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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어 함께 기도 할 때 입니다 (눅 22: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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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함께 기도 할 때 입니다 (눅 22:39-46)

I. 내 삶이 아플 때

어릴 때 나뭇가지를 들고 전쟁 놀이를 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집안 일도 숙제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신나게 놀다가 한 아이 손에 가시가 박힙니다. 그러면 아이는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며 집으로 달려갑니다. "엄마, 아파요. 가시가 박혔어요."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 삶에 아픔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가정공동체에 민족공동체에 역사전체에 고통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달려들어가야 할 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인생에서 감당키 어려운 고통을 만날 때 마다 달려갈 품이 있고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품이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나의 삶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 달려갈 때마다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품어주시는 자비로우신 그 분의 품, 역사의 운행자가 되시며 만왕의 왕되신 아버지의 품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박대했지만 언제나 박대하시지 않는 아버지의 품이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둘러싼 삶의 상황이 어려워져만 갈 때에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 갈 것입니까? 집안이 기울어져 갈 때에 사업이 어려워 질 때에 직장생활이 불안할 때에 내 앞 길이 매우 불투명하고 불안하게 보일 때에 세상 사람들은 이 삶의 상황을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갑니까?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은 불평하고 원망하는 일입니다.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키는 일들입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른 사람 탓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태도입니다.

혹자들은 문제를 덮어버리고 잊어버리고 문제를 부인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합니다. 가면을 쓴체 마치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그러나 삶의 뒷골목에서는 마냥 불안해하고 공포를 더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문제로부터 도피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잠 또는 술에 몸을 맡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 어떤 방법도 우리 삶에 전혀 도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법을 택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쩔 수 없는 난관과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 때 이런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 있습니다. 직면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끌어안고 정면돌파하는 것입니다. 바로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기도하면 상황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상황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II. 기도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

기도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첫째,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기도에 가장 영광스러운 결과는 기도하는 내가 변화하는데 있습니다. 기도는 나의 잘못을 깨닫게 해줍니다. 나의 부족과 누추함을 알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불순종했던 나를 발견하게 해줍니다. 우리 자녀들이 속을 썩여서 기도하다보면 나 자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속썩이던 자식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신랑되신 우리 주님 앞에 나 자신이 얼마나 순결하지 못한 신부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업문제를 놓고 기도하다 보면 나 자신은 하나님의 도움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래서 회개하도록 해 줍니다. 신앙인의 가장 위대한 축복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세워줍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해줍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줍니다. 하늘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선 기도하는 나부터 변화시킵니다.

둘째, 기도는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문제를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행위입니다. 언제나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역사하실 기회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나를 향해 역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 문제속에 하나님이 간섭하시도록 문을 여는 것이 기도입니다.

셋째, 기도는 그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나에게 부여해 줍니다.
물이 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수영을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문제가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풀 수 있는 실력 없음이 문제입니다. 이때 기도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 풀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기도는 만사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넷째, 기도는 감사와 찬송을 가져다 줍니다.
찬송은 가장 신령한 차원의 기도요 곡조가 붙은 기도입니다. 어떤 종교는 하루종일 중얼중얼 염불만 외워도 됩니다. 어떤 종교는 뜻도 의미도 모르고 절만하면 됩니다.

세계 수 많은 종교 가운데 기독교에만 찬양이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눈을 만든자가 보지 않으랴. 귀를 만든자가 듣지 않으랴"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필요했고 미켈란젤로가 필요했습니다.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는 헨델이 필요했고 하이든이 필요했습니다. 들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를 고발하는 한 상소문에는 당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정한 날 정한 시간에 모여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그 시간을 마쳤다."

기도는 불평하던 입술에 감사를 가져다 줍니다.
기도는 원망하는 가슴에 찬송을 가져다 줍니다.

