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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만 가지고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요 13: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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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가지고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요 13:36-38)

“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번 성지순례는 큰 감동의 여행이었습니다. 성지에서도 은혜를 받았지만, 우리 교우들에게서도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 일행은 두 팀으로 나눠 여행을 했는데, 요르단에서 느보산을 행해 가던 중 한 팀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호텔에서 출발할 때 집사님 한 분의 짐을 호텔에 두고 떠난 것입니다.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오면 느보산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 때 팀을 이끄시는 장로님께서 우리는 한 몸이니 느보산에 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함께 돌아가야 한다고 상황을 정리하셨습니다. 버스에 탔던 모두는 이 결정을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다행히 호텔로 가고 오는 길에 교통이 너무나 잘 뚫려 그 팀은 느보산을 잠깐이라도 보고 올 수 있었습니다. 또 한 팀에서는 버스 앞자리가 전망이 좋아서 누구나 앉기 원하였지만, 오히려 버스에 먼저 타는 사람이 뒤부터 채워앉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감동이었습니다. 이렇게 진행된 성지순례이니 가는 곳마다 은혜가 안될 수가 없었습니다.

  카이로의 쓰레기 마을 한 가운데 있는 동굴교회에서도, 시내산에서도, 갈릴리 호수의 선상 주일 예배에서도, 십자의 길에서도, 마가 다락방에서도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행 모두에게 성령님의 역사가 가장 크게 임했던 곳은 갈릴리 호숫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 번 부인하였던 베드로에게 오셔서 세 번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던 곳에서 드렸던 예배 때였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고 “갈릴리 호숫가에서” 찬양을 부르는데,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하는 부분에서 갑자기 성도들의 눈이 벌개지면서 여기 저기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모든 교우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주님과 대면할 때 우리가 어떤 마음이 되는지를 모두 경험하였습니다. 그 동안 우리도 주님을 부인하고 살았던 일이 많았음을 순간 깨닫게 하는 회개의 영이 임하는 순간이었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확인하였던 순간이었습니다. 만약 관리인이 우리가 예배드리는 자리를 옮기라고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거기서 대성통곡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다시 회복되는 이야기의 시작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33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도 예수님이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 질문에는 베드로의 답답함이 담겨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시는데 우리가 따라 갈 수 없다고 하십니까?’ 베드로로서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자기가 가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질문에 약간은 냉정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그러자 베드로가 흥분하였습니다. 아마 억양이 높아졌을 것입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아마 이 말을 하는 순간 베드로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으리라 생각됩니다. 베드로는 죽음 조차 각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또 충성스러웠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고맙구나. 네 말을 들으니 위로가 되는구나.” 하실만도 한데, 오히려 끝까지 냉정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에게는 아마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무나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베드로가 십자가가 질 순간이 닥치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베드로로서는 너무나 섭섭했지만 그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제게 딸이 둘 있는데, 이 아이들이 어릴 때 모두 다 자기는 커서 아빠랑 결혼할 거라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 말은 진심입니다. 그러나 저는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아이들이 때가 되면 저를 헌신짝 같이 버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달려갈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릴 때 제가 딸들에게 “아니야. 아마 아빠 버리고 딴 남자에게 시집갈 걸.” 했다면 펄쩍 뛰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문제는 그가 아직 십자가에서 자아가 처리되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십자가에서 자아가 분명히 처리된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지만 아직도 십자가에서 자아가 처리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아가 처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뜻을 가져도 아무리 그 마음이 간절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꼭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이야기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제자로 불리움을 받았으나 여전히 자아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아 중심인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못합니다. 마음이 있어도 그대로 살아지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아직도 십자가에서 자아가 처리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이제 곧 시험이 오고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가 되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이기적인 본성으로 예수님 조차 부인하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아의 본성을 몰랐던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그리고 두려움과 근심이 많은지 몰랐습니다. 그저 마음만 먹으면 그대로 할 수 있는 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하나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변화된 새 삶을 살기 위하여 마음이 간절한데, 예수님은 냉정하신 것 처럼 보여서 안타까우신 분 있습니까? 자신은 실제로 그렇게 살아지지 않는 것을 보고 아마 많은 낙심을 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내 기도에 내 결심에 역사해 주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한번 점검해  보아야 됩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자아가 처리되어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됩니다.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장 18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로 말미암아” 역사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이 차이가 엄청난 차이입니다. 어째서 사도 바울이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는지에 대한 열쇠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일하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실 수 있습니까? 십자가 복음이 분명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는 살고! 내가 아니라 주님이 하셔야 합니다.
십자가가 분명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쓰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마음의 결심은 간절해도 계속해서 좌절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두 가지 착각에 빠집니다.
