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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움없는 자신감(2) :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마 8: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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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없는 자신감(2) :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마 8:23-27) 
 
우리 성도님들은 지난 설 연휴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우리 삶이란 오고감과 만남, 그리고 헤어짐과 그 삶의 모습들에 대한 해석과 받아들임으로 이루어집니다. 생각이 행동을 유발하고 유발된 행동을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하여 받아들이느냐가 우리 삶의 일상입니다. 그 가운데 비교적 행복한 사람들은 주어진 모든 것을 보다 편안하게 받아들입니다. 더 행복한 경우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주어진 것으로 바라보고 해석하고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교회 나와서 예배드릴 때나 혹은 성경을 읽을 때, 혹은 기도할 때만 우리들에게 있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고 일을 하고, 어떤 결정을 하고, 모든 일들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우리들의 삶의 실제상황에서 역사하는 실제의 힘이어야 합니다.

이제 오늘도 지난 주일에 이어서 믿음 있는 성도의 삶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고자 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중풍병 환자를 하인으로 둔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와서 간절히 고합니다.
"예수님, 내 하인의 병을 좀 고쳐주십시오."
그와 같이 예수님께 구하고 예수님께서 치료해주시는 과정 속에서 이 백부장의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시키셨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크게 칭찬하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이라는 것은 주님께 대한 절대적 확신, 즉 절대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시간으로써 믿음 있는 삶이라는 것은 두려움이 없는 자신감을 가진 삶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주님께 대한 확신으로 우리 삶의 각종 현장에서 두려움이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배를 타고 바다 한 가운데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바다라는 것은 바다처럼 큰 갈릴리 호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그 바다의 한 가운데 있을 때 그만 풍랑이 너무너무 심하게 일어났습니다. 마침 그때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아마 풍랑이 일어나서 흔들리고 있는 배 위에서 주무시고 있는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이 참 잘 주무시는 것 같죠?(그런데 지금도 주무시려고 위로받으시는 분이 계신가본데요) 그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신가운데 그 배가 너무 심하게 흔들리고 풍랑이 심해서 이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면 '야, 우리가 죽을 것 같다.'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베드로, 요한, 안드레, 야고보와 같은 어부출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부들은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풍랑이 이는 바다에도 나가봤고, 수많은 풍랑도 겪어봤고, 그 가운데서도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바다에서 모든 이러저러한 일을 다 경험했던 사람들인데 이 어부출신인 제자들이 있는 제자들의 무리들이 죽을까 염려될 정도로 풍랑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 이 풍랑은 심상한 풍랑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옆에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운 마음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야, 우리 정말 죽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다 "예수님 좀 깨워보자."하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 지금 풍랑이 일어서 배가 깨져서 죽게 될 지경인데 예수님은 어떻게 잠만 주무십니까?"
예수님께서 일어났어요. 모든 상황을 보시더니 뭐라고 말씀을 하시냐면
"믿음이 적은 자여" 라고 그들을, "왜 무서워하느냐?"라고 그들을 책망하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무서워하는 것은 믿음이 적은 연고라는 뜻이지요.
"믿음이 적은 자여 왜 무서워하느냐?" 그리고 책망하시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 즉 제자들이지요. 그들은 도대체 예수님이 어떤 분이기에 바다와 바람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고? 하고 놀라게 됩니다.

