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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외모냐? 중심이냐? (약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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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냐? 중심이냐? (약 2:1~13)

어른들의 습관

요즈음 대학입학시험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와 초등학교까지 논술시험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저처럼 사지선다형 객관식 문제에만 익숙한 세대는 이 논술시험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자기만의 생각을 정리해 글로 쓴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시간에 여러분의 논술수준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시험해 볼까요? 초등학교(!) 논술시험에 나온 문제입니다. 맞춰보세요. 문제는 이것입니다. "다음의 두 글에 나온 공통점이 무엇인지 기술해 보라."

첫 번째 글은 생 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나온 내용입니다. "어린 왕자가 살던 별인 소혹성 B612는 딱 한번, 1909년에 터키 천문학자에 의해 망원경에 잡힌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는 국제 천문학회에서 자신의 발견을 훌륭히 증명해 보였었다. 그러나 그가 입은 낡은 아랍 식 옷 때문에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었다. 어른들이란 모두 이런 식이다. 터키의 한 독재자가 국민들에게 서양식 옷을 입지 않으면 사형에 처한다고 강요한 후 그 천문학자는 1920년 이번에는 아주 멋있는 양복을 입고 다시 증명을 했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어주기 시작했다."

두 번째 글은 이것입니다. "한 검소한 학자가 있었다. 어느 날 이 학자는 장관이 여는 파티에 초대를 받아 평소 입던 옷 가운데 깨끗하고 검소한 옷을 입고 파티 장에 갔다. 그런데 문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옷이 허름하다는 이유로 막았다. 학자는 집으로 가서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파티 장으로 갔다. 문지기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파티 장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악수를 청하고 학자를 좋은 자리에 앉히고 좋은 음식도 내주었다. 그때 학자가 옷을 벗어 음식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옷아, 이것들은 네가 먹어야겠구나. 나를 보고 주는 음식이 아니라 널 보고 주는 음식이니 말이다."

어떻습니까? 두 글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집에 가서 원고지 5매 이내로 정리해보십시오. 잘 안 되면 여러분은 초등학교 졸업하기도 어려울지 모릅니다. 사실 앞서 소개한 <어린 왕자>에는 터키 천문학자의 옷 이야기뿐 아니라 이런 내용도 나옵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할 때면 어른들은 "그 애 목소리는 어떻지? 그 애가 좋아하는 놀이는 무엇이지? 나비를 수집하는지?"라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나이가 몇이지? 형제는 몇이고? 체중은 얼마지? 아버지 수입은 얼마야?"하고 그들은 묻는다. 그제야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턱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분홍빛의 벽돌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들은 "아, 참 좋은 집이구나!"하고 소리친다.

그러고 보면 저도 어렸을 때 부모님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친구를 하나 새로 사귀었다고 하면 부모님들은 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 애 집이 어디니? 아버지는 뭘 하는 분이라니? 그 애 공부 잘 하냐? 반에서 몇 등쯤 하니?" 저는 이런 부모님의 질문이 싫었습니다. "왜 늘 어른들은 이런 것만 물어본담?" 그런데 놀랍게도 제가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어서도 똑같은 질문을 저희 아이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새 학년이 되어 친구를 사귀었다고 하면 저는 제일 먼저 "걔 어디 사니? 교회는 다니니? 아버지는 뭐 하는 분이니? 공부는 잘 하니? 기왕이면 좀 공부 잘 하는 아이하고 친구 해라" 하고 말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아마 <어린 왕자>에 나온 것처럼 제가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 세상의 때가 묻으면서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사람을 볼 때 늘 그 사람의 재산이나 지위나 집이나 차로 판단하는 습관이 생긴 모양입니다. 참 슬픈 일이지요.


