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자유라는 것이 방임되어질 때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는<합리적 사유의 자유>를 말합니다. 쉬운 말로 생각하는 자유입니다. 가장 중심적이고 가장 핵심적인 자유는 생각의 자유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생각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계속 나를 어지럽히고 뒤따라 다니는 내 과거가 있습니까? 악몽 같고, 억울했던 한이 있고 또 지금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는 그 동안 내 생각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많은 근심과 걱정 속에 매일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실은 걱정처럼 불필요한 게 없습니다. 걱정하고 나면 잠도 못 자고, 몸도 해롭고, 짜증도 나고, 백해무익한 것이 걱정입니다. 자 그래도 걱정 안 하는 사람이 없거든요. 이게 바로 생각의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창조적인 생각을 해야 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좋을 줄도 알지만 안 됩니다. 잊어버려야 될 것은 잊어야 하는 줄 알지만 잊지 못하고 내 생각이 자유롭지를 못합니다. 결국은 생각이 문제예요. 왜 그런지 나는 어디론가 자꾸 이렇게 빠져 들어가고 있고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성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소중한 생각의 근원이 되는 기능, 이성이 자유롭지 못할 때 인간은 참 괴롭습니다.

둘째는<선택의 자유>를 말합니다. 우리는 자주 자유 의지로 선택을 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깨끗한 양심을 따라, 신앙을 따라, 하나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선택하느냐? 아니면 이권을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고 다음 일을 생각하고, 잡스러운 생각이 우리 마음을 붙들고 거기에 따라 결정 하느냐 입니다. 자녀들의 결혼문제가 있습니다. 순수하게 신앙과 그 인격을 보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간혹 보면 이 사람과 사돈 맺으면 장사가 잘되고, 이 사람과 사돈 관계가 되면 출세에 도움이 되고....어떻고저떻고 하는 이 지저분한 생각들 때문에 판단이 흐려져서 선택이 빗나갑니다. 여러분의 선택은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또 한 가지는<행동의지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때 제약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정치적으로, 책임을 생각하고, 의롭지 못한 도덕성...이런 것들 때문에 행동이 깨끗하질 못하고 과감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실상 이런 행동의지의 자유가 제한 받아야 할 때도 있긴 있습니다. 영국여왕이 애용하는 화려한 요트가 바다에 나갔습니다. 선장과 선원들까지도'이건 여왕을 태운 배다. 가장 존경을 받고 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지체 높은 배다.'라는 생각에 의기양양합니다. 그런데 안개가 끼기 시작하고 앞이 캄캄해집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저 앞에서 불빛이 다가옵니다. 그때 선장이 점점 가까워 오는 불빛을 보면서 호령을 했습니다."비켜라. 이건 여왕님이 탄 배다. 건방지게 어딜 가까이 오느냐. 비켜!"그런데도 점점 가까이 와서 부딪칠 지경이 됐습니다. 그때 그 불빛 속에서 이쪽을 향해 누군가 소리 지르는데"야 이 미친놈아, 나는 등대다."그러더랍니다. 누가 비켜가야 되겠습니까? 이게 내가 큰 소리 친다고 될 상황입니까? 우리의 자유라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만 이것은 제한되지 못하면 방종이 됩니다. 내 잘못된 이성, 잘못된 욕심, 잘못된 판단, 여기에다가 무제한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자유란 올바르게 사용 되어질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무제한 주어진다고 무제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데도 반드시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에 관심을 가지느냐는 내 자유의지입니다. 하지만 어디에다가 우선권을 두느냐 하는 것은 제어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그 제한 권을 누구에게 두느냐 하면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그리고 그 말씀에 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매우 귀중한 말씀을 하십니다."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그런데 우리들이 실상 먼저 구하는 것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통틀어서 결론을 얻어 보면 경제 문제입니다.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서로 싸우는 문제들은 결국 돈 문제 때문이라고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좀 더 냉정하게 깊이 생각해보면 경제 문제이전에 양심의 문제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국가가 어렵고 국민들이 가난해지고 대기업이 부도나고 하는 경제위기가 왜 온다고 생각합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하는 표면적인 대답은 정치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잘못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정치를 못하는 겁니까? 그것은 그들의 양심 문제입니다. 양심을 팔아먹고 양심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기술이 없는 게 아닙니다. 몰라서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틀려먹은 양심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은 또 무엇이 문제입니까? 도덕적 문제입니다. 잘하겠다는 마음도 있고, 큰일을 이루어 보겠다는 야심도 있는데 기본적으로 도덕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여기서 빗나가는 겁니다. 자, 그러면 그토록 중요한 도덕성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 사람의 도덕성에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거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의 종교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침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애통해 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 이 나라를 다스린다면 도덕성이 살고 도덕성이 살면 정치가 바로 됩니다. 바른 종교 없는 도덕성은 없습니다. 바른 신앙이 없이 도덕성이 바로 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덕성이라는 것은 수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의 열매여야만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이제 생각해봅니다."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앞에 우리는 얼마나 떳떳한 삶을 사십니까? 한 주간 동안 얼마만큼 기도하십니까? 매 주일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을 최상의 시간으로 구별하여 드리십니까? 예배시간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자세가 올바르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그 시간에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분명히 알고 예배의 자리를 지키십니까? 가장 소중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바른 종교성이 없는데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 그것이 진정한 도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유명한 신학자[폴 틸리히]는<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는 책에서 인간 삶의 궁극적 관심은 바로 종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 관심에 붙잡혀서 사는 것이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현실에 있습니까? 물질에 있습니까? 무상한 이 생활 속에 있습니까? 혹은 순간적 쾌락에 있습니까? 그런 사람을 속물이라고 합니다. 그건 동물과 같은 인간입니다. 언제나 그 다음을 생각할 줄 아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봄에는 여름을 생각합니다. 여름에는 겨울을 생각합니다. 젊어서는 늙었을 때를 생각하지요. 그 다음을 생각하고 좀 더, 좀 더 나아가서 궁극적인 일에 관심을 가집니다. 우리가 살다가 궁극적으로는 가야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의 의, 그 왕권,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하나님이 역사의 주가 되셔서 이 땅을 다스려 가고 있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 그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의에 붙잡힌 사람입니다.

만물에는 원칙이 있게 마련입니다. 원칙이 없는 정치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원칙이 없는 경제가 어디 있으며, 원칙이 없는 사회가 존재 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신앙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칙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오는 그의 의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진리, 그것이 원칙이 될 때 비로소 모든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히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이것을 이루게 될 때"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서"모든 것"을 이루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먹는 것, 입는 것,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가지지 못해 안달하는 그것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망각하며 좇아가는 현실의 문제들, 나아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수 있는 원칙이 무엇입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 의에 붙잡혀 사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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