오늘 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 장면 속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이 있지요.
도대체 예수님이 어떤 능력을 가지셨기에 바람과 바다가 잔잔한가? 하는 것에 의문도 가질 수 있겠지만 우리는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도 잔잔케 하는 온 세상의 권세를 가진 섭리자라는 것을 아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오늘 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문제는 이 제자들인데요, 제자들은 그 예수님이 옆에 있었는데도 왜 자신들이 그 풍랑 때문에 죽을까하고 생각을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또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서 죽으셔야 됐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지고 죽으셔야 했어요. 그럼 예수님이 물에 빠져 세상 마치시겠습니까? 그럴 리 없거든요.
예수님은 첫째 풍랑 이는 바다 가운데서 사고 당할 리 없고요, 그러면 제자들은 또 뭡니까? 제자들도 예수님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그 의의 성령 충만 받고 나가서 복음 전하다가 이 세상 떠나야 되는데 그렇다면 제자들도 풍랑 이는 바다에서 사고당할 이유는 없단 말입니다. 만약에 그와 같은 것들을 알았다면 이들은 두려워 할 이유가 없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본인들의 삶도 몰랐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몰랐어요. 그러니까 두려워하게 되는 거죠.
즉, 삶에 대한 무지가 결국 이들로 하여금 두려운 마음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깨웠고 책망을 받았으나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로 그 모든 풍랑가운데 평안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것을 오늘 생각해 보고자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도 이와 같은 풍랑 이는 바다를 항해하는 이와 같은 삶과 유사한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들은 풍랑 이는 바다가운데 무서워하는 제자들과 같지 않으려면 도대체 어떻게 우리의 마음 가지고 우리의 방향을 결정해야 되는가? 하는 것 오늘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풍랑 이는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의 삶에서 하루라도 우리는 편안하다 생각했으면 우리는 그 다음날 또 풍랑이 일고, 또 풍랑이 일면 또 편안해지고 이와 같은 반복적인 삶 가운데 어떤 마음가지고 그것들을 극복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가가 결국 우리 삶의 행복과 기쁨과 은혜의 역사를 이루는 길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른 본문을 순차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다음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에게 두려움이 왜 생기며, 그 두려움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풍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실 풍랑이 주는 공포감이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두려움이 왜 생기는가?
그 두려움이 우리들에게 가져다주는 면모를 생각해 보려는 것입니다.
삶의 두려움이라는 것은 내게 닥쳐오는 어려움과 내가 가지고 있는 힘과 비교해 볼 때 내 힘과 지혜와 능력이 부족해서 내게 닥쳐오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라고 생각할 때 생기는 공포심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이때 비교할 때 중요한 것은 우리는 내게 다가오는 어려움의 실제도 잘 파악하지 못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도 잘 파악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도 성경을 보면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풍랑이 왜 나에게 닥쳐오는가? 하는 풍랑의 의미와 그러면 나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자기 능력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아니 무엇보다도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을 다 주관하시는데 그 풍랑이 인다고 해서 제자들이 그 풍랑에 쓸려가겠습니까?

예수님의 권세만 알았다면, 그리고 내가 예수님의 권세를 함께 옆에 있어서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제자들이 무서워할 리가 없지요.
그들은 풍랑의 정체도 몰랐고 자기 자신의 정체도 몰랐던 거지요.
보통 어려움이 생길 때 차근차근 대처하는 것 보다는 순간적인 감정적 상태에 의해서 판단하고 그것으로 전부를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려움이 생길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차근차근한 생각보다는 그 순간에 어려움이 확대되어져 보이고 해결의 힘이 내게 나약하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두려움이 우리를 덮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의 어떤 일도 그 순간 상태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다 하면 그 다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우리는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순간 우리가 해야 될 최선을 다 못하고 두려움과 공포심가운데 그저 흐지부지 되고 마는 경우를 보지요.
우리는 어쨌건 어느 순간에서든지 이제까지 살아온 삶과 그리고 믿음의 결과에 근거해서 쌓아온 영적 힘과 우리의 삶의 능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대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두려움보다 내가 이 순간 어찌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주신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히 이것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냉철하게 생각하여 대책에 부심하고 골몰하다보면 그 집중력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을 느낄 여지가 없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여 집중하다보면 그 집중하는 사이에 우리는 두려움을 느낄 기회조차 없단 말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주님이 함께 하심을 잊고 두려움의 사실만 앞서가기 부문에 두려움이 생기는 겁니다. 두려움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려움은 사실의 실체보다 더 크게 우리에게 느껴짐으로 말미암아 해결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활용도 못하고 무너지는 겁니다.