첫째는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마음대로 안될 때 금방 낙심해 버리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아가 처리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안됩니다. 결심해도 안되고. 노력해도 안됩니다. 그렇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지만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 되셨으니 주님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왜 죽게 하셨는가? 우리 자아로는 아무 것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분명한 사람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사는 성도입니다. 그래서 나는 못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일이었지만 주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은 베드로 생애의 최대 실패와 좌절이었습니다. 베드로 자신으로서는 끝장이라고 생각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고도 디베랴 바다로 고기잡이하러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다시 쓰실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다시 택하여 쓰셨습니다. 죽더라도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하였던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시면서 그렇게 냉정하셨던 예수님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후에는 한 번도 그 일로 책망하신 일도 없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부인했지?”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사도로 쓰셨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건을 통하여 베드로에게 두 가지를 가르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첫째는 마음의 결심이 아무리 분명해도 자신의 결심, 마음을 의지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성령님으로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할 능력이 되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러시고는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기다리라고 엄히 당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목격하였지만 성령님이 임하여 예수님이 주님이 되셔야 예수님의 증인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과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흥분되어 있었겠습니까? 이제는 어디든지 가서 누구에게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을 떠나서는 안된다!” 제자들이 베드로의 호언장담하던 실수를 또 되풀이하려는 것입니다. 또 자신의 힘으로 하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피곤하여 조는 자기에게 그토록 기도하라고 강권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베드로는 무슨 말씀인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마음이 있다고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힘입지 못하면 아무 것도 못한다.” 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저 마음 하나 간절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우리 자아가 또한번 해결받아야 될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자아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깨달아도 절대로 그대로 살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제 기다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직접 제자였으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물 위를 걷기도 했었으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자아가 너무나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열흘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은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 세례를 받습니다. 그 후 위대한 사도가 된 것입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고 그들이 진정으로 십자가의 사람이 되고 난 다음에,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것에 대해서 완전히 믿음의 답이 오고 성령님이 그들의 삶에 진정한 보혜사가 되신 다음에서야 그들은 위대한 사도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정말 예수님의 교회가 되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교회 표어를 “예수님이 이끄시는 교회”라고 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의 모든 것, 건물 재정 사람 모든 것을 오직 주님 원하시는대로 마음대로 사용하시는 교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이것이 저만의 소원이겠습니까?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모두의 소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우리 마음대로 된다면 우리 교회는 주님께서 마음대로 하시는 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 일을 해보면 여전히 주님께서 마음대로 다스리시는 교회가 되지 못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교회 일을 해보면 우리 스스로 부끄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고 우리 스스로도 ‘아직도 이것 밖에 안되나?’ 하고 느껴지는 좌절도 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에 원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그토록 따라 가겠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 지금은 안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여전히 우리에게도 해결되어야 할 숙제로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인데 베드로가 아직은 갈 수가 없다고 하신 것일까요? 십자가의 핵심은 용서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고 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온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지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으로는 갈 수 있을 것 같아도 마음으로 갈 수 있는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34-35절에 예수님께서 주신 마지막 계명 한 가지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죄 그러면 무슨 생각이 떠오릅니까? 혹시 지난 주간에 죄 중에 빠졌던 적이 없습니까? 무슨 죄가 떠오르나요? 어떤 사람은 아마 간음이나 음란한 일을 했던 것이 떠오를 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도둑질이나 거짓말한 것이 떠오를 지 모릅니다. 여러 가지 죄가 떠오르시겠지만, 혹시 용서하지 않은 것, 사랑하지 못한 것이 떠오르신 분이 있습니까? 아마 그런 생각이 안 드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속죄의 십자가요, 주님의 가장 큰 계명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아직도 용서하지 않은 것 사랑하지 않은 것이 죄라는 죄책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큰 죄가 있다면 미워하는 죄, 판단하는 죄, 사랑하지 않는 죄입니다.

지난 주간 성지순례를 갔다가 마음 아픈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십자군 전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깃발을 높이 들고 그들이 예수 안 믿는 사람을 죽여도 되는 줄 알고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그것을 거룩한 전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 중동 땅에는 이스라엘에는 복음에 대해서 심각한 외곡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이스라엘에 가서 사역을 하시는데 유대인과 조금 친해지면 묻는답니다. 이스라엘에 왜 왔느냐, 그리고 또 하나를 묻는데 조금 더 친해지면 정말 당신은 우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생각하느냐? 지난 2천년 동안 유대인들을 예수 죽인 민족이라고 말할 수 없이 핍박을 했던 것이 기독교 역사였습니다.