간디 이야기

인도 독립의 아버지인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싫어한다." 깜짝 놀랄만한 말입니다. 간디는 힌두교 인이었지만 성경을 정말 많이 읽고 특히 마태복음에 나온 산상수훈을 사랑하여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 대라는 산상수훈의 정신을 그의 비폭력 저항운동에 그대로 응용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크리스천이 되지 않고 한평생 힌두교 신자로 산 데는 까닭이 있다고 합니다. 1919년 간디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변호사를 할 때입니다. 한 번은 일등석 차표를 사서 기차를 탔는데 승무원은 백인손님들이 유색인종이 함께 일등석에 타는 것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간디에게 화물칸으로 옮기라고 강요했고, 그것을 거부하자 열차에서 강제로 쫓겨나 역에서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이때 간디는 소위 예수를 믿는다는 남아공의 백인들이 이처럼 잔인한 인종차별을 하는 것을 보며 절대로 그들이 믿는 예수를 안 믿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열차 승무원의 편견과 백인들의 인종차별은 어쩌면 예수를 믿을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를 이 인도 변호사를 영원히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간디는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싫어한다."는 말을 남기고 영원히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처럼 예수님의 앞길을 막는 것은, 복음 전도를 막는 것은 마귀도 아니고 불신자들도 아니고 바로 교회 자신이요 기독교인 자신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고보 사도는 교회에서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읽다보면 당시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 싶어 놀랍기도 합니다. 2절을 볼까요?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아마 야고보 사도가 당시 교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정말 보았다면 야고보 사도는 몹시 분노했을 것입니다.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입니다. 야고보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마가복음 3:21에 보면 예수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붙들러 왔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마 이 때 예수님의 친동생인 야고보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형님이 완전히 미쳤다. 그냥 내버려두면 집안 망신 다 시키겠다."고 생각해서 강제로라도 붙들어 가야겠다고, 요즈음 같으면 정신병원에라도 강제 입원시켜야겠다고 했는지 모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예수님이 하는 행동을 겉으로만 봐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남루한 옷차림에 샌들 하나 신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이상한 말을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뭐니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고 하며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다고 설치고 다닙니다. 자기 혼자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랍시고 열두 명을 불러 우르르 몰려다니며 집단으로 미친 짓을 하고, 게다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로마 당국의 비위까지 거스르고 다니니 도저히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겉모습만 봐서는 예수님은 정말 미친 사람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서야 야고보는 형인 예수님이 미친 것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경험을 가진 야고보가 사람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잘못된 일인지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절대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마라. 사람의 외모나 옷차림, 그 사람의 재산이나 지위, 그 사람의 집이나 차로 사람을 판단하고 교회 안에서 차별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잘못된 일이고 그런 일을 하는 교회나 성도는 예수님의 앞길을 막고 복음을 막는 사람이다"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 성도들, 이미 교회를 다니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함께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과 우리 교회에 온 새신자들을 무엇으로 판단하고 평가합니까? 혹시 다른 성도들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그의 재산과 지위와 능력을 보고 판단하지는 않습니까? 새로 교회 나오는 사람을 보며 그의 직업과 외모와 겉모습을 기준으로 "우리 교회에도 저런 괜찮은 사람이 나오네" 싶어 안도하거나, 아니면 "야, 저런 사람이 무슨 헌금을 하겠나. 괜히 교회에서 구제할 사람만 하나 더 늘어난 것 아니야" 하며 실망하지는 않습니까? 혹시 우리가 무심코 판단하는 그 기준 때문에, 우리는 절대 차별 같은 것은 안 한다고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내 말과 행동 속에 깃들어 있는 차별 때문에 또 한 사람의 간디 같은 사람을, "내 평생 교회는 절대 안 다닌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들지도 모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앞길을 막는 것은, 복음 전도를 막는 것은 마귀도 아니고 불신자들도 아니고 바로 교회 자신이요 기독교인 자신들이기 때문입니다.


차별이란 무엇인가?

이 말을 듣고 많은 분들이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차별 같은 것 안 한다. 나는 한 번도 교회에서 겉모습 가지고 남을 차별해 본 적이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저는 일찍이 이 차별을 경험해 본 사람입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일찍 교회의 문을 두르려본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같은 반 친구 중에 교회 부목사님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저에게 교회 한 번 나와 보라고 했지요. 전도를 한 것입니다. 저는 그 친구 말을 듣고 주일날 그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처음 가본 사람은 누구나 느끼는 일이지만 예배당 들어가서 어디 앉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온통 모르는 사람들 투성이에 모두 낮 설고 어색한 것뿐입니다. 이럴 때 누구라도 다가와서 친절하게 "여기 앉으세요. 성경은 여기 있고 찬송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안내해 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 때는 왜 그랬는지 그 교회 유년부에는 아무도 저를 이렇게 안내해 주는 친절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예배시간에 수시로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데 교회 처음 가본 저로서는 언제 일어나야 할지, 앉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설상가상으로 저희들끼리 노래 부르고 눈을 감고 무언가 중얼중얼 외우기 시작합니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찬송이고 주기도문인지 알았지만 정말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 가르쳐줍니다. 저를 교회 오라고 한 그 친구는 저만 저 앞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데(나중에서야 그것이 성가대인줄 알았습니다) 제가 왔는지 안 왔는지도 모르고 혼자 신나게 노래 부르니 또 얼마나 원망스러운지요. 그래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내가 이제 교회 가나 봐라. 죽을 때까지 안 간다." 딱 한 주 교회 나가보고 결심한 것입니다. 다행히도 제가 나중에 예수 믿을 기회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또 한 명의 간디가 나왔을지 모릅니다.