두려움에 쫓기기 시작하면 판단력도 잃어버리고 당황하여 무기력하게 되고 모든 힘을 상실하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주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고 확신하고 믿음에 근거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믿음의 힘을 발휘해야 됩니다.
삶의 두려움이 닥쳐오고 자신감을 상실하게 될 때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무엇입니까? 삶의 모든 일은 결코 해결치 못할 것이 아니며 해결치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 다음은 우리 몫을 벗어나 주님께서 이루실 몫이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삶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흐름과 한 가지는 반전입니다.
삶은 언제든지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도 흘러가는 겁니다. 내 앞에 기쁨도 흘러가고 내 앞에 슬픔도 흘러갑니다. 기쁨이 흘러가면 그 다음에 다른 것이 올 것이고 슬픔도 흘러가면 그 다음에 또 다른 것이 오는 겁니다.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흘러가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또 반전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 삶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것도 고정된 것이 아니니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포기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내게 주어진 사명과 의무가 있다라고 생각하면 끝까지 그 길 가봐야 되지요?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들에게 있어서 인내라는 덕목 하나만 끝까지 붙잡고 있어도 우리는 의외로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아요. 끝까지 버티고 있는 일.
<지혜로운 사람은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가다 해를 받느니라>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폭풍우가 몰아칠 때 그저 무기력하게 머리 숙이고 엎드려져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또 하나님께서 '반짝' 하고 햇볕을 주실 때 일어나서 달려가야 될 때가 있단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머리 누르고 그저 엎드러져 있게 할 때 그 때 우리가 부비적거리고 일어나봐야 그때는 폭풍우가운데 쓸려갈 뿐이지요.
엎드려져 있을 때는 엎드러져 있을 수도 있고 또 그 기회에 우리가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공부해서 10년 동안 공부했습니다. 시험을 보는데 내가 10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반드시 합격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내가 10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는데 합격 못하면 나는 삶의 의미도 없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런 마음을 가지고 시험을 봤는데 안타깝게 시험을 보고 났는데 여러 수천 명이 시험을 봤는데 점수를 자기가 채점해 보니 나름대로 45점 맞았어요. 이 사람이 너무너무 실망해서 그냥 목숨을 끊었다고 합시다.
이제 시험 발표 때가 왔는데 수천 명이 시험을 봤는데 최고의 점수가 45점이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끝까지 가봐야 된다고요. 끝까지 가봐야 돼요.

세상에는 나만 잘하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는 나만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비슷하게 어렵고, 비슷하게 힘들고, 또 쉽다면 비슷하게 쉬운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끝까지 가봐야 합니다. 정말 인내 하나만 가지고 끝까지 버텨도 삶에는 건질 수 있는 것들이 의외로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에는 끝까지 결과도 보지도 않고 중간에 스스로 어리석게 판단해서 일을 망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려움이란 결국 닥친 상황에 대한 내 정서적인 문제이지 그것이 객관적 판단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고 주어진 여건에서 어쨌든 가져가야 될 최선책을 찾아 실행해야 합니다. 시험이 오면 피할 길도 있고 문제는 답안을 가지고 만들어집니다. 여러분 답가지고 문제 안 만들어지면 그 문제 낸 사람은 큰 화를 입어요. 문제를 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반드시 답을 확보하고 문제를 낸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문제를 못 풀었다는 것은 아직 그 답을 못 찾았을 뿐이지 그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 우리 삶의 두려움을 해결하고 자신 있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두려움의 실체와 그 두려움을 대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고 주님의 도우심의 역사를 기대해야 합니다.
도대체 그 두려움을 일으키는 삶의 어려운 상황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 어려움이 도대체 나에게 왜 있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나를 괴롭혀서 무너뜨리려는 어려움인가, 나를 연단시켜서 하나님 앞에 더욱 더 귀한 은혜의 모습을 이루어 가는 것인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누구며, 내 삶의 모든 행로가 결국 무엇에 의하여 주관되어질까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 삶을 주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관한 뜻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내게 닥치는 어려움, 두려움, 이것이 공포로 다가와 내게 있어서 재앙인가? 아니면 이것이 내게 연단의 고초로 다가와 이것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세워질까? 를 생각하면 우리는 간단한 겁니다.
내게 어려움 있다면 피할 길 내시고 또 내가 힘겨워 감당치 못할 때 결코 나를 외면치 않는 감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기대해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보호, 인도하시는 주님,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운행하시는 주님을 믿으면 그 순간 우리는 마음이 달라지는 겁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면 의외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주님이 나를 인도하셔서 주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생각을 하면 우리는 내 자신이 그냥 삶의 어려움에 쓸려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고 어려움에 단호히 대처하게 됩니다.