신바람 운동을 벌이고 있는 황수관 박사는 "항상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한마디가 산적같은 자기 얼굴을 바꾸었다고 자신의 인생, 자신의 운명을 바꾸었다고 고백합니다. 한번은 고속버스 티켓팅을 위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데 얼굴도 몸도 험하게 생긴 한 부인이 작지않은 궁뎅이를 밀고 바로 자기앞에 새치기를 하더랍니다. 그리고는 담배를 입에 물더니 역겨운 냄새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눈을 질근 감고 "하나님, 이럴때도 기뻐해야 합니까? 이럴때도 감사해야 합니까?" 무조건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기도를 시작했는데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고 감사가 생각 나더랍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그렇게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런 부인을 아내로 맞지 않게 되어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인생은 고난의 순간이 있는가하면 즐거움의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중 기도를 잊지 않듯이 즐거움의 순간에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III. 자는 자여 어찜이뇨?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목전에 두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그 문제를 대면하셨나요? 예수님은 그 누구에게도 불평이나 원망이나 자학하지 않았습니다. 가면을 쓴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속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문제로부터 도피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게셋마네동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문제를 알고 있었던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도 어렴풋이 다가올 시련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에게 중요한 어떤 사건이 일어나리라고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바로 자기 자신들의 고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근심하고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45절에 보면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제자들은 슬픔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미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슬픔과 불안의 순간에 저들은 오히려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에 보면 요나라는 선지자가 나옵니다. 니느웨를 위한 소명을 거절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요나. 그 밑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망각으로의 도피! "에라 잠이나 자자." 일종에 도피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러한 요나를 향한 구약의 외침은 무엇이었습니까? "자는 자여 어찜이뇨?" 슬픔에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음성은 무엇이었습니까? "어찌하여 너희들이 자고 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라고 문제가 없겠습니까? 우리들의 삶의 정황과 무엇이 다릅니까? 지금 기도해야 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특별히 사순절은 이 땅에 모든 그리스도인들 이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때입니다.
지금은 깊은 잠을 즐겨야 할 때가 아닙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깨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어찌하여 너는 자고 있느냐?"
지금 우리 교회에 역사적인 일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 생애의 역사적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950날전에 한국교회가 평양 대부흥 100주년인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을 때에 한국교회를 깨우기 위해서 2007년이 얼마나 역사적인 순간인가를 한국교회를 깨우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금식기도하십시다. 저희교회가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955일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45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100년전에 있었던 그 대부흥이 오늘 우리시대에 임하기를 열망하며 기도했습니다. 이제 기도의 막바지, 잔치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앞으로 여러분들 모두 금식기도 이 어마어마한 대열에 동참하여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고난당하신 이 사실을 묵상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 고난의 의미를 기억하는 기도하는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너는 자고만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한소망 비전채플 기공식이 목전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요즘 예배당 건축하는 사람 다 죄인이 되었습니다. 아무렇게나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무엇이든지 하는게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여러분 추한 의인이 되기보다는 거룩한 의인이 되십시다.

우리가 예배당을 왜 건축하는가? 그랬을 때에 성경적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요. 사회적인 기능만 생각하면 토론이 가능해집니다.

첫째는 섬길 준비를 하기 위해서 이 예배당 건축이 얼마나 중요한가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이 어마어마한 돈을 가지고 우리시대의 사람들을 멋있게 섬겨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예배당 건축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할 여지도 있습니다. 또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고, 그렇게 하는 교회들도 있는 줄로 압니다. 여기서는 논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서로들 다른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예배당에 사회적인 기능이라는 것은 지극히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지요.

신앙공동체의 양질의 신앙생활을 위한 놀라운 기능이 있습니다. 영광스런 예배를 위하여, 다음 세대에 자라는 우리 자녀들을 아름답게 교육할 수 있기 위하여, 민족의 지도자를 키우는 터전 꿈터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나아가서 우리 한공동체 안에 있는 귀한 성도님들이 아름다운 공간에서 우리가 함께 주님과 성령과 함께 교제하고 아름다운 코이노니아를 위해서 이 공간들이 필요한 것이지요.

복음전도의 아름다운 기능이 있습니다.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위해서 그리고 끊임없이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세계 열방을 깨우는 놀라운 장을 만들기 위해서 이 예배당 건축은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 교회가 성장되기까지는 자기 교회 하나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한국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작은 교회를 섬기고 교회를 개척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한국교회에 나누기 위해서 그 영향력과 그 능력을 권능을 가지고 이웃교회를 이 도시를 살리기 위해서 예배당 건축은 필요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기능 영적인 기능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의 성민들은 성전에 마음을 담고 그들의 삶의 중심이 성전에 있었습니다. 모든 신앙은 성전신앙이었습니다. 물론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그렇지만 성전이 가지고 있던 의미는 여전히 오늘 우리 시대에 유효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성전이 가지고 있던 그 아름다운 신앙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이런 영적인 기능이 있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잊어버린 서러움 속에도 어디에 가든지 열 사람 모이면 회당을 세웠습니다. 회당을 통하여 그들의 신앙과 그들의 가치를 유지해 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을 때에 그들의 집을 짓기 전에 예배당을 먼저 건축하고 예배드리고 농사를 시작하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까?

