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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면류관 (살전 2: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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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면류관 (살전 2:17~20)

지난 주일에 벌어진 남대문 방화 사건은 온 국민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누구도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방화를 저지른 사람은 자기의 억울함만 주장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관계 기관 역시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바빴습니다. 그 소중한 유산이 그렇듯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떠들어 댄다고 해도 잃은 것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이젠 기록으로만 남을 뿐이요 다시 복구한다고 해도 옛 선조들의 숨결을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것이기에 더 안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인생이 또한 그런 것 같습니다. 있을 때는 모르다가 잃고 난 다음에야 그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있을 때 잘하라는 노래도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있을 때 잘하라, 할 수 있을 때 잘 하라는 말 귀가 따갑게 듣고 또 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있을 때, 할 수 있는 때 잘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말로는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면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더군다나 인생은 연극이나 영화처럼 다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결국 인생은 일회용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내게 주어진 그 기회를 우리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잘 해 보려고 해도 할 수 없는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일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어려서이기도 하고 내가 너무 나이가 많아서이기도 합니다. 그 일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잘 나서이기도 하고 내 능력이 부족해서이기도 합니다. 또 자기 분수를 벗어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고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욕을 말합니다. 말 그대로 욕심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욕심을 버린다고 해서 꿈마저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은 꿈을 먹으며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것이 분수를 벗어나게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닌 욕심이 되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 참으로 중요합니다. 주님 안에서 내가 이런 저런 사람이 되리라고 하는 꿈을 갖는 것 참으로 좋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어나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며 달음질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우리의 바람대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춤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내가 바라는 대로 다 된다고 해서 항상 마음이 편한 것만도 또 아니라는 것입니다. 잠시는 마음이 편안하고 잠시는 신이 나고 마치 날아갈 것만 같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요 또 다른 욕망이 나를 사로잡게 됩니다. 그것은 내게 있는 그것으로 내가 이룬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한발 더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만만 해도 족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갖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나는 하나를 가졌는데 옆 사람을 보니까 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나도 둘을 가지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노력해서 둘을 갖게 됐습니다. 그럴 때 이제는 만족하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도 그럴 수 있을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들의 길을 가로막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그렇습니다. 축구를 보면 한쪽에서는 골을 넣으려고 하고 한쪽에서는 골을 넣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합니다. 이를 뒤집어 보면 나는 골을 넣어도 상대방은 넣지 못하도록 해야 내가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넣으려고 하면서도 상대방은 넣지 못하도록 온갖 방해를 다합니다. 그걸 좋은 말로 수비라고 합니다만 결국은 방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건 우리 인생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승리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성공하지 못하도록 승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선은 서로 경쟁이 될 때 나도 이기고 너도 이길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한발씩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넘어뜨리고서라도 내가 이겨야만 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내가 못 먹을 바에는 다른 사람도 못 먹게 하겠다고 대드는 사람도 있기에 안타까운 것입니다. 아니 거짓말을 해서라도 상대방을 넘어뜨리고 내가 상대방 위에 우뚝 서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내가 못 가면 상대방도 못 가게 합니다. 나는 못 가지만 너라도 가라고 하는 법이 없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보 취급을 당합니다. 좌우간 이기고 봐야 합니다. 아니 앞서서 잘 가고 있는 사람을 뒤통수를 쳐서 쓰러뜨립니다. 그것뿐입니까? 누가 내 뒤를 바짝 따라온다 싶으면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도록 온갖 방해를 다합니다.

그런데 이런 심보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생겨나는 것일까요? 나는 상대방을 향해서 온갖 싫은 소리를 다해도 좋지만 상대방이 내게 대해서 하는 소리에 대해서는 귀를 막습니다.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나로 인해서 마음 상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내 하고 싶은 말을 다 합니다. 하지만 나는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누가 조금이라도 내게 대해서 싫은 소리를 한다 싶으면 펄펄 뜁니다. 결국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다 내 위주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애당초 있지도 않습니다. 그나마 어쩌다 한번 마지못해 하나를 양보했다 싶으면 그것이 무슨 큰 훈장이라도 되는 양 나도 양보했으니 당신도 양보해야 한다고 하면서 상대방에게는 둘을 다섯을 양보하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게 안 된다 싶으면 그때부터는 심통이 대단합니다. 온갖 방해 공작을 다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상대방에게 흠집을 내려고 합니다.

