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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의 열정을 회복하자 (롯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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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열정을 회복하자 (롯 1:1-6)

떡집에는 떡이 있다. 그런데 떡집에 떡이 있다고 해서,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는다. 떡이 맛있어야 손님들이 떡집에 오게 되어있다. 떡집에 떡이 없으면, 손님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떡이 있어도 맛이 없다면, 그 역시 찾는 손님이 없게 된다.

오늘 말씀은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의미지만, 떡집과 흉년은 어울리지 않는다. (2) 유다는 찬양이고, 에브랏은 수확이 많다는 뜻이다. 따라서 노랫소리가 있고, 수확이 많은 떡집에 흉년(라아브, 굶주리다, 갈망하다)이 들었다. 그런데 룻기에 흉년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다.

오히려 흉년을 맞이한 가족의 이야기, 남편을 잃은 여인들의 삶을 보여주므로, 단순히 먹지 못한 흉년을 말하지 않고, 인생의 흉년을 말한다. 그래서 두 아들 말론(병든), 기룐(파괴, 끝난)의 모습이다. 그런데 흉년이 엘리멜렉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에게 있었다.
 
나오미(기쁨)의 남편 엘리멜렉은, 가족들을 데리고 먹을 것을 찾아, 모압 지방으로 떠난다. 모압은 이스라엘의 원수인데, 모압으로 떠났다. 떡집에 떡이 없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떡을 찾아서 떠났다. 오늘날 교회라고 하는 떡집에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생명의 떡 되신 예수님이 없기에,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떡을 나누어주는 그리스도인들이 맛을 잃어, 성도들에게 싫증을 느끼고 실망한 사람들이, 더 맛있다고 생각하는 떡을 찾아서 떠나고 있다. 베들레헴이라는 교회를 떠나서, 모압이라고 하는 세상을 향해 가고 있다.

하지만 모압에 가서 약간의 떡을 얻었지만, 남편이 죽고 두 아들마저 먼저 죽는, 비극을 맞았다. 오늘날 먹을 것과 더 맛있는 떡을 찾아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영적 죽음이라는 더 큰 슬픔과 아픔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다시 죽음을 통해,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결정을 잘 내려야 한다. 가장인 엘리멜렉이 가족들을 잘못 이끌어, 온 가족이 고통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엘리멜렉은 살려고 모압 땅으로 갔지만, 오히려 죽고 말았다. 두 아들도 아버지를 따라가는 것이, 자신들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죽고 말았다.

절망적일 때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다.”(6,22). 베들레헴에 다시 양식이 생겼다는 소식이 듣자, 사람들이 돌아온다. 굶주린 사람들은 먹을 것이 생기면, 사람들이 다시 찾게 된다.

그렇기에 듣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그 소식을 듣지 않았다면, 최종적인 결단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말씀을 떡 되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와 연결해서 생각해 보자. 그리고 예배의 열정을 잃었던 백성들이, 어떻게 예배의 열정을 회복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1.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간구하라.

십 년 동안 기근에 시달리면서, 식량이 없었던 베들레헴에 풍년이 든 이유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6)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돌보심(권고하심)이란, 하나님의 방문, 하나님의 임재를 뜻한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만 회복된다. 하나님께서는 90세가 되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는 사라를 돌보셔서 아들을 낳게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기근이 있는 땅에도 양식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죽어 있는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홍해가 갈라지면서 길을 만들어 내고, 요단 강물이 말라서 건널 수 있는 대로가 생긴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옥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아픔이 떠나간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귀신들린 자들이 자유롭게 되고, 병든 자들이 치유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도, 오천 명 이상을 먹을 수 있는 이적이 일어난다. 태양이 멈추고 달이 멈춰서는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우리 교회와 우리 삶에도,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문제는, 베들레헴이라는 떡집에 떡이 없음 같이,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 예배는 드리고 있는데,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기에, 사람들이 예배당을 떠나고 있다.

