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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를 이기는 비결(창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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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이기는 비결(창 4:4-9)

전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살인기록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어느 나라일까요? 총기 난사가 자주 발생하는 미국 같지만 우리나라입니다.  1982년 경북 의령에서 우순경이라는 사람이 경찰 무기고에서 수류탄, 소총을 탈취한 후 동네주민 무차별 사살하여 56명이 죽고 34명이 중상을 입고 수류탄으로 자살한 사건입니다.
범행 동기는 더욱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좌천되어 기분이 나빠 있던 차에 교대 근무를 하고 내연의 처 집에서 낫잠을 자는 데,  내연의 처가 파리를 잡는다고 얼굴인가에 파리채로 때렸습니다.  순간 욱하는 것이 올라와 술을 마시고 파출소의 무기고를 털어 닥치는 대로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아 댔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지만 사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가인의 살인 동기도 비슷합니다.  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가인은 얼굴색이 달라졌습니다.  몹시 분했습니다.  욱하는 것이 올라온 것입니다.  그리고 아벨을 들로 유인하여 쳐 죽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입니다.  경북 의령의 우순경이나  창4장의 가인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모습은 몇 천년, 몇 만년의 세월이 흘러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가 너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죄가 원한다, 이 말은 죄는 인격을 가진 실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는 자기 생각, 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듯이 죄는 자라 갑니다.  사단이라고 하는 실재가 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와  하나님을 떠나도록 하는 죄를 범하게 합니다.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 조승희는 NBC에 글을 보냈습니다. “내가 한 일이야. 그렇게 해야 했어. 오늘의 참사를 막을 방법은 수없이 많았지만 너는 결국 내 피를 보겠다고 결정한 거야. 너는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내게는 한 가지 선택밖에는 없었어. 네가 이렇게 만든 거야. 너는 이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그 피를 내 손에 묻히게 한 거야.”
그가 말하는 ‘너’가 누구일까요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이 결국 내 피를 보게 했다.”  “너는 내 머리에 암 덩어리를 집어넣었고, 내 심장을 위협하고, 내 영혼을 항상 짓밟았어”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살인은 마귀의 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44).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어떻게 하면 죄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7절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교회의 사명 선언문에 ‘영향력 있는 공동체로 가꾸어 가는’ 것이 사명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선한 영향력이 죄를 이깁니다. 

선한 영향력의 첫 번째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된 것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지고의 선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잃었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생명의 복음은 가장 기초요,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었습니다.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자 사람과의 관계도 깨어지는 것입니다. 
사단은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떠나게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에서 자기 뜻대로 되어지고 결국 망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떠나 죄 가운데 죽어가는 우리들이 다시 하나님을 만나 관계가 회복되도록 하나님 만나는 길 되신 예수님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마음에 모시어 들인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죄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했는데,  이제 주님 안에 있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 있는 사람은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으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선한 영향력의 두 번째는  서로 사랑하며 축복하는 것입니다.  예수생명을 얻었다고 모든 것이 다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이 자라도록 하나님의 풍성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악이 자라듯이  예수생명이 자라도록 할 필요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죄가 먹고 자라는 것이 있고  예수생명이 먹고 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믿는 우리들은  죄가 자라도록 하는 것을 공급하기보다 예수생명이 예수풍성으로 나아가도록 선한 영향력을 공급해야 합니다.
죄가 먹고 자라는 것은 비교하는 것에서 오는 열등감, 그리고 소외감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통하여 우리 자신에게 ‘네가 분노하며, 안색이 변함이 어찜이뇨’ 라고 질문하심으로 우리의 감정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게 하십니다.  죄가 양식을 삼는 병든 감정이 있습니다.  무시 되었다고 느끼게 하는 소외감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아 주셨으나 자신의 제물은 받아주시지 않았다는데서 분노하게 되었고 안색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동생을 죽였습니다.  소외감은 죄를 자라게 합니다.  왕따가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탕자인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아 그 재산을 모두 팔아 외국에 가서 허랑방탕하며 탕진하여 거지가 되고 맙니다. 그는 굶어죽게 되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죽은 아들이 돌아왔다고 그 아들에게 새로운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첫째 아들이 들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동생을 위한 잔치를 보고 분노하며 아버지께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눅 15:29-30)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들의 분노와 불평과 원망은 아버지가 자신을 무시하여 소외시켰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큰 아들의 무시하였다고 느끼게 하는 소외감은 분노와 불평과 원망의 병든 감정을 만들어냈고 자칫하면 죄를 범할 수 있는 상황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결코 어느 아들도 소외시키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눅 15:31-32)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무시의 대상으로 소외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죽어야 마땅할 죄인 한명 한명까지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분이십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단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우리를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무시 받는 대상으로 느끼게 하며, 소외된 것처럼 느끼게 하여 절망의 감정을 조성시킵니다. 이런 감정을 먹고 죄가 자라도록 유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감정의 사람으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축복하는 것이 죄를 이기는 길이요,  예수풍성을 누리며 천국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우리에게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우리가 하는 알파코스는 “서로 사랑”하는 훈련입니다.  하늘가족은  서로 축복하며 격려하는 가족입니다.  우리들이 마음껏 축복하며 사랑할 때,  예수생명은 무럭무럭 자라 예수풍성함이 더욱 나타날 것입니다.

희랍의 어느 도시에 경기에서 늘 우승하는 육상 선수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선수로 말하면 국내 경기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리며 공을 세웠기에 나라에서 동상을 세워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그와 맞먹는 훌륭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수는 경기 때마다 우승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실의에 빠져 경쟁선수의 동상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맞았어, 바로 저 친구 때문에 내게 승리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야. 저 친구만 없애 버리면....” 이러한 마음을 품고 있던 그는 그날 밤부터 매일 동상을 찾아가 조금씩 구멍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동상이 쓰러지는 날, 네놈도 끝장이다. 네가 없으면 내가 승리자가 될 거야”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동상에다 대고 분풀이하던 그가 마침내 동상을 쓰러뜨리고 말았습니다. 아! 하는 환호성을 지르는 순간 넘어진 동상이 그의 몸을 덮쳤고, 그는 그 밑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조승희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 우리나라와 미국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조승희 사건으로 한국인들은 단지 한국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까봐 큰 걱정입니다. 그런데 미국 언론은 한국이나 한국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건을 일으킨 조승희에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가 미국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이 책임이 아니라,  미국과 미국사회가 책임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와 그 가족을 불쌍히 여기고, 심지어 버지니아 공대 교정에는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와 함께 그의 추모비도 함께 세웠습니다. 그 추모비에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네가 그렇게도 필사적으로 필요로 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가슴이 아팠다. 머지않아 네 가족이 평안을 찾아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축복이 너에게…”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입니다. 우리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많은 문제가 있는 미국이지만 미국이 건재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복음 위에 세워져 있는 나라, 그리고 복음으로 용서하고 축복할 줄 아는 나라. 그리고 하나님 말씀으로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를 알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아픔이 있지만 서로 사랑하며 축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순경 사건은 어떻게 마무리 되었습니까? 사건 당일 자리를 비운 궁유지서장 등 4명을 구속시켰고 내무부장관도 사임시켰습니다. 이들은 또 다른 억울함을 느끼며 죄의 싹을 키우고 있지 않았을까요?  복음화된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책임추궁도 있어야 하지만 먼저 예수사랑 예수생명 예수풍성입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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