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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브엘세바의 복 (창 26: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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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엘세바의 복 (창 26:12~25)

시73:28절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
오늘 이삭의 생애가 바로 이 말씀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족장 중
    이삭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그랄 땅에 거하며 농사를 지어
    하나님으로부터 한 해 백배나 되는 축복을 받자
    그랄 사람들이 시기하고 질투를 하게 됩니다.
그랄 사람들은 이삭이 파놓은 우물조차 자신들의 것이라고 빼앗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들과 대치하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이삭은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우물을 파는 양보하는 생활을 합니다.
러나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셨고,
결국 이삭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으로
  영적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삭의 생애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은혜의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어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왜 이삭이 거부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1. 이삭이 한 해 농사의 백배나 얻어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12-13절)

이것은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증언입니다.
그 해에 그랬지요! 그 해! 어떤 해입니까?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던 해입니다.
26:1절에서 말하는 바로 그 해, 흉년이 든 해를 말합니다.
흉년이 들었던 해! 아무도 농사지을 엄두도 못 낸 그 해에
    이삭은 농사해서 대풍을 맞았습니다. 100배나 얻었다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믿습니까?  이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Message를 줍니까? 
이 말씀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면, 흉년이 장애물이 아닙니다.           
흉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환경이 방해를 놓을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삭이 거부된 사실 속에 한 가지 눈여겨 볼 말씀이 있습니다.
13절에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마침내` 이 말속에서 우리는 인생을 배울 수가 있는 거예요.
약속의 복을 하나님이 그냥 주는 게 아니라,
    마침내 주는 대서 인생을 배운다 그 말입니다.
    마침내는 그 냥이 아니라, 쉽게 가 아니라는 겁니다.
뭔가를 하다가 안 되고 쓰러지고 자빠지고 넘어지고 하다가
      마침내 이루었다 그 말이지요.
이삭도 별별 어려움 다 겪습니다.
이삭은 사실 그런 고생 안 해도 되는데
    왜 하나님은 이삭이 고생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이삭이 겪은 어려움은 26:1-11절 까지 말씀에서
    흉년과 아울러 그랄 땅에서 아비멜렉에게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침내 이삭을 거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IBM의 창설자인 톰 왓슨이 회장으로 있을 때,
한 간부가 위험부담이 큰 사업을 벌였다가
  1천만 달러가 넘는 엄청난 손실을 냈습니다.
왓슨에게 불려 들어간 간부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물론 저의 사표를 원하시겠죠?`
그러자 왓슨이 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지금 농담하는 건가?
    IBM은 자네의 교육비로 무려 1천만 달러를 투자했단 말일세.`
실패도 자산입니다. 큰 실패는 큰 자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수나, 실패를 귀중하게 여겨야합니다.
  어느 누구도 실패 없이 성공하지 못합니다.
  실패가 없으면 성공도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걸음마를 배우는 것을 보세요.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계속 일어납니다.
그랄 땅에 온 이삭은 실패했습니다.
그랄 사람들이 두려웠습니다.
그들이 자기 아내를 빼앗고, 자기를 죽일 것 같은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당당하게 아내라고 소개하지 못하고 누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거짓말도 들통이 났습니다. 참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 축복과
      약속의 계승자라는 체면이 완전히 구겨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삭은 완전히 성공했습니다.
과거의 실패를 말끔히 씻었습니다.
그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삶의 터전도 닦았습니다.
전에 자신이 그렇게 두려워했던 사람들의 시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신뢰했기 때문에
  그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복을 내리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택한 백성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당당하게 완전하게 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가 있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런 신뢰가 있기에 우리는 잘못했어도 용서를 받을 수 있고,     
실수했어도 다시 시도할 수 있고,
  오히려 실패가 거울이 되어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 속에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교육비를 투자하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삭이 그랄 땅에서 그것도 흉년에 거부가 되니
그 땅 사람들이 시기를 하는데 우물물을 흙으로 막고는 여기서 떠나라고 합니다.


2. 이삭의 축복을 시기한 불레셋 사람들이 어떤 일을 했으며
      이 사실이 우리에게 부는 영적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14-15절)

오늘 우리도 세상 사람들이 시기 날 만큼
    거부도 되고 유명인도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 이삭의 거부된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 아닙니다.
금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물 문제입니다.
성경은 팔레스틴을 배경으로 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틴 지방의 환경적 조건에는 금보다 물이 더 우선적이고 근본적입니다.
만약 금이 더 귀중한 문제라면
사55:1절에 [ 너희 가난한 자들아 금광으로 나아오라 ] 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 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는 물에 관한 사건이 많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40년 광야생활만 하더라도
      마라 사건, 르비딤 사건, 므리바 사건 다 물 사건입니다.