예배에 은혜와 감동이 없는데, 사람들이 모여 들리 없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냉랭한 마음으로 아무런 기대도 없이 예배드린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기쁨이 없고, 감동도 은혜가 없다. 예배드리는 시간이 지루하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예배 분위기를 재미있게 바꾸고, 사람을 즐겁게 하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전문기획 사에 의하여, 예배가 콘서트와 쇼로 전략하기도 한다. 화려한 조명과 무대장치, 또 고가의 음향장비들을 동원해서, 예배와 은혜에 감동을 추구해 보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아니다.

오늘날의 예배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예배로 변질되고 있다. 구경꾼이 되어서 예배를 보려 하기에 은혜가 없고 능력이 없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싸울 때, 수많은 구경꾼들이 있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었지만, 엘리야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 영적대결에서 승리했다.

바알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계속 바알의 이름을 불렀지만, 바알은 한낮이 되도록 응답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만든 제단을 돌며 춤을 추고, 자신들의 의식에 따라 칼과 창으로 몸에 상처를 내서 피까지 흘렸다. 그리고 저녁 제사시간이 될 때까지, 미친 듯이 날뛰었지만, 바알은 여전히 응답하지 않았다.

이때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허물어진 주님의 제단 주변으로 모이라고 했다. 그리고 제단을 고치고, 12개의 돌을 모아서 제단을 다시 쌓고, 제단 주위의 도랑을 팠다. 장작을 쌓고 송아지를 잡아, 그 위에 올려놓고, 물을 번제물과 장작에 쏟아 부었다. 물은 제단 위로 흘러넘치고, 도랑에도 물이 찼다.

(왕상18: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하고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한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불로 임재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그리고 그 기도는 응답 받아, 하나님의 불이 떨어진다. 그 불은 재단과 나무단과 불과 흙을 모두 태우고, 도랑의 물도 모두 말라 버리게 했다. 이제 교회는 방황하는 백성들을 불러 모아서,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쇼를 보여주고, 콘서트를 보여주면서,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엘리야가 기도했던 것처럼 “하나님, 응답해 주십시오, 하나님 불로 임재하여 주십시오”하고 부르짖는 간절함이 필요하다.

그 간절함이 하늘 문을 열고, 그 간절함이 하늘로부터, 불이 임하게 했다. 따라서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갈급한 심정으로, 우리 영혼도 주님의 임재를 간절히 원해야 한다. 계시록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예배의 중요성이다. 온통 예배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계17, 18장에 승승장구하던 음녀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이때 마귀를 무너뜨리는 무기이자 원동력이 예배임을 강조한다. 왜 멸망했는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인본주의와 세속주의 역시 망한다.

2. 하나님의 불을 사모하며, 함께 일어나야 한다.

‘함께 일어나며’라고 했다. 우리의 간절한 소망과 기도는, 함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함께 만나는 것이다. 나오미는 모압에서의 오랜 생활을 청산하고, 원래의 자리를 찾기 위해, 함께 일어났다.

‘일어났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각성을 이야기할 때 쓰이는 단어다. 결단은 실천될 때 위대하다. 말씀을 듣고 일어날 때, 아름다움으로 전환된다. 우리에게 일어남이 없다면, 우리는 잘못된 곳에서 떠나지 못하고, 항상 그 자리에서 평생을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함께 일어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불이 임해야만 한다. 따라서 내 옛 사람을 태우고, 옛 성품을 태우고, 나의 죄성을 모두 태우는 역사를 기대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불이 임해야 우리를 괴롭히는 악한 영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불이 임해야 병든 영혼과 육체가 치유된다.

기도 안에 나의 모든 죄악을 태우는 역사를 열망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 예수님을 멀리서라도 보기를 소원하며, 뽕나무 위로 올라갔던 삭개오의 열심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

마음 둘 곳을 몰라 방황하고 있다면, 반복적이고 순간적인 죄로 인해 고민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소원해야 한다. 사람 만나는 것을 그리워하지 말고, 사람에게 매달리지 말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나를 태우고, 나를 만족시키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주님만이 나의 힘이요, 방패요, 나의 소망이라는 고백이 내 안에서 증거가 된다. 그 어떤 소원보다도 하나님의 임재를 소원하는 간절함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시143:6)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라고 하는 간절한 고백이 있을 때, 하나님은 임재 하신다. 예배드리러 갈 때, 우리의 간절한 소원과 기도는 무엇인가?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처럼, 설렘과 기대가 우리 안에 있는가?

