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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두려움 (사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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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두려움 (사 6:1-8)

사람들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걱정하고 두려워합니다. 암에 걸릴까, 사고가 날까, 사업 망할까, 도둑 들지 않을까, 실패 안할까, 누가 내 욕하지 않을까, 걱정거리가 없어도 이유 없는 두려움이 안개처럼 일어납니다. 맑은 하늘처럼 평안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명령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문제의 시작이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 해결책은 하나뿐입니다. 두려워할 것만 두려워하면 됩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평안합니다. 잘 됩니다. 무엇이건 두렵다면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두려워할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은 다른 두려움처럼 나를 병들게 하지 않고 잘 되게 합니다. 어떤 두려움일까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다른 두려움은 다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면 다른 것들은 우리의 지배아래 들어옵니다. 삶이 질서를 잡습니다. 하나님 경외함이 축복의 시작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나요?

1. 하나님 두려워하기

이사야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러했습니다. 선택된 직종입니다. 젊어서부터 성전에서 지냈습니다. 너무도 익숙한 일터라서 하나도 새로울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는 모든 게 달랐습니다. 전과 같이 아침에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문안에 들어선 그는 압도되어 넘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계셨습니다. 성전 안은 지붕이 천장을 넘어서서 하늘과 이어져 한없이 높아졌습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은 성전을 가득 채웠습니다. 셀 수 없는 수의 여섯 날개의 천사들이 날고 있습니다.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렸습니다. 너무도 신비스러운 화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감격 속에 찬양합니다.

이사야는 전능의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그 찬란한 영광아래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너무도 죄 많은 존재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건성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만 원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이웃 아무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괴롭혔습니다. 영광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웠습니다.

이사야는 두려움으로 외칩니다. “망했구나. 하나님 만났으니 이제는 다 끝났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면 정말로 비참합니다. 파출소장 한 분이 술 취해 유치장에 들어온 사람들 얼굴을 사진 찍어 주었답니다. 너무도 역겨운 모습입니다. 밝은 날 나가며 보고 놀랍니다. “이게 정말 나란 말인가?” 그보다 더 나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습니다.

이사야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보면서 고통 합니다. 그때 천사 하나가 그에게 날아왔습니다. 단에서 벌겋게 단 숯을 집게로 집어서 이사야의 입에 댑니다. 사람은 누구나 입으로 가장 범죄를 많이 합니다. 뒤에서 마구 남을 비난하고 욕합니다. 뜨겁습니다. 연기가 납니다. 그러나 타는 건 영혼입니다. 하나님만이 사람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 후 이사야는 다시 그런 체험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누구도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다. 믿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이사야가 한 경험은 영적 현실입니다. 안 보일 뿐이지 실제로 이 자리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믿고 자기 것으로 삼는 사람은 모두 이사야입니다. 성경 내용은 그대로 나의 체험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어떻게 변했나요? 그 놀라운 광경을 마음에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 영광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만나신다는 거룩한 두려움은 점점 더 깊어갑니다. 세상의 두려움은 병 주고 문제를 줍니다. 그러나 거룩한 두려움은 잘 되게 합니다. 모든 것들을 지배할 능력이 일어납니다. 높은 사람도 악한 영들도 그 무엇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내 자신도 사람 두려워한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말합니다. “사람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이다. 불경이다. 하나님만 두려워하라.” 금세 사람을 향한 두려움이 가시지 않아도 벌써 훨씬 덜 두렵게 됩니다. 그리고 점점 더 두려움이 가십니다. 동시에 영적 권세가 나를 강하게 만듭니다.


2. 하나님 마음 합하기

이사야는 하나님을 관심의 중심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자기 마음처럼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누구나 하나님의 마음을 가집니다.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은 간절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루에도 수천수만 명이 불구덩이에 떨어진다. 거기서 영원히 망한다. 이들을 위해서 누가 갈까? 누가 이 일을 하겠는가?”