오늘 제자들은 자신들의 길을 알았다면 이렇게 두려워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이 알지 못하고 어리석고 미련하니, 그리고 우리가 앞을 내다보지 못하니 우리는 때때로 이런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될 분이고 본인들은 그 이후에도 살아남아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될 사람들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풍랑에 씻겨갈 사람들이 아니니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것을 몰랐으니 이들은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연극대본 다 읽고 나면 결코 중간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연극이 마쳐지지 않고 고비를 넘어 결국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 자신의 삶과 모든 삶의 행로를 볼 때, 과연 그것이 주님 앞에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사용되고 진행되어져야 될 것을 오히려 주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야 됩니다.
우리는 내가 나를 볼 때 내 입장에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주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실 것이지?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용하실 것이지?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주시기 원하시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은 내 자신의 뜻과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 알잖아요.
결국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주님의 뜻과 계획대로 되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주님이 내게 실망하실까?
주님이 내게 어떤 일을 그만두시기 원할까?
그 일을 진행하기 원할까?
풍랑을 통해 내가 떠내려가기 원할까?
라고 생각하면 의외로 답은 간단하단 말입니다.
주님의 뜻을 생각했다면 이 순간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될 것인가를 결정해야 됩니다.

결국 우리 삶은 인간관계와 삶의 상황과 나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 같으나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주님의 뜻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주님을 깨우는 제자들처럼 비록 부끄러울지라도 주님께 우리 어려운 사정을 아뢰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 제자들은 정말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서 마치 풍랑 때문에 죽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잘 한 것은 그래도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 깨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시더니 실컷 욕만 먹었어요.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무서워하느냐?"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책망하고 그만 두실 분이 아니라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다시 평안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탕자 알죠? 탕자는 백가지 잘못했어요. 그러나 한 가지 잘한 것이 있는데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고 돌아왔던 겁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했죠? 예수님께서 물위를 저벅저벅 걸어와요. 베드로는 혈기가 왕성한 사람입니다. "주님 만일 주님이시어든 명하여 나로 하여금 물위를 걷게 하소서"
주님이 "오라" 했더니 풍랑 이는 바다로 풍덩 뛰어들었어요. 그랬더니 정말 물위를 걸어가는 겁니다. 걸어갔으면 끝까지 가지 바람을 보니까 또 무서워합니다. 그러니까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거기서 또 한 가지 잘 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소서."하고 구조를 요청했단 말입니다.
자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구조요청"
이 구조요청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물에 빠져 죽는 것보다는 구조요청 하는 것이 낫습니다. 주님 앞에 우리가 창피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 앞에 구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범죄했지만 눈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우슬초로 하나님 앞에 정결케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새로운 기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면전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실 때 차마 그는 대답을 못했습니다. "주께서 제 마음을 아시나이다."
그는 이렇게 밖에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주의 복음을 위해서 그의 삶을 드렸고 마지막에 순교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실컷 잘못해 놓고 그냥 회개한다고 잘못했다고 말하고 눈물 흘리면 그것으로 끝이냐? 그런 윤리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 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무조건 잘못했다하고 눈물 흘리고 말로 고백하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돌이켜 하나님의 새로운 은총과 은혜를 힘입는 것입니다.
잘못해서 버려지고 망가지고 자신도 남도 패하는 것보다 다시 기회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세워 하나님과 모두에게 기쁨이 되고 회복되고 그 은혜를 갚는 것이 더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기회를 다시 부여받는 것은 축복입니다.
비록 부끄러워도 주님 앞에 나아가 다시 기회를 부여받는 것이 믿음의 은혜요, 지혜요, 능력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실수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지지만 여덟 번 일어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의인은 안 넘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지는 것보다 한 번 더 일어나는 사람이 의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제자들이 부족했지만 그 부족을 채울 수 있는 게 그들의 모든 마음의 힘을 다하여 주님을 깨웠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 모든 것을 믿음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결하는 근본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믿음으로 우리 삶의 일들을 처리해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정말 주님 앞에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 앞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무서워하느냐? 라고 책망도 받았습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믿음이 적은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새로운 은혜와 소망을 가지고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두려움 속에서도 오히려 주님을 찾는, 그럼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살다보면 삶이 참 누추해질 때가 있습니다.
정말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다른 사람이 나를 비난할 때 보다 더 가슴 아플 때가 언제입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비난할 때 보다 더 가슴 아플 때는 내가 생각해 볼 때 정말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하고 자신에게 실망할 때가 아닙니까?
자신에게 실망할 때는 정말 한 없이 누추해집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비난할 때는 '아냐, 내가 그렇지 않아.'라고 마음속에 항전력이라도 갖춘다면 그래도 좀 나을 텐데 내가 내 자신에 대해 실망할 때 내가 얼마나 누추해져요?
그러나 그러한 순간도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고 다시 일어나 주님 앞에 달려가는, 주님을 깨우는 것이 결국 우리가 삶의 근본적인 두려움을 없애는 것입니다.

