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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 (마 8: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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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
본문 / 마 8:5-10

어느 사회학자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가르쳐 3무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관심, 무책임, 무감동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극도의 이기적이고 냉소적인 3무 시대의 사회 현상을 시사주간지 타임은 '미 제너레이션(Me Generation)', 즉 '나 세대'라고 이름 붙인 바 있습니다. 자신의 일 빼놓고 관심가질 일도 없고, 책임질 일도 없고, 그러니 당연히 감동을 끼칠 일이나 감동 받을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숭례문 방화사건만 모아도 이 3무의 시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토지 보상 문제로 호소하던 한 노인의 호소를 그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습니다. 숭례문 방화 사건의 피의자 채씨는 기자들이 묻는 질문에 토지 보상 문제로 자신의 억울한 소리를 그 누구도 귀담아 들어주지 않아서 숭례문을 방화했다고 했습니다.
이해관계를 떠나서 어떤 관청에서나 어느 관련 기관에서 성의 있는 태도로 이 노인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에 격분한 노인은 정말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일을 주저하지 않고 실행하여 600여 년 동안 우리 민족의 자존심으로 국민들의 가슴에 남아있는 국보 1호 숭례문에 불을 질러 전소시킴으로서 온 국민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무관심과 그에 따른 무책한 행동은 결국 자신 뿐 아니라 모든 이들을 불행하게하고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작은 관심과 책임 있는 행동들은 많은 감동을 만들어냅니다. 감동할 일이 많을수록 행복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주님을 감동하게 한 한 사람이 소개되어있습니다. 그는 로마사람으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군인이었습니다. 상하계급의 규율이 엄격한 군인 출신인 그가 예수님의 마음을 감탄하게 하였습니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찾아보지 못했다고 하신 것은 백부장에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예수님이 감동 받으셨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에 나타난 백부장의 모습은 인간됨이 아주 따듯한 마음의 소유자 인 것 같습니다. 자기 수하의 병든 병사 하나 때문에 백부장이 예수님께로 와서 자기 병든 하인의 병을 고쳐 주기를 탄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마음이 따듯하고 온유하고 너그러운 인격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합니다. 자기 수하에 있는 종이라도 권위로 복종시키려 하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우하면서 일을 시킵니다. 사람을 이런 사람들은 존경하고 따릅니다. 백부장은 비록 유대인도 아니고 당신 유대의 지배자인 로마의 권력의 핵심인 군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식민지역의 무명 목수 출신 예수님을 선지자로 또는 신적인 권위를 가진 인물로 인정했고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인의 병든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왔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신격적으로 인정하고 깊이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직접가서 고쳐 주겠다고 했을 때에 “말씀만 하셔도 하인의 병이 나을 줄 안다”고 한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어 의심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인간 됨됨에도 감동하셨지만 결국 그의 믿음에 감동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백부장의 믿음에 감탄하시고 감동하셨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감동시켜드린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감동시킨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하나님이 사람들에 대하여 감동하시는 것에 대한 네 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1. 믿음에 감동하신다.

본문으로 읽은 백부장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이 믿음에 감동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본적이 없다” 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감동하십니다.
마가복음 2:4-5절에 보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메고 와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 사람들이 많아 들어갈수없자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뜯고 침대를 방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2:4-5)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에 감동하시고 반응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롬 4:5절에 보면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창 15:6절에서도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이 감동적으로 반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게 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감동 시킵니다.

대안 학교인 성지 고등학교에 전과 13범으로 조폭 두목인 학생이 있었습니다. 소주병을 바지 뒤춤에 넣어 오고 러닝셔츠차림으로 등교하는 무시무시한 학생으로 선생님들도 모두 포기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학교 김선태 교장 선생님은 그 학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학교 행사가 있을 때면 그 학생에게 책임을 맡겨 진행하게 했고 개교 기념일엔 표창장을 주었습니다.

표창장의 내용은 “앞으로 이 학생은 선행을 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 상을 주어 표창함"이었습니다.
종이로만 해서 주면 찢어 버릴지 몰라 판넬까지 해서 주었습니다. 집에 가지고 가니 부모들이 감격해서 목이 메었고 걸어두니 집에 오는 손님들이 보면서 놀라움을 표시했습니다. 결국 그 학생은 자격증을 세 개나 따고 전문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던 불량 학생을 교장 선생님은 믿어주고 일도 맡기도 책임도 맡겼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자기를 믿어주는 선생님의 그 믿음에 감동하여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의지하고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감동하실 때 까지 하나님을 믿고 그분만 의지합시다.

2. 희생에 감동하십니다.

우리는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을 보면 감동을 받습니다. 미국의 “카네기 기금 위원회” 에서 미국을 감동시킨「작은 영웅들」18명을 선정했는데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지하철 권총 강도에 맞서 싸우다 총상을 입은 청년, 불타는 자동차의 뒷 좌석에 남겨진 11개월 된 아기를 구하기 위해 불길 속으로 뛰어든 30대 여성, 급류에 휩쓸린 남동생을 구해내고 자신은 익사한 10세난 소녀, 성난 황소 네 마리에 둘러싸인 여성을 구출해낸 20대 청년 등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 건 사람들이미국을 감동시킨 사람들이었습니다.
희생하는 것만큼 큰 감동을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큰 것, 좋은 것, 많은 것만 찾는 시대에 손해 보는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다 풍성한 대우를 받는 회사를 뒤로하고 자신을 필요로 한 회사를 찾아가는 것은 어쩌면 시대에 뒤떨어진 행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희생의 참 의미를 보여주신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주님 때문에 손해보고, 자존심을 상하며 욕먹고, 고통 받는 것 아름다운 삶입니다.
세상은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희생으로 평가합니다. 너희가 나를 위해 죽을 수 있느냐 입니다. 너희가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너희가 얼마나 나를 위해 줄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너희가 능력이 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그것을 나를 위해 사용하는냐가 문제입니다.