지금 우리와 함께 기도해야 할때라고 느끼시지 않습니까? 감사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하기에 지금이야 말로 우리 함께 깨어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것은 곧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과의 싸움도 아니었고 제사장들의 문제도 아니었고 헤롯이나 빌라도의 문제도 아니었고 바로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신앙생활에 승리하기 위해서 마지막에 가장 무서운 적이 있다고 하면 자기 자신이 아니었습니까? 사회에서 멋지게 승리하던 사람이 다른사람과의 싸움에서 아름답게 승리하던 사람이 어려운 상황속에도 멋지게 승리하던 사람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처절하게 깨어지고 좌절한 사람들. 자기앞에 패배하는 무력하고 연약한 사람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시던 분이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노도 광풍을 잔잔케 하시던 능력 있던 분이셨습니다. 그 분이 왜 이 시간에 기도해야만 했을까요? 무엇이 모자라기에 일찍이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생각할 때 십자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를 꺾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동산에 올랐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과의 싸움이 없습니까? 기도하지 않고도 늘 승리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약점이 없습니까? 해결 받아야 할 문제가 없습니까?

예수님의 사역가운데 눈에 보이지 않는 위대한 한 사역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운데 위대한 설교와 위대한 교훈을 남기셨습니다.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연약한 민초들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러나 중간중간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사역을 감당하셨는데 바로 기도의 사역이셨습니다.

큰 기적을 베푸신 다음 그 분은 홀로 산에 올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했습니다.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고요한 미명 일어나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분의 가르침이 권세있는 자와 같을 수 있었던 비밀이었습니다. 하늘의 능력을 이땅에 베풀어 주실 수 있었던 신비가 기도 가운데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외에는 이런 능력이 기도 외에는 이런 신비가 이런 비밀이 나갈 수가 없느니라"

교회에서 세상에서 하는 일이 중하고 많아질수록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보다 더 위대한 사역은 없습니다.


IV. 함께 기도 할 때 입니다

지금 교회 가족의 일원으로서 가장 큰 숙제가 있다면 함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물론 혼자서 골방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순절 같은 특별한 기간엔 온 성도들이 온가족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때입니다. 교회에 특별한 Mission - 사명이 던져졌을땐 온 성도가 함께 모여 기도할 때입니다.

예수님도 가끔 혼자 기도하셨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홀로 기도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남모르는 아픔을 가슴에 안고 눈물지으며 기도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골방에 문을 걸어 잠그고 땅을 치며 홀로 울어야 될 때가 있습니다. 티내지 않고 금식하며 전능하신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 속에 동일한 과제가 있을땐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함께 모여 기도할땐 특별한 능력과 은혜가 있습니다. 이럴땐 자리에 앉아있기만 해도 행복합니다. 비전이 흐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해야 될 때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가정의 어린 자녀들을 함께 불러 모아 놓고 아버지의 말씀을 펼쳐놓고 가장된 사람이 기도해야 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주신 그 비전이, 비전 채플을 통한 약속이 너무 크고 놀랍기에 기도해야 할 때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이 백성 이제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전능하신 아버지의 자비를 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한국교회가 일제히 일어나 한국교회를 살려달라 외치며 임박한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성령받은 사람들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하늘문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가장 연약한 사람들이 손에 손을 붙들고 기도하게 될 때에 하늘의 신비한 권능을 체험하고 맛보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사역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사역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역입니다. 교회학교 교사에게 가장 위대한 사역은 가르치는 순간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어린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게 될 때에 이미 위대한 역사는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목장의 목자가 맡겨주신 귀한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기 시작할 때에 그곳에 가장 위대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기도는 사역의 준비가 아니라 사역의 시작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기도로 내 이웃을 섬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내가 해야 할 가장 위대한 사역은 기도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가장 무서운 적은 기도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기도하지 않고 성공하면 성공 때문에 망합니다. 실패 가운데서도 기도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가장 비참한 실패에 내가 빠져있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 눈에 내가 실패자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도할 수 있다고 하면 실패 같으나 분명 성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V. 그래도 기도해야 한다

게셋마네 동산에서 우리 예수님 기도하신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기도하는 소극적인 이유는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가장 적극적인 뜻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기도했을까요? 아니요. 지금 예수님은 기도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종종 많은 장을 할애하며 "시온의 회복"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백성들이 지금 신음하고 있다. 저들의 신음소리를 내가 들었다. 저들의 시온성을 내가 회복시켜 줄 것이다." 지금은 저들이 끌려가 피흘리며 신음하며 고통 가운데 빠져있지만 내 백성들이 시온성을 향하여 돌아오게 될 것이다. 시온을 회복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에스겔 36장 36절에도 보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이 시온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황폐하고 황무한 그 땅을 다시 일으켜 세우게 될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반드시 이룰 것이다. "그래도 기도해야 한다." "내가 약속했다. 그래도 기도해야 한다. 기도로 그 약속을 이루어 가야 한다."