저는 나이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여러분이 나이를 다 알고 계시니까) 요새 조금이라도 더 나이가 들면서 제가 한 가지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이 전보다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습니다.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습니다.
제가 왜 편안해졌는가? 그것을 생각해보니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결국 결론이 그것이더라고요. 뭐냐 하면 왜 편안해졌는가? 했더니 뻔뻔해 진 거더라고요.

제가 전에 말씀을 드렸잖아요. 제가 참 민망한 게 있는데 목사가 하는 일중에 참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제가 전에 로비에 있었더니 평일인데 저를 보더니 "목사님, 오늘 주일도 아닌데 어떻게 교회에 나오셨어요?" 그러더라고요.
아주 초신자겠죠? 그래서 제가 "목사는 주일 아니라도 교회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목사가 하는 일중에 그래도 주일날 설교하는 일이 또 가장 큰 일중에 하나 아닙니까? 목사는 일주일 내내 어디를 가든지 주일날 설교할 생각을 하고 또 자료도 생각하고 머릿속에 생각하는 것이 목사의 일중에 하나인데요, 목사가 제일 민망한 일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설교하고 나서 저기서 악수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설교하는데 한 달에 한번은 꼭 큰 은혜를 주십시오."이렇게 기도합니다. 차마 제가 매주라고 말은 못하고 '한 달에 한번은 큰 은혜를 주십시오.' 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것 같더라고요. 제 입장에서는요.

목사의 입술을 떠난 말씀은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는 성령의 은혜로 다 와 닿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니까 나는 아무래도 괜찮아. 이건 아니잖아요. 제 나름대로는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성령의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뭘 하는데 잘 안 돼요. 역량이 안 되니까 그렇겠죠? 제가 보기에 그래도 속 시원한 게 일 년에 몇 번쯤 되냐 하면 전반기에 한 번, 후반기에 한 번, 두 번쯤 되는 것 같아요. 그것 가지고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교회에 계속 나오는 것이 저는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정말 민망합니다. 저 밖에 있으면 성도들 나갈 때 마다 다음 주에는 절대 안 나올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시는 것 보면 이게 마음에 감동이 되는데 성령의 역사가 크다. 생각하는데 제가 이 교회에서 몇 번 설교했나? 생각해보니까 주일만 해도 4000번쯤 설교한 것 같아요. 17년 동안 하루 다섯 번씩, 초반기부터 제가 네 번씩 했거든요. 처음 개척할 때부터 그러나 보니까 보통 한 4000번 정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도 설교할 때 제가 여기 올라오기 전까지 읽어보고 또 읽어보고 바로 저 아래서도 또 읽어보고 그러거든요. 그리고 어떤 날은 토요일 날 초조하기도 하고 잠도 잘 안 오기도 하고 (물론 잘 잘 때도 있습니다.) 그래요.

아주 편안하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겠지!' 이렇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교를 하고나면 제가 너무너무 충격을 받는 겁니다. 그 충격을 제가 잘 흡수를 못하겠습니다. 목사가 돼서 설교를 이렇게 하나? 저는 가끔가다 기독교 텔레비전에서 목사님들 설교하는 것을 보면 너무너무 제가 은혜를 받습니다. 너무너무 말씀을 잘 전하신다하고 제가 감동을 받거든요. 그런데 이거 영 아니란 말입니다. 제가 어딜 가냐 하면 자동차를 타고 저기 양재동 가는 고속도로 있죠? 도심 고속도로에 가서 자동차문을 다 내려놓고 제가 달릴 수 있는 최대한으로 달려요. 그러면 고속도로 같은 데는 바람이 세게 오잖아요. 사실 그거 위험한 건데 얼굴에 있는 부끄러움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습니다. 정말 제가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주일날 설교 안하면 그 충격이 월요일, 화요일까지 가는 것 같아요. 수요일정도 되면 회복돼서 지내는데 요새는 제가 안 그래요. 왜냐하면 요새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다음에 잘하면 되지 뭐.'
굉장히 뻔뻔해 진 거더라고요. 굉장히 뻔뻔해졌어요.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여러분 제가 날마다 초조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뻔뻔해지면 좋겠습니까?