이게 차별입니다. 물론 그 때 제 옷차림을 보고, 제 재산이나 지위를 보고 차별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온 저를 방관한 채 저희들끼리 예배 잘 드린 것 자체가 차별입니다. 오늘 야고보서가 꼭 옷차림이나 겉모습 가지고 차별한 것만 말씀한 것일까요? 우리는 오래 다녔고 당신은 새로 왔다고 구별하는 것도 차별입니다. 당연히 관심 가지고 도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도 차별입니다. 우리 교회 새로 왔고, 우리 구역, 전도회에 새로 왔는데 "자기가 알아서 잘 나오겠지" 하며 무관심하다면 그것도 차별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얼마나 마음과 시간을 투자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은 마음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꼭 밖에 나가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지 않았더라도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무관심과 차별로 인해 한 사람이 영원히 교회로부터 멀어진다면, 또 한 사람의 간디가 나온다면 나는, 우리 교회는 복음을 영원히 막는 죄를 범하는 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의도적으로 차별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몇 년 전의 일입니다. 저희 교회에 새 가족이 몇 분 왔는데 그 중에 두 젊은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평범한 직장인이고 또 한 사람은 포항공대에 다니는 여학생이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제 방에서 환영을 하는데 아마 제가 이런 저런 신상을 묻는 가운데 직장인인 아가씨보다 공대 다니는 여학생에게 더 질문도 많이 하고 말도 많이 한 모양입니다. 왜 그럴 수 있잖아요? 어떻게 1분 1초까지 시간을 재서 똑같이 말하겠습니까? 하지만 솔직히 그 때 제 마음 속에 포항공대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청년부가 십여 명 밖에 안 될 때인지라 저는 가까이 있는 포항공대가 황금어장이라고 생각해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러니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그 공대생에게 더 친절하게 말도 많이 한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그 직장인 아가씨가 다음 주부터 교회를 안 나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가 차별을 했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좀 황당한 생각이 들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말 제 무의식 속에 두 사람의 비중을 다르게 보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작은 사건이 저를 많이 생각하게 했습니다. 목회자가 사람들을 더욱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게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차별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하지만 상대방이 그렇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내 마음 속에 들어있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표현된 것이기에 내 책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말이나 행동뿐 아니라 내 마음속 생각까지도, 무의식조차도 결코 차별하는 마음이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5절에 이런 말을 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매너가 좋고 나쁘고의 차원이 아니라, 그 교회의 문턱이 높으냐 낮으냐의 차원이 아니라 죄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의 말 한 마디, 우리의 행동과 자세 하나가 한 사람의 영혼을 영원히 구원으로 인도하느냐 영원히 불신으로 인도하느냐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가 교회의 문턱을 좀 더 낮추고, 우리 성도들의 마음이 더 낮아져서 더 섬기고, 품어주고, 그 사람이 높든지 낮든지, 가난하든지 부유하든지, 힘이 있든지 없든지, 헌금을 좀 하게 생겼든지 그렇지 않든지 상관없이 품을 수 있다면 거기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교회 다니게 된 것, 효자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큰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신 이유가 우월의식이나 잘못된 선민의식을 가지라는 뜻이 아니라 먼저 택했으니 더 섬기고 다른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복의 근원'이 되라는 것이었듯, 우리도 먼저 예수 믿고 먼저 효자교회 다닌 것이 더 섬기고 낮아지고 품어주라는 뜻인 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지금 예수님이 한국에 오신다면 어떤 교회에 출석하시겠습니까? 목사요 작가인 김진국이라는 분이 <'예수님은 못 말려>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와서 큰 도시의 대형교회를 들리기도 하고, 한적한 시골의 작은 교회에도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일행은 한 결 같이 쫓겨나고 맙니다. 대형교회에서는 교회등록을 재촉하는데 새 가족 등록카드에 본명인 '예수,' '베드로'라고 썼다가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쫓겨났고, 시골교회에서는 그들의 이상한 복장 까닭에 간첩으로 오인되어 쫓겨난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오늘 우리 교회에 왔다가 남루한 복장을 보고 노숙자인가? 헌금도 못할 사람, 도리어 우리가 구제해야 할 사람 취급을 받아 쫓겨날 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힘들고 지치고 상처받고 차별 받던 사람들이 마지막에 위로를 얻고 상처를 치유 받으려고 찾는 곳이 교회인데 그 교회에서조차 상처를 주고 차별을 받는다면 영원히 교회 안 나올 것 아닙니까?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앞으로 새 성전을 멋지게 지어야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널찍한 대예배실 뿐 아니라 교육부와 찬양대와 각 부서가 사용할 크고 작은 방들이 들어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에게 개방하여 각종 문화교실을 열 장소도 만들고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분위기 좋은 카페도 만들려고 합니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참된 전도는, 사람들의 마음을 참으로 열 수 있는 방법은 이런 겉으로 드러나는 시설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설 속에 들어설 우리의 마음과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3:3에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아무쪼록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다른 사람의 겉모습이 아닌 중심을 보기 바라고, 내 겉모습을 금과 은으로 단장하고 꾸미기보다 내 중심을, 내 마음과 자세를 단장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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