최근 작은 교회를 섬기다가 사정상 우리 교회로 등록하신 분이 우리 교회는 큰 교회여서 안락하고 아무런 할 일이 없는 줄 알았는데 와서 보니 할 일도 많고 모든 교인들이 작은 교회보다 더 열심히 헌신하는 모습에 놀랐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우리 교회에 안락한 신앙생활을 위해 오셨다면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혹시 우리교회가 할 일이 없고 너무 안락하고 편안한 신앙생활의 분위기를 조장한다고 생각되신다면 기꺼이 작은 교회를 찾아가서 주님을 위해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왜냐면 주님은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에게 감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위해 헌신하면 사람이 감동하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면 주님이 감동하십니다.

마 25:21절에 보면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충성이란 결국 자기 희생입니다. 작은 일 즉 가치도 없고 이익도 없다고 생각되는 일 남들이 하기 싫어서 팽개쳐 버린 일 그런 것들을 내가 한다는 것은 희생입니다. 즉 헌신입니다. 어떤 고난이나 힘들고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자기를 헌신하는 것 그것이 충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감동하시는 것입니다. 희생 없이는 사람도 주님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3. 눈물에 감동하십니다.

영국 여왕이 나라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게 되었는데 상을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 중에는 부상자들도 많았습니다. 그중 전쟁에서 팔과 다리를 모두 잃고 다른 사람에게 들려서 나온 용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훈장을 달아주던 여왕이 팔과 다리를 모두 잃은 그 군인 앞에 섰습니다. 훈장을 들고 그를 쳐다보던 여왕이 갑자기 뒤로 돌아서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팔다리가 없는 용사가 눈물을 흘리며 "조국과 여왕 페하를 위해서라면 다시 한번 이 몸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용사를 감동시킨 것은 훈장이 아니라 여왕의 눈물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성도의 눈물에 감동하시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것이 죄를 회개하는 통회의 눈물이건 좌절과 낙심과 절망에 쌓인 슬픔의 눈물이건 질병의 고통에서 부르짖는 고통의 눈물이든지, 사람들로 인해 받은 상처로 흘리는 아픔이 눈물이든지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때 하나님은 귀중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왕하 20:2-3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그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심히 통곡하며 기도하였습니다.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셔서 병을 났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주시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왕하20:5-6)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시편 기자는 자신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시 56:8절을 읽어봅시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우리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는 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에 반응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이 집에서 쫓겨나 광야에서 죽게 되었을 때 목 놓아 울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들으셨다고 창 21:16-18절에 기록하였습니다.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자식이 없어 애통해 하던 한나의 애통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눈물이 메마른 성도는 주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특히 은혜 때문에 흘리는 눈물, 주님의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에 하나님은 크게 감동하십니다. 즉 감동에 감동하시는 것입니다.

4. 감동에 감동하십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받은 은헤에 감격하고 감동할 때 하나님도 그 성도의 모습을 보면서 감동하시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할 때 부모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흐믓하고 기쁘게 여기는 것 이것이 감동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전해준 작은 선물에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기쁘고 행복하듯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축복에 대하여 감격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하시는 것입니다.

대동 강변에서 죽었던 토마스 선교사가 왜 그 위험한 조선 땅에 왔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느끼며 그것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그 모습에 하나님은 감동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역사상 하나님을 감동시켰던 사람들은 모두 구원의 은총에 감격하고 십자가의 사랑에 감동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은혜에 감동한 그들에게 감동하셔서 놀랍고 위대한 일들을 그들을 통해서 하게하셨던 것입니다.

받은 은혜에 대한 감동을 잃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하고 아름답게하고 건강하게하며 훌륭하게 하는 것은 뜨거운 감동을 받아 조용히 흘리는 눈물입니다. 그 눈물로 우는 울음이 우리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일중에 하나입니다.
감동이 메말라 간다는 것은 우리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그와 같은 감동이 메마르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늙은이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나이들어서도 젊고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삶의 감동이 사라지지 않기 위하여 힘쓰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냉철한 이성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풍성한 감성입니다.
이 풍성한 감성을 잃어 버리지 않도록 늘 조심하여야만 합니다.
자연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동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중에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이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 찬송은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동을 한 사람이 지은 찬송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그렇게 무심히 보아 넘기는 자연을 보고 참 아름답다고 감동할 줄 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엔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도 많이 있지만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켜서 세상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지 본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마음의 눈을 열어 그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의 삶은 경이로움와 놀라움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며 아름다움이 주는 깨끗한 감동을 느끼며 아름답게, 건강하게,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감동하십니다.
우리의 희생에 감동하십니다.
그리고 성도의 눈물에 감동하십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할 때 감동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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