죄송합니다. 무슨 의미인지 제가 알겠는데 때때로는 하나님 앞에 좀 뻔뻔해질 때가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이 뻔뻔해진다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 대한 신뢰함인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요만한 것 잘못했으면 그걸 발본색원해서 그냥 "너 잘못했으니까 내가 확실하게 고쳐 놓을 거야." 하며 있는 그대로 징계하고 그러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하고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큰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에게 아픔을 주실 때는 정말 수도 없이 생각해보고 또 수도 없이 생각해보고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지 거의 대부분 우리를 참아서 품어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두려운 하나님으로 주님을 두려워해야 되지만 정말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동을 받아서 우리는 주님 앞에 은혜로 주의 뜻을 순종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 주무시는 것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지요. "믿음이 적은자여 왜 무서워하느냐?"
무서워하는 것은 믿음이 적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은 뭐지요?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전 그래요. 예수님께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무서워하느냐? 이렇게 얘기하면 뭐죠?
가만히 있으셨을 겁니다. 그냥 풍랑 이는 것 놔두고 견뎌봐라.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단 말입니다. 제자들의 믿음 상태를 아시고 '너희는 요정도구나! 너희에 맞게 해결해 줘야지.' 하고 해결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과 두려운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의 수준에 주님께서 맞춰주신 거란 말입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 주님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고 정말 주님 앞에 우리가 내세울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두려움 없는 자신감 있는 믿음의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하는 겁니다. 믿음 안에서 가지는 두려움 없는 자신감은 어떤 경우도 떨지 않고 그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최선의 대책과 최고의 결과를 이루게 합니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죄를 가지고 있고 또 불안감을 가지고 사는 죄악의 후손입니다. 우리는 따라서 마음에 언제나 불안감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에 가장 먼저 한 게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무서워서 동산수풀에 숨었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라는 것은 죄에 근거한 죄의 결과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두려움을 제거해 내려면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의 근거를 제거해 내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 삶에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기대와 삶의 소망을 가져야 됩니다.

