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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심히 주를 섬기라 (롬 1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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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주를 섬기라 (롬 12:9-21)

성도 여러분, 한 주간도 잘 지내셨습니까? 지난 주간은 날씨가 굉장히 추웠습니다. 요즈음은 어렸을 때 말하던 삼한 사온이 없어지고 날씨도 지 마음대로인 듯 합니다. 하지만 우수가 지났으니 추워야 얼마나 춥겠습니까.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저것 방해하는 일들이 많이 있어도 주님의 날을 지키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여러분들께 하늘로부터 내리는 은혜와 복이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도 설교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에 커다란 감동과 결단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습니까? 자신의 삶에 후회가 없습니까? 간혹 자기 인격에나 사업에나 어떤 일에든지 간에 실패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패의 원인으로 사회학자들은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욕심이 지나쳤다는 것입니다. 필요없는 욕심을 부렸습니다. 언제든지 실패했다고 할 때는 정도를 넘치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둘째는 목적이 없었습니다. 목적이 그 생활에 가치를 부가합니다. 돈을 벌어도 왜 버느냐가 없었습니다. 목적이 잘못되었습니다. 뚜렷한 목적이 없기 때문에 성공도 없는 것입니다. 셋째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공부 잘하지 못한 것은 죄가 아닙니다. 열심히 안 한 것이 죄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 얼마나 열중했느냐, 얼마나 총력을 기울였느냐가 문제입니다. 잘하고 못하고야 각자에게 주어진 지능이 다르고 능력이 다르고 은사가 다르므로 어쩔수 없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하지 않는 죄는 용서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도대체 나는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생각하여야 될 문제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신학자 제임스 마펫은 그의 저서 「어제」라고 하는 책에서 신앙을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신앙생활이란 미치는 생활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3,1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나는 미쳤다, 스스로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께, 나는 하나님께 미친 사람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볼 때도 그렇게 인정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마가복음 3장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바 미쳤다고 하는 말은 이성을 잃고 실성을 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어떤 일에 열중하고 그 외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 외의 일에는 전혀 마음도 생각도 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고, 또한 그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남이 볼 때는 딱합니다. 원래 미친 사람은 남이 볼 때 딱하지마는 본인은 행복한 것입니다. 남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통념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그 일에 몰두하고 열심하고 그리고 행복한 것입니다.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미쳤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를 위하여 신앙생활에 얼마나 미쳤습니까? 미쳤다는 말 들어보았습니까? 적어도 미쳤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직 예수 잘못 믿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주일날이 되고 보면 갈 데도 많고 가자는 데도 많습니다. 그것 다 뿌리치고 교회에 나온다는 것, 안 믿는 사람의 눈에는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입니다. 게다가 아주 고단한 시간이라고 생각되는데 새벽마다 새벽기도를 나간다, 바쁜시간 쪼개어 봉사한다 무엇을 한다 하니, 이거야 완전히 미친 것이지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란 무엇엔가 미쳐서 살아야 행복한 것입니다. 미치지 못해서 불행한 것입니다. 미치지 못해서 무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에게 미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앙의 사람은 과거에 매이지 않습니다. 현실에 만족하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신앙생활이란 먼 미래를 바라봅니다. 미래로부터 현재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에 끌리고 있습니다. 과거에 쫓기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에 집착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이 모든 것을 떠나서 멀리 바라봅니다. 멀어지는 세상에 대해서 아쉽지 않습니다. 가까워지는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며 그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환영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떤 모임에서 젊은이들이 묻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뭐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다가 “만일에 목사님이 이제 다시 열두 살배기 어린 나이로 돌아가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저는 그쪽으로 안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수능 시험 치기 싫어서. 나는 절대로 과거로 다시 돌아가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대로 좋고, 이걸로 만족이다, 유감이 없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멀어진다고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무능하다고 슬퍼하지도 마십시오. 적어도 믿음의 세계란 더 밝은 미래를 기대하며 사는 것입니다. 가까워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것, 그것이 예수 믿는 다는 것입니다. 그 미래를 위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해 살아감에 있어서 ‘부지런히...’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대단히 중요한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이 번역을 좀 더 원문에 가깝게 직역한 「표준새번역」에 보면 이렇습니다. “열심을 내어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를 섬기십시오.”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표현이 보다 더 원문에 가까운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뒤에 설명을 하겠습니다마는 첫째로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착안하여야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노상에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기려 하고 주려 했다- 딱 두 가지 말씀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피곤합니까. 왜 지칩니까. 왜 원망이 많고, 왜 불평이 많고, 왜 허탈감에 빠집니까.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편합니다. 어떤 사람은 또 주면서도 말이 많습니다. 주면서 무언가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것마저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준다면 그는 자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을 깊이 한번 진단해보십시오. 보상심리, 보상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깨끗이 떠나고 이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면 당신은 자유합니다.

