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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회자를 위한 기도 (행 1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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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를 위한 기도 (행 12:1-12)
   
    목회자가 교인들을 사랑하지만 교인들도 목회자를 사랑해야 됩니다. 또 목회자가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지만 교인들도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교회가 성도들을 사랑하고 섬기지만 성도들도 교회를 아끼고 사랑해야 됩니다.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노아의 식구들이 한 방주를 탄 것처럼. 성도들 중 어느 누구도 손님이라거나 구경꾼이 아니고 다 정식 멤버이고 천국백성이고 하나님의 팀의 플레이어들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언제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손님처럼 생각하고 내가 편승해서 잠시 남의 차를 타고 간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언제 우리가 하나님의 정식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고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고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니고, 남의 교회가 아니고, 남의 사명이 아니고 내게 주신 사명이요 내 교회요 내가 이 일에 부름 받았다는 것을 믿겠습니까? 이것을 깨닫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배운 것뿐만 아니라 그때부터 예수님의 사역 팀이 되어서 예수님을 돕고 예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자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제자는 그냥 일방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같은 배를 타고 같은 방향으로 가고 그리고 같은 일을 하고 그리고 이후에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예수님의 사역을 이 땅에서 지속하고 예수님의 교회를 세울 사명을 받은 사람들인데 오늘날도 예수님의 제자는 같은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교회에 와서 내게 필요한 것을 배우고 필요한 말씀을 듣고 내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받고 그리고 나는 간다, 이런 소비자의 멘탈리티를 갖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세워져 있고 내가 그 혜택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최초의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고 말씀하셨고 ‘하나님 나라는 여기에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지만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성 어거스틴이 ‘신의 도성 - the City of God’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 나라는 세워졌다가 무너지지만 그런 모든 와중에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도성이 세워진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성 어거스틴은 눈에 보이는 로마제국이 몰락하는 와중에 하나님의 도성이 세워지는 것을 믿음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한결같은 믿음으로 이 모든 수고를 하고 봉사를 한 것처럼 우리도 이 시대에 믿음의 바통을 이어받아서 똑같은 복음이요, 똑같은 사명이요, 똑같은 참음이요, 똑같은 인내요, 똑같은 십자가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고 해서 천국의 사명이 더 쉬워진 것도 아니고 우리의 임무의 양이 더 줄어든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가 많으냐 적으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으냐 적으냐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이 한 명이었을 때나 일곱 명이었을 때나 그 사명의 중요성과 어려움과 참음과 인내와 희생의 필요성은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늘 유념해야 됩니다.

  목회자들이 범하는 실수 중의 하나는 처음에 목회자로 헌신했을 때는 그야말로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겠습니다’라고 헌신하는데 그의 실수는 그 한 번의 헌신으로 족하고 그 다음에는 이제부터는 영광을 누리는 것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지요. 처음에 헌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으로 헌신하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부인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에요. 처음 예수 믿을 때 자기를 낮추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때의 감격이 있고 진실함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한 번 그런 경험을 했다고 된 것이 아니고 그의 평생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어야 되고 순종하는 것과 또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믿음을 실천해야 되는 사명은 늘 한결같은 것이지 내가 한번 크게 수고했다고, 공로를 세웠다고 그 다음부터는 영광을 받고 그 다음부터는 편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군인이 한번 훈련소를 다녀오고 그리고 사병의 시절이 끝나서 장교가 된다든가 임관을 하게 되어 별을 단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때부터는 누리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적어도 신앙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훈련이라는 것은 지속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훈련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실 때는 언제든지 우리가 다시 훈련소에 들어가는 마음으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구보를 하고 불편하더라도 그것이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의미한 호칭이 돼 버리고 맙니다.