두려움이 사라지면 즉, 죄의 근원을 제거해 내면 두려움 사라지고 자신감 생기고 우리가 생각지 못한 지경까지 나아갑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날마다 우리 마음을 맑게 닦아내는 것 같아요. 깨끗하고 맑게 닦아내야 되고 그 맑음으로 인하여 흔들림이 없고 흔들림이 없는 좌정함이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자신 있게 나아가는 삶을 이루게 하는 겁니다.
어떤 일을 이루어도 이루지 못해도 그것이 우리 마음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영적 자존감과 하나님의 임재의식, 그리고 우리 삶을 통해 임하시는 성령의 은혜의 역사를 감사하고 기뻐하고 기대하며 새로운 역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떤 일의 성과나 결과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해 최고를 기대하지만 결과에 또 초연하고 또다시 기대하며 의연히 달려갈 수 있다면 이것은 믿음의 사람의 아름다운 경지입니다. 결과에 초연할 수 있다면 내가 100점을 원했는데 100점 못 맞았어요. '나는 한번에 100점은 못 맞아도 나는 그래도 서너 번 합쳐서라도 100점은 맞을 수 있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 한 번 해서 이루는 것이지만 나는 능력이 없어서 세 번, 네 번, 열 번이라도 해서라도 이루어진다면, 능력이 없으니까 열 번이라도 해서 이루어진다면 부지런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우리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두려움 없는 자신감은 우리를 세우고, 우리의 사역과 삶을 세우고, 자신감이 있으니 실수를 줄이고 한 시간, 한 순간을 살아도 우리는 남에게 주장하지 않고 남을 이해하는 겁니다. 자신 있는 사람이 큰 소리 칠 필요 없어요. 자신 있는 사람은 남에게 꼭 이기지 않아도 됩니다. 져 줄 수도 있고 양보할 수도 있고 자신 있으니 겸손 하는 거라고 말씀드렸죠.
믿음 안에 가지는 두려움 없는 자신감은 우리로 하여금 의연히 어떤 일을 이루게 하여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의연한 자신감 있는 백성들은, 두려움 없는 백성들은 어떤 상태에서도 남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가서도 다른 사람을 도와줬습니다. 사도바울은 죄수 호송선을 타고 로마로 이송됐습니다. 그런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불어서 배가 깨지게 됩니다. 배가 깨질 지경에 이르게 되니까 사람들이 다 삶을 포기하는 겁니다. 식음도 전폐해요. 그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도 상치 않는다. 바울은 확신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니면서 우리는 하나도 상치 않는다하고 사람들을 격려해서 결국 그 사람들이 하나도 상치 않고 다 육지에 도달하게 됐습니다. 어떠한 광풍 속에서도 결국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감옥 속에서도 도와주고 광풍 속에서도 도와주고 또 예루살렘성의 훼파와 성곽의 불타버림을 보고 느헤미야는 너무너무 슬퍼 금식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는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갑니다. 백성들을 일으켜 성곽을 수축하고 믿음을 회복하고 사회제도를 개혁하는 이와 같은 역사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어떤 지경 속에서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겁니다.
늘 그런 생각합니다. 내게 주어진 상황과 여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여건을 내가 어떻게 극복하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상황이 닥쳐와도 그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게 되면 결국 그 가운데 우리는 새로운 구조를 형성하게 되고 그 구조라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합당한 때가 되면 꽃피우게 되는 겁니다.
300명의 대군으로 미디안 대군을 향해 횃불 항아리 가지고 달려갔던 기드온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두려움 없는 용기, 자신감이지요.
태양아 머물러라 하고 아말렛군사를 향하여 외치며 다가갔던 여호수아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모든 믿음의 용사들은 결국 믿음 안에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감으로 삶의 현장에 임했던 사람들이지요.
살다보면 우리가 한 없이 누추해지잖아요. 한 없이 왜소해 보이잖아요.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 가운데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평정으로 행동의 용기를 이루고 그것을 통해 이룬 결실로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게 되는 겁니다. 세상에는 구조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 사람은 도움을 받아야 돼? 왜 나는 그 사람을 도와야 돼? 불공평하잖아.
아니요, 불공평하지 않아요. 그렇게 세상이 구조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꼭 도움이 필요로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뭐 우리 교회로 따져도 농어촌 교회는 구체적으로 자립이 될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도시에 있는 교회들이 같이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은 우리 각자의 위치에서 소임을 다하는 겁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경우 있죠?
'나 하나 살아가기도 힘들어. 내 가족 하나 부양하기도 힘들어.' 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어느 날 문득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용기와 자신과 담대함이 생기면 그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래 내가 나 하나 살기도 힘들고 내 가족 하나 부양하기도 힘들었는데 그러나 이제는 그게 아냐. 내가 다른 일도 더 할 수 있어.' 하고 생각하는 순간 달라지는 겁니다.
내가 하나 밖에 없어요. 그러나 나는 다른 것을 취득할 만한 능력이 없고 자신이 없어요. 그러면 이 하나밖에 없는 것을 줄 수가 없어요.