그건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생각 없이 말을 해도 되지만 상대방이 그러는 것은 눈꼴사나워서 보지 못합니다. 나는 조금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그걸 다 지적하여야 속이 시원하지만 남이 내게 대해서 뭐를 지적이라도 할라치면 펄쩍 뜁니다. 나는 내 하고 싶은 것 다 해도 되지만 상대방은 아닙니다. 어떻게 사람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느냐고 합니다. 그나마 상대방이 나보다 앞서나가는 것은 조금도 두고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저 사람이 나보다 앞서 나갈 수 있느냐고 합니다. 나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합니다. 물론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나보다 앞서 나간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혹간은 소위 말하는 빽이 좋아서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런 빽도 없다고 한숨을 내 쉽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내가 출세했다고 한다면 가까운 사람을 쓰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잘 아는 사람,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쓰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학연을 따지고 지연을 따집니다. 하지만 아무리 학연과 지연을 따져도 그나마 능력이 없다면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니 학연이나 지연을 떠나 그 사람은 이 일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라서 그 사람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빽을 이야기한다면 사실 하나님보다 더 큰 빽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내 빽이 되어 주신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요셉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저를 인정하시니 결국에는 이방 사람이요 한낮 노예로 시작해서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였음에도 이윽고는 한 나라의 총리대신까지 되지를 않았습니까?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악한 마귀가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도록 만들고자 악한 마귀를 이를 악물고 덤벼듭니다. 온갖 방해공작을 다 벌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온갖 심통을 다 부립니다. 하여간 우리가 불평하도록 만들고 서로 시비하도록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앞길에 온통 불평할 수밖에 없도록 온갖 장해물을 펼쳐 놓습니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에 왔을 때 그곳 회당에 들어가 예수를 전할 때 유대인 중에 그 말에 설득되어 바울과 실라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많은 그리스인들과 적잖은 귀부인들도 바울을 따랐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이들을 시기하여 시장에서 불량배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켜 도시를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 결국 바울과 그 일행은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결코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이여, 내가 잠시 여러분과 떨어져 있지만, 나는 항상 여러분을 생각합니다. 너무나 보고 싶고, 또 여러분이 있는 곳으로 가고도 싶습니다. 그래서 나 바울이 몇 번이나 가려고 했지만, 사탄의 방해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난 뒤 베뢰아를 거쳐 아가야 지방의 아테네로 그리고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다시 소아시아 에베소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 후 다시 안디옥을 거쳐 에베소에 이르러 그곳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말씀을 전하다가 잠시 마케도니아 지방으로 건너옵니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 지방에 있기에 바울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들를 수 있었고 바울 역시 몇 번이나 가려고 했노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 길을 방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탄이 바울의 길을 방해했겠습니까? 그것은 바울이 다시 데살로니가로 가서 성도들을 만나게 되면 그로 인해서 데살로니가가 온통 믿는 사람들로 넘쳐나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가는 길에 나타나는 역사를 악한 마귀는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 길을 방해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를 바꿔서 말하면 그만큼 바울의 길에는 놀라운 역사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가 많은 곳에는 시험도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 우리가 좌절할 수밖에 없고 시험될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이 있다면 먼저 감사하십시오. 시험이 있고 불평하고 원망할 일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나타나는 역사가 있기에 사탄이 방해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무 힘도 능력도 역사도 없다면 어찌 사탄이 그 길을 방해하겠습니까? 사탄도 영물이기에 아무 힘도 능력도 역사도 없다면 굳이 건드리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을 왜 힘을 써가며 방해하겠습니까? 방해하지 않아도 아무 탈날 게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속상한 일이 있습니까? 감사하십시오. 근심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감사하십시오. 상처 되는 일이 있습니까? 감사하십시오. 누가 못 마땅하게 느껴집니까? 더욱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을 오히려 더 세워나가도록 하십시오. 누구 때문에 걱정이라고 생각이 됩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을 오히려 더욱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 주고 도와주십시오. 아직은 부족하기에 아직은 문제가 많기에 오히려 그 사람을 더 믿어주고 세워주고 뒤를 밀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요 제자를 세우는 주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마귀는 누구는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안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을 세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바울 사도가 그 대표적인 인물 아니었습니까? 제일 큰 대적자를 오히려 제일 큰 일꾼으로 삼으시는 주님이십니다. 보잘 것 없는 말썽꾸러기 마가를 가장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바꾸셨던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열 두 제자 중 쓸 만한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자기 길로 가버린 가룟 유다 외에는 모두를 정말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바꾸셨던 주님 아니셨습니까? 가장 실망스러운 상황에서 오히려 그들을 찾아가 내 양을 치라고 하셨던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우리를 시험하는 세력에 걸려 넘어지는 자가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외면하지 말고 누구 때문에 문제라고 하지 말고 그러기에 더욱 더 서로를 세워주고 서로를 지켜주고 서로를 믿어주고 함께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세워져 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든든한 빽이 되고 든든한 후원자가 되시는 귀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목회자의 면류관은 바로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데살로니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바울은 속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참 신나게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는데 그만 유대인들이 방해를 했습니다. 그래 쫓겨나다시피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얼마 뒤에 마케도니아 지방으로 다시 갔음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에 들르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그곳에 갈 수도 없었고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가고 싶은데 가지 못하고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처럼 힘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결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랑스러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다시 만나지는 못했지만 들려지는 소식이 너무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기는 어쩔 수 없이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자기에게서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를 알게 되고 믿게 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들을 때 자기의 수고한 일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말씀 안에서 믿음 안에서 든든히 서가는 그래서 주님의 좋은 일꾼이 되어 섬기고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소식을 전해들을 때 바울은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소망이요, 기쁨이요, 면류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 우리는 여러분을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진실로 여러분은 우리의 영광이며, 기쁨입니다.”