오늘 거부가 된 이삭에게도 바로 우물 사건이 터집니다.
외적으로는 14-16절에
이삭이 거부가 되니 불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이삭의 우물을 흙으로 메우고
    우리를 떠나라 라고 되어 있지만 영적으로 보면
우리에게는 부자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우물 문제요 생수문제요.
즉 하나님의 은혜 문제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를 포기해도 우물 없이는 못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17-18절에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다고 합니다.
나의 생수의 우물이 마귀의 장난으로 막혔다면
    또 다시 생수의 우물을 파기 바랍니다.
      물 없이 살 수 없듯이
      하나님의 은혜의 생수 없이는 영적 생명이 지탱될 수 없습니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을 다시 판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이 무엇일가요?


3.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을 다시 판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영적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16-18절)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영국의 <로이즈 존스> 목사의 부흥이라는 책에 보면
이삭이 불레셋 사람들이 메운 아브라함의 우물을 다시 파는 사건을
바로 하나님의 부흥을 나타내는 회개의 첫 작업으로 비유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문명이 발달되어도
근원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먹고 마시는 문제. 그리고 결혼하여 가정을 가지고 자식을 낳고
이런 일들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가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삭이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을 다시 파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산다는 점에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도 우리의 마음에 생수가 솟아나기 위해서는
혹 마귀가 메꾸어 놓은 온갖 잡동사니 이것 파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마음에 충만하여
        생수가 강같이 흘러나오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온갖 세상 잡동사니로 메꾸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와 생수를 맛보려면
    우리 마음에 잡동사니를 걷어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 마음의 잡동사니는 욕심도 될 수 있고, 교만도 될 수 있고,
      갈등도 될 수 있고, 나아가 신앙의 죽은 정통도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온갖 잡동사니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로 생수가 솟아날 줄 믿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은혜 받아야 삽니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 부자되는 문제 보다
은혜 받는 일이 내게 더 중요하게 생각되어야 성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랄 사람들이 시기하여 우물을 메꿔 버려도 다시 우물을 파니
    이제 아예 빼앗아 버립니다.


4. 이삭의 종들이 판 우물을 그랄 목자들에게 빼앗겨도 또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은 무엇입니까?(19-20절)

그랄에 거하는 이삭은 한마디로 객지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니 거부가 됐어요. 
그러니 블레셋 사람들 본토인 사람이 가만히 두겠냔 말이지요.
시기만 하는 정도면 괜찮은데 빼앗아 버립니다. 
우물을 빼앗긴 이삭이 그 우물을 ‘에섹’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다퉜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줘 버려.
그리고 또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물이 나오니까 또 싸움을 걸어옵니다.
그러니까 또 줘 버리고 ‘싯나’라 합니다.
      그 말은 비난, 고소의 뜻입니다.
그리고 또 파니까 물이 또 나왔어. 그것은 르호봇이라.
      ‘넓은 장소’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몇 가지 배워야 할 것이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는 겁니다.
은혜는 그 어떤 것에, 그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말고
    사모하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와도 싸워구나 고소하지 말라고 합니다.
          되려 오른 편 뺨 치거든 왼편도 돌려되고
            속 옷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성도들이 교회 와서 은혜를 받아
    그 은혜를 누릴 줄 모르는 것 같아요.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1. 하나님 관계에서 성공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2. 인간관계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훈련 하면 하나님과 관계만 생각하지 인간 관계를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은혜 받아도 인간관계 실패하면
                          그 삶 실패하고 맙니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말
관계 잘못되어지면 내용이 엉망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 받아 인간관계 잘못되어져 버리면
    하나님의 은혜가 가치가 없어져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우물 사건이 교훈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말씀합니다.
마5:5절[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온유한 자가 되어
자신의 마음에 열처리가 되어져서 감정에 북받쳐 일을 처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맡기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복을 주십니까?
1) 르흐봇의 복을 주십니다. 더 번성케 되는 복입니다.
  27절「그 이름을 르흐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더 넓은 장소를 주십니다.

2) 그리고 사람들로 부터도 인정을 받게 됩니다.
  나중에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하는 말이
  28절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29절[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고 합니다.   
     
이삭은 바로 온유한 자의 삶이 어떠한 것을 보여주는 신앙적 인물입니다.
그가 만약 어떻게 판 우물인데 하고 우물 때문에 다투었다면
    우선은 우물을 지킬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전쟁으로 불렛세 사람들로부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전쟁보다도 평화를 택했던 것입니다.
결과 그는 더 넓은 우물과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궁극적인 승리는 온유한 자의 것이라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향나무는 상처를 입을 때 진한 향기를 발한다고 합니다.
성도는 레바논의 백향목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상처를 줄 때 더 진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온유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상처를 품지 말고, 갈등을 품지 말고 예수의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핵심은 이삭이 거부가 되었다는 것도 아니요
    우물을 양보하였더니 더 넒은 우물을 얻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의 핵심은 이삭이 브엘세바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5. 이삭이 그랄에서의 백배의 축복의 삶을 포기하고 브엘세바로 올라간 사실은       
이삭의 신앙의 중심이 무엇임을 보여주고 있습니까?(22-25절) 

23절「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습니다」
  지형적으로 말하면 브엘세바는 그랄보다 낮은 지역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올라갔다고 합니다. 영적인 의미가 포함된 말씀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회복과 성숙을 의미합니다.