이사야는 하나님처럼 마음의 아픔을 느낍니다. 누구를 사랑하면 그 마음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잘 압니다. 그래서 항상 거룩한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도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간절한 이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겠는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하나님은 강제로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절대로 강제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강제로 목사나 선교사 만들려고 사업 망하게 하고 병들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는 일마다 막아 손들고 나와 주의 일만 하게 한다고 믿습니다. 일이 안 되는 것은 자기 잘못입니다. 부정적 믿음이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심술부리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소원이 마음에서 울려납니다. 이사야도 그러했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입니다. 거룩한 부담으로 눌립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린 사람들은 신비한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일할 몸이 필요합니다. 내가 나서면 어떤 일이 생기나요? 하나님은 나를 통해 하나님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용기와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고 상황도 나를 위해 만드십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 놀라운 일을 하시고 내가 영광을 받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나를 성장하게 만들고 그러한 나에게 상을 주어 나만 유익하게 하십니다.

1885년 부활절에 첫 번 선교사로 제물포에 내리신 언더우드 목사님은 당시 우리 상황에 절망합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 왜 묶여 있는지도 모릅니다. 고통인줄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하고 화부터 냅니다.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은 황무지에 서서 우리가 서양귀신이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가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습니다. 예배당도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런 분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잘 될 수 있었을까요? 거룩한 두려움은 거룩한 부담을 줍니다. 신자는 영혼구원의 뜨거운 마음이 일어날 때 가장 하나님의 마음과 교통합니다. 거룩한 부담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두려움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모든 일들은 내게 두려움으로 부담으로 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세요.


3. 하나님 능력 의지하기

제일 중요한 단계에 왔습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기, 하나님의 마음 느끼고 거룩한 부담 갖기, 그리고는 하나님 의지해 하나님 힘으로 하나님 돕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도움이 필요하실까요? 그런데도 나를 하나님 일에 참여시킵니다. 99%는 하나님이 하시고 마지막 깃발을 내가 꽂게 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엄청나게 성장하고 복을 받습니다.

능력은 순간순간 하나님에게서 받습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오해합니다. 도 닦는 것처럼 힘들게 하면 대가가 온다고 믿습니다. 많이 오래 고통스럽게 합니다. 어떤 이는 산에서 어떤 이는 강대상에 이불 갖다놓고 밤을 새웁니다. 금식하고 잠 안 자고 고행하면서 합니다.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대가를 받으려 한다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기도의 첫째 원리입니다. 우리에게는 선이 없습니다. 생명도 능력도 없습니다. 당연히 복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악합니다. 약하고 무능합니다. 우리 것은 아무 것도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의지해서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그러면 다 됩니다. 금식도 철야도 산기도도 모두 훈련입니다.

둘째 원리입니다. 하나님께만 좋은 게 다 있습니다. 생명도 능력도 해결도 거기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벌건 숯보다도 더 확실하게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다. 예수 이름은 모든 것을 다 받아내게 합니다. 예수 의지할 때 하나님은 감동하시고 사랑하시며 성령과 함께 모든 복을 다 주십니다. 그러나 간구한 것만을 주로 주시기에 늘 간구해야합니다.

셋째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많이 해서는 안 됩니다. 쉬지 않고 해야 합니다. 기도가 없어도 되는 시간은 없습니다. 우주공간에 버려집니다. 기도는 호흡이요 생명줄입니다. 우리가 자는 동안은 예수께서 기도하십니다. 금식 철야 산기도는 우리의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예수의 이름 의지하고 할 때만 하나님은 그것도 좋은 것으로 여겨주십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 아픔을 자기 것으로 삼는 사람은 거룩한 감정을 항상 가지고 삽니다. 자신의 약함을 알기에 늘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항상 부족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은 그 부족함을 덮고도 남습니다. 그러기에 용기를 가지고 기도를 쉬지 않으려고 합니다. 거룩한 두려움 거룩한 부담 자체가 기도입니다.

하나님 두렵지요?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그 감정이 크고 분명할수록 잘 됩니다. 영혼구원,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거룩한 부담입니다. 그러나 믿으세요. 전능의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언더우드목사처럼 하세요. 하나님이 다 해주시고 존경과 사랑 받게 해주십니다. 기도하며 목표 세우세요. 목표가 클수록 믿음도 커집니다. 내가 이사야요 선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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