그 다음절에 이어지는 37절을 경청해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그래도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참으로 묘한 대목이 아닐런지요. 하나님께서 시온을 회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으면 회복시키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복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으면 하늘문을 여시고 복을 내려 주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기적을 베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면 기적을 맛보게 하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에 비전을 주시고 이루겠다 약속하셨으면 이루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보십시요. 그래도 내 백성이 내게 나아와 기도해야 할 것이니라. 시온의 회복을 이루는 방법은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한다." 여기 "그래도"의 신비를 아시겠습니까?  비전채플 - 반드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겁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비전 -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합니다."

비전채플을 이루어가는 방법이 기도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중요한 한 정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약속해 놓은 것을 이루는 성취의 방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대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사회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는 공동체를 향한 이 민족을 향한 각 가정을 향한 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이 이루시겠다고 하는 음성, 약속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시온이 회복되고 있지 않는 것입니까?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가정안에, 목장안에, 교회안에, 역사 한가운데 펼쳐져가게 될 것입니다. 시온의 회복은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이루어 진다."


VI. 기도 비상

비상한 축복을 위해서는 비상한 기도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지금 처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조금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시며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유대인들은 종종 기도할 때에 서서 기도합니다.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에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고 영광스런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들은 일어서서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곤 했습니다. 감사할 때에 찬양할 때에 삶이 평범하게 잘 펼쳐져 갈 때 우리는 그렇게 위엄을 갖추어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낭만적으로 폼을 갖추어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몸부림하며 절규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1절에 보면 예수님이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자리가 너무나도 비참하게 여겨져서 43절에 보면 "천사를 보내 기도를 도왔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44절에 보면 얼마나 처절하게 매달려 하나님앞에 몸부림하며 기도했던지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어서 뚝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다는 이 말은 막연한 과장법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극한의 고통과 집중 속에서는 정말 땀이 붉은 피가 되어 흐른다고 의사들은 말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생명을 거는 기도, 땀이 피가 되는 기도를 해야 할 때가 있다고 하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찢어져 가는 가정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냥 있어도 되는 것입니까? 비틀거리는 역사, 목표를 알지 못하고 질주하는 역사를 보면서 우리는 가만히 바라만 보아도 되는 것입니까? 무너져 가는 기업을 바라만 보며 울며 역사를 한탄만 하고 있어도 되는 것입니까? 방황하는 내 자식들을 바라보며 침체되어져 가는 영적인 이 안타까운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는 구경꾼으로 전락해도 좋더란 말더란 말입니까? 핏방울이 땀방울이 되도록 절규하며 비명이라도 질러야 되는 때가 아닐런지요? 한국교회가 한계가 없는 부흥을 보길 원한다면 비상한 기도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민족을 살려 주소서. 한국교회에 부흥을 주소서. 몸부림해야 한다면 바로 지금이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가 비전채플과 함께 새롭게 세워져 가게 하소서. 몸부림하며 함께 기도해야 할때라고 느끼시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비범한 상황은 비범한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필사적인 기도를 역사는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다말고 문득 짓궂은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이토록 처절하게 기도했다고 그랬는데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습니다. 먼 훗날 시간이 흐른 다음에 성경을 기록하면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기도의 장면을 생생하게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잠들어 있던 제자들이 어떻게 주님이 기도하시는 것을 보았을까요? 잠들어 있던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기도를 이토록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소리치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절규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 몸부림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잠속에서 언듯언듯 예수님의 기도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이 잔을 내가 마시지 않고 다른 길이 없겠습니까? "하오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잠속에서도 예수님의 절규의 기도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저들은 성경을 기록할때에 게셋마네 동산에서 절규하던 예수님의 기도소리를 똑똑하게 전해줄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기도할 필요가 없는 유일한 분이 있다고 하면 바로 예수님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기도하셨습니다. 매달려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이 아버지께 기도하셨다면 하물며 우리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기도가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잠들면 민족이 잠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민족이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가정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의 자식들이 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쓰러진 그 자리 절망했던 그 자리, 낙망했던 그 자리에서 용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빛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희망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이제 비전채플은 올라갑니다. 눈에 보이는 채플이 아니라 성도들의 마음과 마음, 비전과 사명이 먼저 세워져야 합니다. 축복의 토양이 먼저 닦여져야 합니다. 기도로, 기도로.

·꿈꾸던 비전이 성취될 것입니다.
·한민족의 꿈, 다음 세대의 꿈 - 비전 채플이 이 땅에 우뚝 솟아 오르게 될 것입니다.
·Again - 1907년 그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지금이야말로 기도 비상령을 내려야 할 때가 아닙니까?
·지금은 우리가 함께 깨어 기도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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