  주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든지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그저 우리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고 그 말 그대로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My Lord- 내 주님. 주님은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때로는 주님처럼 행하십니다. 우리에게 명하시고 우리에게 여기로 와라 저기로 가라, 이것을 하지 말라, 너는 그것을 참아라, 이번에는 나서지 말라, 이것은 네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주님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것도 명하고 저것도 명하실 권한이 있는 것이고 권세가 있는 것이고 그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섬기는 것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각오하는 것이고 그것을 우리가 뜻하는 것이 아닙니까. 언제부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나를 위해 존재하는 분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것은 천동설적인 신앙이지요. 나는 중심에 있고 예수님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신다, 그게 아니고 진짜 그리스도인은 지동설적인 신앙입니다. 주님이 중심에 계시고 내가 주님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주님이 내 인생의 중심이시다, 나는 주님을 섬기기 위한 존재다, 그 변화를 이해하시겠습니까, 내가 우주의 중심이었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 때로는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고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내가 움직이고 내가 변하고 내가 적응하고, 또 세상 모든 일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목회자도 교회가 목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엄마 아빠도 자식이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녀도 하나의 인격체이고 자기 인생이 있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있고 그리고 부모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도와주는 것이지 부모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모든 것은 우리가 살면서 ‘아, 이게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구나. 세상에는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 또 다른 주님이 신경 써야 될 대상이 또 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겸손해 질 수 있고 또 손해를 감수할 수도 있고 또 온유할 수 있고 또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 자식이 귀중한 만큼 남의 자식들도 귀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가 대학에 진학할 때 어찌 하나님이 내 자식만 합격하게 하고 내 자식에게만 긍휼을 베풀겠습니까. 안그렇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위해서 완벽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모든 사람,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이 완벽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당신의 스케줄을 따라서 이루실 것입니다. 때로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열두 살 된 딸을 둔 야이로라는 남자가 자기 딸이 아프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와서 부탁합니다. ‘내 딸이 지금 집에서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빨리 오셔서 손을 얹어 낫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시는 도중에 엉뚱한 여자가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대는 바람에 예수님의 오시는 길이 지체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여자와 대화를 하고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시는 동안에 야이로의 딸이 그만 죽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원통한 일이지요. 내 차례였는데 엉뚱한 사람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내가 뜻을 이루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딸이 죽었으니까. 도중에 스케줄이 바뀌었습니다. 순서가 바뀌었어요. 이 야이로의 딸이 우선순위로 예수님의 기도를 받아야 되는데 그러나 그 여인도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었고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순서가 바뀌고 시간이 지연되었지만 그러나 예수님 말씀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이 결국 그 집에 가셔서 ‘달리다굼’ 그 소녀를 일으키시지 않습니까.

  주님이 지체하실 수는 있지만 결국은 오실 것이고 당신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믿어야 됩니다. 그것이 내가 기대했던 그 때가 아닐 수 있습니다. 내가 기대했던 순서대로 안 될 수도 있어요. 순서라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순서, 이방인의 순서가 있었고 또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그리고 오전 아홉 시에 포도원에 들어가는 자, 열두시에 들어가는 자, 해지기 한 시간 전에 들어가는 자, 다 순서가 있어요. 다 순서가 다릅니다. 민족마다 사람마다 순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순서와 때와 장소와 하나님이 주시는 분깃이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면 이 세상이 이해되지 않지요. 이 세상에 질서가 없는 것 같고 또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하나님의 일하시는 순서를 알면 ‘아, 하나님이 이런 이런 이유로 이렇게 하시겠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인도라는 나라를 잘 알지도 못했지만 인도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인상은 첫째는 인구가 많고 둘째, 가난하다, 셋째, 더럽다 이런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친디아라고 해서 중국과 인도가 세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그것을 기대나 했겠습니까? 이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인도에서 소위 IT 산업을 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인도의 IT 산업이 발전하고 이제는 인도에서 과거에 자기를 식민지화 했던 영국의 기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재구아 라든가 이런 영국의 기업을 인도 사람들이 사들이기 시작했는데 사람은 그러므로 섣불리 판단하면 안됩니다. 사람은 다 순서가 있고 민족이든 나라든 다 순서를 하나님이 정해 놓으셔서 처음에는 뒤지는 것 같은데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나라와 민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어느 누구도, 어느 민족도, 어느 국가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다가 오히려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루살렘의 교인들이 베드로가 옥에 들어가니까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그것은 베드로라고 하더라도, 사도라고 하더라도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얘기입니다. 지금까지는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고 기적을 행하고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그렇다고 베드로가 슈퍼맨이 아니에요. 그도 남의 사랑이든 기도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옥에 들어가니까 성도들이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고 그 기도를 들으셔서 주님이 옥에 있는 베드로를 기적적으로 건져주십니다.

아마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를 쓰시지 않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어련히 그를 알아서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맞는 얘기입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은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련히 하실 것이라고 성도들이 무관심해선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베드로를 쓰시고 돕기 원하시는 것처럼 성도들도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도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같은 뜻을 품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위하는 것처럼 성도들도 베드로를 위한 마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시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기도하고 믿으라고 요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도 똑같이 원하고 똑같이 좋아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품은 뜻 주의 뜻 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말씀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것을 하나의 비유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한다면 예수님도 우리 안에 거한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실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반대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없다면 그건 예수님이 우리 안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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