그래요 목회자에게 기쁨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성도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루하루가 다르게 믿음 안에서 자라가는 그 모습이 바로 기쁨입니다. 물론 때로는 속상할 때도 있겠고 섭섭할 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건 잠시뿐입니다. 어찌 자녀를 기를 때 속상한 일이 없겠습니까? 그래도 그 자녀들이 하루가 다르게 든든히 자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속상한 일을 다 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걸 힘들다고만 하겠습니까? 내가 왜 이런 자식을 낳아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비록 잠시는 한숨을 쉴 때도 있겠고 눈물을 흘릴 때도 있겠지만 이윽고는 언제 그랬냐 싶게 든든한 모습으로 자라난 자녀들을 보면서 그래 내가 헛고생한 것이 아니었구나 하고 뿌듯한 마음이 들 때가 있지를 않습니까? 그게 바로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즐거움이요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자녀가 하나밖에 없다면 좀 덜 하겠지만 여러 자녀가 있을 때 보면 자녀마다 왜 그렇게 다른지 모릅니다. 또 서로 아옹다옹 다툴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또 보면 그렇게 다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 다정한 모습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이 부모들입니다. 저 녀석들 언제나 철이 들꼬 하다가도 어느 순간 보면 언제 이렇게 자랐냐 싶은 것이 또 부모의 마음입니다.

성도들을 지켜보는 목회자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믿음 안에서 변화돼 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래서 성숙한 신앙인으로 바뀌어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목회자는 감사합니다. 마치 누에가 변하여 번데기가 되고 다시 나방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자라가는 성도들이야말로 바로 목회자의 자랑이요 목회자의 면류관입니다. 저 역시 성도 여러분들을 볼 때마다 여러분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처음 여러분과 함께 새 출발을 할 때에 비해 놀랍도록 믿음 안에서 성숙되어진 그 모습이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물론 완벽한 것은 아니요 여전히 부족함이 있다고 해도 그건 자녀를 보는 부모의 마음처럼 부모의 입장에서 보는 부모의 바람으로 볼 때의 부족함일 뿐입니다. 모두가 다 칭찬하는 분들이라 해도 그 부모가 볼 때는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보일 뿐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그 자녀가 어린아이는 아닌 것입니다. 사실이지 여러분처럼 뜨겁게 서로 사랑하고 열심을 내어 섬기는 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아직도 부족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당연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믿음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스스로 볼 때 부족함이 느껴진다면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함께 수고하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아니다 싶으면 함께 세워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그 사람을 신뢰하고 그 자리에 있도록 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불평 불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더 기회를 주어야 하고 그러기에 더 세워주도록 하여야 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 오기가지도 30년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여러분 눈으로 보기에도 그렇지를 않습니까?

그런데도 여러분이 저를 믿어주고 따라주듯이 그렇게 여러분 스스로도 믿어주고 밀어주고 끌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끌고 갈 수 없는 수레도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서 밀어주고 끌어주면 쉽게 끌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함께 수고하는 그런 모습을 볼 때 목회자는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지금 향남교회 성도들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기에 저는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성숙된 모습으로 자라갈 것으로 믿기에 그런 성도 여러분들이야말로 저의 면류관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 주님 앞에 서는 날 성도 여러분 모두를 자랑스럽게 주님 앞에 소개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함께 힘을 다하여 섬기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날마다 기뻐함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한 배에서 난 자녀들도 서로 마음이 안 맞아 힘들어 할 때가 있는데 우리 모두 자라난 환경이 다르고 배경이 다른데 어찌 모든 것이 다 똑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배를 타고 가는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한 분 예수님을 믿고 섬깁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한 믿음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처럼 합창단처럼 그렇게 함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작품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은 비온 뒤에 비쳐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곱 색깔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일곱 가지 색깔이 서로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색이 순서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순서가 다르다면 결코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지만도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제 자리를 찾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 자리란 바로 지금의 자리입니다.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함께 힘을 합쳐 충성을 다할 때 우리는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곱 색깔 무지개가 될 것입니다. 바늘이 찔러서 아프다고 하지 말고 오히려 바늘로 하여금 터진 것을 꿰매는데 사용되도록 하면 되는 것이요 그렇지 않을 때는 내가 바늘을 꽂아놓는 반짇고리가 되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거리요 면류관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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