이삭이 어떤 연유에서 브엘세바로 올라갔는지
    성경에 그 이유를 말하지 않고 있읍니다만
일찍이 브엘세바는 이삭이 어릴 때 아버지 아브라함이 창21:33절에
[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는 말씀같이
아브라함이 장막을 치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이삭이 결혼할 때까지 성장하며 신앙적으로 양육 받은 장소입니다.
이삭은 부자도 되었고 넓은 우물도 확보했습니다만
    그보다 더욱 절실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브엘세바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1969년부터 성서고고학자들에 의해 브엘세바 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발굴대는 지하로 19.5m 파내려 가서 우물을 발견했습니다.
이 우물이 바로 이삭의 종들이 판 우물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아브라함도 브엘세바에 일곱 개의 우물을 판 일이 있는데.
브엘세바 유적지에서는 일곱 우물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제단의 자취도 찾아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브엘세바는 이스라엘의 국토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쪽 끝입니다.
성경에는 종종 `브엘세바에서 단까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국토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한라에서 백두까지`와 같은 말입니다.
대상21:2절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할 때 요압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돌아와
    내게 보고하여 그 수효를 알게 하라` 명령했습니다.
이삭은 지금 브엘세바로 올라왔습니다. 돌아온 거지요.
이것은 이삭의 신앙의 회복을 말합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셨읍니다.
24절 [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어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
브엘세바에 나타나신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자손으로 번성케 하겠다] 고 하십니다.
그럴때 이삭은 25절에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늘 본문말씀의 핵심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한 해 농사의 백배나 얻어 마침내 거부가 되는 것이고
더 넓은 곳에서 평탄한 삶 사는 것입니다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신앙의 회복과 성숙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번영을 주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삭의 삶에 대한 진지한 일면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25절에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단을 쌓았다는 것은
    어디 가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여호와의 권위를 인정하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을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 중심적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이 제일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 우선적인 삶인 것입니다.
    돈 버리는 것도 좋고 장소 넓히는 것도 좋지만
    예배보다 우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신앙의 좋은 습관 어디에서부터 왔습니까?
바로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배운 신앙의 습관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바로 기도생활을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성숙이
    예배를 통해 기도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성숙은 그 사람의 기도생활과 비례합니다.
    기도하는 사람 반드시 변합니다.
신앙의 성숙은 반드시 기도생활로 이어집니다.
기도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25절에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했는데   
앞에 우물을 팠다라는 말은
<하파르>라 해서 땅을 탐지하며 힘들어 팠다라는 말이고
브엘세바에서 종들이 우물을 팠다는 것은
<카라>라 해서 단순히 파기만 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쉽게 물을 얻을 수가 있었음을 말합니다.
이삭이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물을 쉽게 구할 수가 있었음을 말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삭이 브엘세바에 올라가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우물이 절로 얻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25절  [ 이삭이 그곳에 제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
이삭에게 브엘세바에서 경험했던 회복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이삭에게 사람과의 회복도 이루어집니다
26-31절
이삭을 시기하여 그랄 땅에서부터 몰아내었던 자들이 화친하고자 찾아옵니다.
사람들에게 놓인 여러 가지 갈등 시련 문제는 그 자체로는 해결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예배하며 기도할 때  시련과 위기에서 회복됩니다
그리고 두려웠던 불레셋이 26절 이하에 화평을 청해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함을 본 것입니다.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라 불리워 졌습니다.
우리가 부자 되고 싶다고 해서 부자 되는 것도 아니지만
    설령 부자가 된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며 기도하는 삶입니다.
대부분 그렇지 못하지요. 부자 되면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삶을 뒤로 미루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부와 명성을 지키려고 다투게 됩니다.
    평안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면 성공한 못난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부자가 못되더라도 더 넓은 장소를 얻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삶을 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의 승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백성의 진정한 삶의 성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물과 부는 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못난 조상 되지 말아야 합니다. 부를 남겨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 오는 세대로 더 편한 세상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에게는 부자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물문제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 받아야 형통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누릴 줄 알아야 바른 은혜입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은혜를 쏟지 말아야 합니다.
반응적인 사람이 아니라 주도적인 온유한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관심은 부자 되고 더 넓은 장소에서 편안한 삶 사는데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신앙의 회복과 성숙에 있다는 점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브엘세바에서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이삭의 신앙적 모습 속에서
우리도 내 마음의 고향인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이 더 우선적인 성숙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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