며칠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해 갈증에 허덕이며, 물을 찾아 헤매는 심정이 내 안에 있는지, 몇 날을 굶고 배를 움켜쥔 채, 먹을 것을 찾으러 다니는 그 간절함이, 우리 안에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심각한 영적 기근에 빠져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먹을 양식이 풍부하고, 마실 물도 풍부하지만, 우리의 내면은 기근 가운데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영적 기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굶주리게 되면 닥치는 대로 먹는다. 영적인 광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단들이 날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지금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지,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다. 입으로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다 만족한다고 떠들면서, 자신의 불쌍한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지 못한다. 하나님이 보실 때, 참으로 비참하고 가난한 영혼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불로 연단한 금을 사야 한다. 흰옷을 사서 입어야 한다. 안약을 사서 발라야, 눈을 떠서 볼 수 있다(계3:17-18). 그러나 불로 연단한 금은, 세상에서 살 수 없다. 나의 부끄러움을 감쌀 수 있는 흰옷은 시장이나 백화점에서 살 수 없다.

내 눈이 멀었는데, 이것을 치료할 수 있는 안약은, 약국이나 안과에서 팔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만 주신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지금 차디찬 지하 감옥에 닫혀, 나갈 곳이 보이지 않는 절망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소원하는 예배를 해야 한다.

바울과 실라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송하며 예배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임재로 지하 옥문이 열리게 된다. 찬송만 한다고, 기도만 한다고, 옥문이 열리지 않는다. 우리의 찬송과 기도가 하나님의 임재를 만들어내야 한다. 찬송하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따라서 찬양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소원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불이 임하기를 소원해야 한다. 간절함이 있을 때, 기도와 찬양이 응답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 앗수르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하려고 할 때,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간절하게 기도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기를 소원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서, 185,000명의 앗수르 군대를 치셨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혀 위기에 빠졌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소원하면서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야 적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 중병에 걸린 히스기야 왕의 기도로, 하나님께 호소한다.

죽음의 때가 다가옴을 알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히스기야 왕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 (왕하20:5)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히스기야 왕의 병은 치유되었다.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우리의 눈물을 보시면 이적은 일어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부르짖으며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사람들에게 부르짖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흘리며 기도해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

3. 희생하고,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려라.

세상을 포기하고 돌아갈 때, 끊어지는 아픔이 있다. 룻은 가족과 끊어지는 고통을 안고 베들레헴에 왔다. 희생이 없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에는 희생이 없다.

진정 예배 가운데 주님의 임재를 보기 원하면, 하나님 앞에서 가장 비싼 옥합을 깨뜨리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 귀하고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던 마리아의 희생은, 오늘날 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왜 이렇게 비싼 것을 낭비하느냐고, 비난하는 목소리로만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을 아까워한다. 자녀들이 예배하지 않고, 학원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공부하는 시간은 귀하고, 예배드리는 시간은 아깝다고 생각한다. 예배 중에도 시계를 들여다보고, 예배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예배당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과 물질을 그렇게 아까워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예배는 희생이다. 희생이 있어야 하나님을 진정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를 예배자로 받아주셨다. 우리도 값비싼 옥합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깨뜨려야 한다.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가장 값비싼 것을 주님 앞에 드리기 시작할 때, 우리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 세상 줄을 끊는 결단을 하라.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만 하나님을 찾고, 내 문제만 해결되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이다.

병들고 집안에 문제가 생기고,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도가 열렬해지고 찬양이 뜨거워진다.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며 애타게 기도한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면 감사를 잊고, 더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지 않는다.

우리가 행하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라, 내 마음대로 드리는 내가 원하는 예배, 가인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내 입맛에 맞는 예배, 내가 기뻐하는 가인의 예배만을 찾아다니고 있다.
 