그런데 나는 하나밖에 없는데 이거 하나 줘도 나는 또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거 줄 수 있는 겁니다. 거기서 용기가 나오게 되는 겁니다. 마음에 뜨거운 확신가운데 두려움 없는 용기와 자신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용기는 어려움을 극복하는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오병이어처럼 내 것을 내놓음으로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고 그것으로 인하여 축복과 은혜의 자리에 이르는 것까지 포함되지요. 믿음 안에서 가지는 두려움 없는 자신감은 영적 자존감을 지켜주고 우리로 하여금 결국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게 하는 겁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영적 자존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숨 쉬고 있다는 것 너무 중요한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뭔가 해야 될 일이 있다는 겁니다. 용도 폐기되면 버려지게 되잖아요.
이게 시계인데요, 손목시계인데 굉장히 커요. 그래서 제가 몇 년째 설교할 때 여기 놓고 보는데 이 시계 잘 가요. 또 안 가면 약 넣으면 잘 가고. 버릴 리가 없어요.
너무 오래 봐서 싫증나서 버린다 하면 그것도 용도가 다 된 것이겠죠.
용도가 있으면 사용되는 겁니다.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내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용도가 있다는 겁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계획과 뜻이 아직까지도 존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풍랑에 쉽게 씻겨 가지 않아요. 어려움에 쉽게 쓸려가지 않습니다. 우린 그것 버티고 서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진행하게 되는 거지요.
저는 그동안 어머니를 제가 모시고 있어서 그런지 명절 되면 식구들이 와서 제가 어디 가야 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분당에 와서 처음으로 제가 지난번 명절에 잠깐 지방에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어떤 일이 있어서. 그런데 정말 길이 막히더라고요. '우리 성도님들 참 고생한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두 시간쯤 되는 거리에서 오는데 여섯 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올라오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첫째는 여섯 시간 걸리는 것이 지루하다는 생각이 하나도 안 들었어요. 왜냐하면 아 저기 부산부터 오는 사람은 나보다 두 배 이상 걸리겠다 생각하니까 별로 안 지루하더라고요. 그 사람에 비하면 나는 상당히 괜찮은거잖아요. 그리고 지루해봐야 뭘 어떻게 하겠어요. 지루하다고 해서 뭐 해결되는 것도 없잖아요. 답답하면 창문내리고 바람도 쐬고 그리고 앉아서 빠르지도 않은 것-운전하는 것 가다 서고 가다 서고 하면 되는 거고요.

그 다음에 바깥의 풍경도 보고 해 지는 모습도 보고 어두워지면 어두운 가운데 어둠속의 나무들도 보고 그리고 생각도 하면 되잖아요. 그렇죠? 안 그런들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니 그렇게 마음 편하게 먹고 시간되면 길은 외길이니까 도착하겠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낫지요.

우리 삶이라는 것은 답답하고 정말 지루하다라고 마음 볶으면 한없이 불행해지는 것 같아요. 때로는 무기력하게 시간 보내고 할 수 없어요. 몇 시간이고 시간 보내야 그 자리에 도착하는 것을 이거 한 시간이면 도착할 텐데 하고 생각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냥 이렇게 가다보면 가는 거야.' 그냥 마음 편하게 가야지.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때로 어려울 때 힘들 때 고통스러울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때로는 무기력하게 엎드러져 있는 것 같으나 그 때를 통해서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생각하고 주의 뜻을 머릿속에 그려 행하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인내할 때 인내하는 것 이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기다리는 사람을 누가 당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정말 기다리고 인내하며 끝까지 기다리는 사람을 누가 당하겠습니까?
절대 그런 사람은 당하지 못합니다.
바로 우리 성도들이 그런 사람이 되면 되는 겁니다.
어려울 때 기다리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때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지요. 제가 늘 말씀드리잖아요. 어려울 때 우리가 어떻게 한다고요?
힘을 더 쏟고
시간을 더 쏟고
방법을 개선하고 더 기도하고
그래도 안 될 때 마지막에 인내하며 기다리는 겁니다.
우린 그 때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게 되는 겁니다.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쉬우면 쉬운 대로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믿음에 근거하여 자신 있고 용기 있게 나가는 겁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때로는 우리의 한계가 드러나는 때가 있습니다.
내 인격이 이것밖에 안 되나?
때로는 내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되나?
그렇게 애썼는데도 안 되나? 라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할 때 그것이 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주님을 깨워야 되는 것처럼 정말 주님께 은혜로 간구해야 될 때라는 것을 생각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똑바로 직시하면 그 가운데 반드시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인내하며 기다리면 반드시 기회가 생깁니다. 그것을 믿고 바라보면 우리는 두려운 마음이 없어져요.
아까 말씀드렸죠?
집중하면 우리 마음에 두려워 할 틈이 없어요.
집중해서 그 길을 가다보면 우리는 집중하는 사이에 어느 새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도착해 있는 것을 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일 안 된다고 너무 마음 볶지 마세요.
원하는 것 이루지 못했다고 너무 마음상해 하지 마세요.
오히려 여러 가지 이러저러한 어려움이 있어도 마음에 두려움 갖지 말고 오히려 어려움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며 용기 있고 담대하며 자신 있게 우리의 삶의 길을 호기롭게 가는 주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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