여러분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생가하십니까? 예수님을 누구 죽였지요? 내가 죽인 것이지요. 어떻게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생각하나요? 복음과 십자가를 모르면 이렇게 무섭게 바뀐다 말입니다. 유대인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예수라고 하는데 예수 믿은 사람들이 제대로 복음을 알지 못하고 예수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자아가 십자가에 처리되지 않은 사람은 십자가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아직도 십자가에서 자아가 처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십자가 길을 올 수가 없다.     

성지 순례 중에 예수님 당시의 연자 멧돌을 보고 다들 놀랐습니다.
(마 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그런데도 우리는 교우들 사이의 불화를 죄라고 여기지를 않습니다. 우리 본성이 용서하지 않는 것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자아가 십자가에서 처리되지 않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1907년 한국 교회에 성령이 임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성령 역사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교회 안에서 진정으로 십자가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것은 용서와 사랑입니다. 교인들 사이에 미워하고 다투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진정으로 하나된 것입니다. 당시 한국 교회는 지도자들 사이에 심각한 내분이 있었습니다. 선교사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 주도권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1907년 1월 14일 토요일,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3파 연합 부흥회에서 블레어(Rev.W.N.Blair. 한국명 방위량) 목사가 고린도전서 12장 27절ꡐ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ꡑ는 말씀을 읽고 교회가 불화함은 마치 신체에 병이 난 것과 같으며, 교인 중 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모든 교우가 다 이로 인하여 고통을 겪어야 하며, 한 형제의 마음 속에 있는 시기심은 온 교회를 해칠 뿐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 고통을 드리는 것이라는 설교를 하면서 자신의 예를 들었습니다. 그가 조선으로 온 지 얼마 안되어 사냥을 하다가 실수하여 손가락 하나를 상한 일이 있는데 조선인 교우들이 이것을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손을 들고 여러 사람에게 손가락을 보이면서 그 상한 손가락 하나 때문에 얼마나 걱정을 하며 전신이 얼마나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 예화가 청중들에게 감명을 준 모양이었다. 그 설교가 끝난 뒤 많은 사람들이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고 자기네들이 너무도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었었다는 것을 고백하였다. 블

레어 선교사의 글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 날 밤에 교인 중 한 사람이 일어나서 자기가 이 때까지 어느 장로를 미워하고 있었노라고 고백하고 그 잘못을 뉘우쳤다. 그 때 그 장로는 여러 장로들과 함께 앉아있었는데,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여 보고 있는 중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앞으로 나와 교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 때까지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교회 장로로 나의 형제인 장로님을 미워하였을 뿐 아니라 방목사를 미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강대상에 있는 나를 돌아보며 눈물 범벅인 된 채,ꡒ목사님, 나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까? 나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실 수 있습니까?” 라고 되묻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무릅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가 한 기도는 오직ꡒ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ꡓ를 부를 뿐이었다. 이 때 우리가 느낀 것은 마치 예배당의 지붕이 걷히고 하나님의 성령이 산사태처럼 밀려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장로 옆으로 가서 그를 붙잡고 기도했다. 그 기도는 일찍이 해본 일이 없는 간곡한 기도였다. 그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여 기도하였다. 그 때 온 교인들이 오직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애원하며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다. 부흥이 임한 것이다.“ 

  부흥의 본질은 십자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곧 진정한 용서와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마음만으로 안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성령님의 역사로만 되는 일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빌리그래함 목사님에게 “교회에 부흥을 일으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그 목사님에게 대답하였답니다. “목사님 자신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아가 십자가에서 처리되지 않았다면 부흥을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오히려 성령님의 역사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 복음이 분명하지 않으면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마음만 가지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십자가 복음이 분명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그렇게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그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자신 안에 가정 안에 교회 안에 일어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지금은 나를 따라올 수 없지만 이제 후에 네가 나를 따라올 수 있게 되리라”
항상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악하고 이기적이고 더럽다고 좌절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과 함께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만지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소원이지만 십자가가 분명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좌절에 빠지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이 시간 여러분에게 십자가에 대해서 분명하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주님이시고 생명이십니다.”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사랑과 용서의 영을 역사하실 것입니다. 회개의 영을 여러분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주여, 성령을 부어 주시옵소서. 우리 마음은 간절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고 싶으며 천국같이 가정을 이루고 싶고 주님의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우며, 축복과 은혜의 통로로 살고 싶습니다. 이 마음을 받아 주시옵소서. 그리고 성령으로 기름부어 주시옵소서.
마음만 가지고 조급하게 서둘렀던 것을 회개합니다. 
마음대로 안된다고 쉽게 낙심하고 좌절하였던 것도 회개합니다. 
오 주여 성령을 부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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