어떤 사람 보니 한 평생 결혼생활 하고, 아이 낳고 키우고, 시중들고, 고생하고는 “도대체 나는 왜 살았는지 모르겠다”하고 푸념합니다. 그럼 뭘 바랐습니까? 주기로 시작했으니 주는 것으로 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섬기려 왔노라, 하십니다. 섬기려- 그것에다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인생관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는 길입니다. 이것이 승리하는 길입니다. 보상받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하여야 합니다. 줄 때는 주기만 합니다. 그저 섬기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섬기려는 마음 한번 가져보십시오. 여기에다 목적을 두십시오. 그리할 때 얼마나 윤택하고 얼마나 행복한 생을 사는지 모릅니다. 봉사, 그것이 행복으로 소화됩니다. 봉사를 굴욕으로, 노예적으로, 억지로-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근본적으로 섬기며 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떠나려 하고, 본질에서부터 벗어나려, 이탈하려 하기 때문에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섬긴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섬김을 목적으로, 섬김을 행복으로, 그렇게 여기는 마음, 그 삶의 자세가 바로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만든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는 주를 섬기라 하였습니다. 퀴리오스- 주를 섬기라.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보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삶의 목적을 바꾸어놓았습니다.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목적의 문제입니다. 그동안에 우리가 나를 위하여 살았지마는 이제는 나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받은 사랑에 대한 바른 응답적 자세로 살도록,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자기가치는 자기 것이 아닙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습니다. 피값으로 산 것이 되었기 때문에 온전히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생활도 내 물질도 내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이젠 오직 주님의 것이요 주님만을 섬깁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를 섬깁니다.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주를 섬기고, 자식을 위하는 봉사도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남편을 위하는 것도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교회봉사도 물론 주를 위해서, 목적과 그 가슴은 항상 주를 섬기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너무나도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고. 빌라도를 보심도 아니요 가야바를 보심도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 이렇게 생각하시고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십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지, 현실 속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슴과 뜻은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또 나아가서는 오늘 본문에 보니 열심히,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하였습니다. 열심을 품고- 헬라말은 ‘프네오마티 제온테스’인데, 여기서 ‘제온테스’는 불붙는다는 뜻입니다. 불붙는 영, 영어번역에는 burning spirit라고 했습니다. 불붙는 가슴, 불붙는 영, 그것으로 주를 섬기라- 이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소자 중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니라, 내 이름으로 봉사하는 자, 내 이름으로 파송된 자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대접하면 나를 대접한 것이니라- 실로 구체적입니다. 현실적입니다.

‘열심으로 주를 섬기라’- 자원하는 자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억지로 하는 것은 불붙는 마음이 아닙니다. 또 기쁜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 자체가 기쁜 것 아닙니까. 사실 받는 것보다야 주는 것이 좋지요. 흔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자 손녀에게 뭐든 그저 주고 싶어합니다. 어떻게든 주려고 애씁니다. 우리 부모된 마음도 자녀들에게 어떤 때는 정말 주고 싶고 더 주고 싶습니다. 줄게 없어 못주지 그저 주고 싶은 것입니다. 자, 주는 자의 기쁨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줄 수 있는 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아직도 줄 것이 있다는게 얼마나 좋은일입니까.