예배에 있어서 나의 기분과 기쁨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내 마음이 슬프든 기쁘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 주님 앞에 나가 예배드릴 때는, 결정해야 한다. 내 마음이 안 좋아도, 슬픔이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예배 받으셔야 한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진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엘리야의 기도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바알의 선지자들을 다 파했던 것처럼, 이적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해야 한다. 말씀이 선포될 때, 수천 명이 회개하는 초대 교회의 역사가,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제 말씀을 전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임재를 소원한다면, 동일한 역사가 오늘 이 시대에도 일어날 수 있다. 예배에 목마른 삶은 어디서나 기도한다. 교회에서 예배하고, 집에 가서도 혼자 예배한다. 예배하는 장소는 그 곳이 어디든 거룩한 곳이 되고, 어느 곳에나 임재 하신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언제 어디서나 목말라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늘 배가 고파야 한다. A. W. 토저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셔서, 먼저 예배자로 만드시고, 그 후에 일하는 자로 만드신다.” 먼저 예배자가 되어야, 그 다음에 봉사자가 되지, 예배자가 되지도 못하면, 봉사자가 될 수 없다.

예배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교회가 아무 일을 못해도, 예배드리는 일만 잘해도 큰일을 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해야할 가장 큰 봉사는 예배다. 그렇기에 예배를 영어로 Service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탄은 예배들 방해한다. 형식적으로 만든다.

따라서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리자. 키에르케고르는 관객과 배우의 비유로, 예배를 보는 자와 드리는 자로 구별하고 있다. 관객은 연극을 보는 자요, 배우는 연극을 드리는 자다. 예배를 드릴 때도 우리가 드리는 자라면, 하나님은 보시며 받으시는 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관객이 아니라 배우다.

배우가 가져야 할 자세를 통하여, 참으로 예배드리는 태도를 깨달아야 한다.

(1) 배우는 늦지 않는다. 늦으면 연극이 되지 않는다. 늦으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2) 배우는 연극 중에 일찍 가는 법이 없다. 연극을 다 끝낸 후에, 숙소로 돌아간다.

(3) 배우는 졸지 않는다. 그러나 관객은 졸면서 본다. 예배시간에 졸면 예배를 드리는 이가 아니라 예배를 보는 이다. 침례요한이 소속되어 있던 쿰란 공동체에서는, 예배시간에 조는 이에게 한 달 간 예배에 나오지 못하도록 규정을 두었다.

(4) 배우는 연극의 내용을 분명히 파악한다. 배우는 대사를 암기하고, 연극의 흐름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관객은 대사 몇 개쯤 못 들어도 괜찮다. 예배드리는 사람은, 설교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한다. 무슨 말을 하였는지 모르는 사람은, 예배를 드린 사람이 아니라, 예배를 본 사람이다.

(5) 배우는 감정을 준다. 감정을 주는 이가 배우요, 감정을 받는 이가 관객이다. 배우는 울리고 관객은 운다. 배우는 웃기면 관객은 웃는다. 배우는 슬프게 하면 관객은 슬퍼한다. 감정을 만들어 줄줄 아는 이가 배우다. 예배시간에 감정을 만들어 줄줄 알아야,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에, 흥분할 줄도 알아야 한다. 벅찬 감격에 소리를 지를 줄도 알아야 한다. 너무 좋아서 박수를 칠 줄도 알아야 한다. 손을 들고 찬송할 줄도 알아야 한다. 배우는 행동한다. 관객은 구경만 한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감정을 줄 줄 아는 이가,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다.

(6) 배우는 아무렇게나 옷을 입지 않는다. 배우는 배우의 옷이 있다. 그러나 관객은 자기가 입고 싶은 대로 옷을 입는다. 아무렇게나 옷을 입고, 예배하는 사람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아니고, 예배를 보는 사람이다. 좋은 옷을 입으라는 것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입어야 한다.

(7) 배우는 관객을 만족케 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한다. 배우의 존재 목적은 관객을 만족시키는데 있다. 관객을 실망시키는 배우는, 배우로서 가치가 없다. 배우의 생명이 길지 못하다. 그러나 관객들에게 인기가 있으면, 배우의 생명은 길게 된다. 그러나 관객은 배우를 통하여, 만족을 얻고 싶어 한다.

진정한 예배가 무너진 이 시대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자. 잃어버린 예배의 열정을 회복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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