또 하나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보니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라고 하십니다. 저 원수에게 잘 해주면 원수가 더 커져가지고 필경은 나를 해코지하고, 사회정의가 무너지고, 세상이 거꾸로 돌아갈 것이다. 하기 쉽습니다마는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만, 뜨거운 마음으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하지 마십시오. 건방지게 생각지 마십시오. 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나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섬기는 것입니다, 열심으로. 우리의 열심을 방해하는 일은 많습니다. 의심이 있고, 결과에 대한 회의가 있고,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려들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세상에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모들이 간혹 속이 상하면 ‘자식을 키워도 말짱헛거’라고 말합니다.

어째서 헛것입니까. 그런 말 쉽게 할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헛것이라는 말입니까. 이런 마음씨가 사람을 병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헛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냉수 한 그릇을 베푼 것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헛것이 있다는 말입니까. 옛말에 ‘외손자 보느니 파밭을 매어라’ 하는 말이 있는데, 외손자는 헛거다, 그것인데, 절대로 헛된 것이 아닙니다. 어떻든 우리는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길 것입니다. 나는 섬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부지런히 일할 것입니다. 부지런히, 또 지속적으로 정성을 다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열심을 품으라’는 또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책을 보니까. 의사가 쓴 책인데, 그 의사의 할아버지도 의사입니다. 그 할아버지 의사가 손자의사에게 두고두고 가르쳐준 한마디 교훈이 있습니다. 아주 좋은 교훈입니다. “환자가 오거든 두손을 합장하고 환자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라. 내가 의사노릇을 제대로 못해서 당신이 병이 들었습니다. 미병 때, 병이 미미할 때, 그때에 고쳤어야 되는데, 그 때에 돌보았어야 되는데 중병까지 왔으니 책임은 내게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사죄하는 마음으로 환자를 보라.” 얼마나 소중한 마음입니까. 여러분, 이 사회가 이렇게 어두워진 것이 누구 책임입니까. 자식이 잘못된 게 누구 책임입니까.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무조건 사죄하는 마음으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뜨거운 마음으로 봉사할 것입니다.

일본이 낳은 유명한 종교가에 가가와 도요히꼬 라고 하는 신학자 한분이 있습니다. 이 분을 아는 이가 많습니다. 이분은 고베신학교와 프린스턴신학대을 나왔습니다. 그는 한평생 빈민굴에서 불쌍한 사람들하고 살면서 사랑을 실천함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또 많은 저서를 남겨서 세상에 감화를 끼친 분입니다. 저는 신학생때에 가가와 도요히꼬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2기, 3기가 넘어가서 각혈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는 더욱이 3기가 되어서 피를 쏟게되면 결핵균이 막 퍼져나가기 때문에 사람들과 접촉을 못하게 합니다.

옛날에는 고치는 방법도 요새같지 않아서 그 병은 아예 죽을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중해지니까 부모 친척들도 다 떠나버리고, 교회에서 찾아오는 교인들까지도 발이 끊어졌습니다. 고별예배까지 드렸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하고는 다 끝나버렸습니다. 혼자 남았습니다. 이제는 그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순간에 그는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이대로 죽음을 기다려서야 되겠나, 이남은 시간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그래서 그는 조그마한 손수레에다 자기살림 몇 가지를 있는대로 다 실었습니다. 이것을 끌고 그대로 빈민굴로 들어갑니다. 불쌍한 사람들 사는 데서 같이 머물고 살면서, 위로하면서, 그들을 돌보면서, 내가 죽을 지경인데도 남을 돌보면서 삽니다. 이윽고 그의 몸은 뜨거워졌습니다. 병이 나았습니다. 이렇게 건강을 찾아 70세가 넘도록 그는 빈민굴 속에서 한평생을 봉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그간에 어떻게 살았건 이제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보다 먼 미래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섬기는 자세로 삽시다. 오직 섬기는 것입니다. 이제는 섬김 받는 것을 다 사양하십시오. 깨끗한 마음으로 섬기고, 오직 주님만 섬깁니다. 사람눈치 보지 마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열심히 뜨거운 마음으로 섬기는, 그런 남은 생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고, 힘이 있고, 진정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할 태도를 말씀해 주십니다.

로마서 12:9-21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교독하면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우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시는 말씀대로 살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이 가득하게 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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